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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7

     내가 매국노 그레이로 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노스트럼 사람들은 인도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금 잔인한 말일 수도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 소수를 건지기 위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면 나는 그 소수를 잘라내는 인간이다.

     ‘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황제가 나를 후계자로 삼은 걸지도.’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인자하거나 자비로운 인간은 아니다.

     애초에 같은 노스트럼 사람이라고 모든 걸 봐주고 그랬다면, 매국노 그레이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총으로 쏴 죽이지 않았을 터.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

     왕도에 있는 백성들 중에 거짓된 황금을 머금은 이가 존재하기도 하며, 이전에 내려졌던 명령 때문에 그들은 뱃속에서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나를 죽여야하지만-

     “바람 참 시원하네요.”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든, 비행선을 띄워 지브롤터로 날았다.

     “…….”

     “걱정되십니까? 왕으로서?”

     “아무래도, 조금.”

     내 옆에 선 나리아는 점점 개미처럼 작아지는 왕도 톨레도의 시민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이라고 원망하는 눈빛이 선하군요. 평생…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리아는 완전기억능력 때문에 잊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저기 아래, 백성들이 비행선을 올려다보며 짓는 표정을 전부 기억할 수밖에 없다.

     “잊지 마십시오.”

     “예?”

     “저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십시오. 당신이 평균 이상만 하더라도 저들은 당신을 성군으로 칭송할 것이며, 그 성과를 차츰차츰 한 계단씩 쌓기만 하더라도 역대급 여왕이 될 것입니다.”

     원래 왕에 대한 평가라는 건 상대적이다.

     전임 왕이 너무나 압도적인 성과를 내놓으면 그 다음 대의 왕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들도 이해할 겁니다. 황금을 머금은 이는 역병을 품고 있는 자와 같은데, 어찌 황금으로부터 안전한 지브롤터에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거짓된 황금을 흡수한 이들은 심각한 전염성을 가진 역병 보균자다.

     관점은 조금 다르지만, 역병이 터졌을 때 주변에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그 결은 같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됩니다. 의외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여왕님의 생각보다 더 빨리 지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어머니는.”

     “괜찮을 겁니다.”

     나리아가 흔들리는 이유는 역시, 어머니인 카르멘 왕비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

     “…….”

     “죽지 않을 겁니다. 살리기 위해 지금 지브롤터로 향하는 거니까요.”

     “방도가 있습니까?”

     “예. 아주 적절한 방도가 있죠. 원래 영원히 잠자는 저주를 받은 공주를 깨우는 건 백마탄 왕자님의 역할이거든요.”

     “…….”

     나리아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방법, 키스 아닙니까?”

     “맞습니다.”

     “…후작께서, 할까요?”

     “일국의 왕비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죠.”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카르멘 왕비라면 아버지도 기꺼이 행동할 것이다.

     아버지도 꿈 속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게 아니며, 오히려 그 제안을 했을 때 어머니부터 받아들일 테니까.

     “마법으로 신체는 치료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록 내부 장기의 일부는 손상되었고 평생 후유증을 달고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계속 잠들어있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게 낫죠.”

     카르멘 왕비는 잠들어있다.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의미가…있을지.”

     “의미가 있죠. 나리아. 왕권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질문에 나리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스트럼의 전설과 같이 황금룡의 수호를 받은 일족만이 왕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지오 노스트럼만이?”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왕이란 국가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법.”

     나리아가 왕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국가는 백성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왕권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백성이 없는 왕은 그저 허울뿐인 왕입니다.”

     “예. 원론적으로는 그렇죠. 협곡 너머, 제국 땅에서 통하는 제왕학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

     “노스트럼에서는 다릅니다.”

     상식. 원론. 이론. 철학.

     그 모든 것이 ‘노스트럼’이라는 땅에서는 무너지고 비틀린다.

     “노스트럼의 땅에서 국왕은 그저 황금룡의 수호를 받은 일족만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이 없더라도, 모든 백성이 죽더라도 노스트럼의 군왕만 살아있다면 노스트럼은 다시 부흥할 수 있습니다.”

     미래, 망국의 공주가 내게 했던 말이다.

     물론 그녀의 말은 공허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노스트럼의 왕에게 이어지는 그 힘이 있다면 말이죠.”

     지금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가지고 있는 힘.

     “무수히 많은 황금을 다루는 기적도. 죽은 자를 되살려 그 영혼을 조종하는 권능도. 황금을 통해 사람들에게 환상의 세상을 보여주게 한 뒤, 그 황금을 몸 속에 집어넣어 폭발마석처럼 사용하는 이능도. 전부, 황금룡의 축복을 받은 이의 전유물이죠.”

     “…….”

     “그 뿐만이 아닙니다. 노스트럼의 국왕에게는 설령 그런 권능을 가지고도 실패했을 때,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한 번의 찬스가 있습니다.”

     황제는 모른다.

     황제는 나리아를 제왕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그녀에게는 제왕이 될 수 있는 힘이 있다.

     정정.

     있’었’다.

     “국왕 본인이 대영웅이 되든, 소드마스터 12명을 모아 영웅기사단을 만들어 이끄는 영웅왕이 되든, 아니면 영웅급 학자들을 모아 아카데미를 만들어 교육혁명을 일으키든, 노스트럼은 지오 노스트럼-당신의 피가 이어져야만이 비로소 노스트럼 왕국으로 빛날 수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노스트럼의 수많은 왕들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500년 동안 단 한 명도 실패한 적이 없는 나라. 정상적으로 부르기는 어려운 나라죠.”

     “…….”

     나리아가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 나리아는 내가 아는 망국의 공주가 아니며, 망국의 공주로부터 기억을 이어받은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저도 거짓된 황금으로 그 꿈 속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요?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레이, 당신이 제 오라버니이며, 저는 노스트럼이 아니라 지브롤터의 핏줄이었죠.”

     나리아에게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꿈 속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별개로 본질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아무리 사람이 경험을 쌓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꿈 속에서의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유능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서지 않고 싶어했지만, 자신이 아니면 안 될 상황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꿈 속의 저는 지금의 저보다는 조금 더 수동적인 인간이었겠네요.”

     “…10살.”

     나리아가 나를 바라봤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순간의 모습부터, 당신은 이미 꿈 속 세상의 당신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겠죠.”

     “그 계기가 무엇인지 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꿈이든 현실이든, 저는 당신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요.”

     “능력있는 오라버니를 두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풋.”

     나리아가 내 농담에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더 의지해야겠네요.”

     “당연하죠.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네?”

     “나리아.”

     나는 진지하게 나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여왕이 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제게 맡길 의향이 있습니까?”

     “…….”

     “잘 될 거라는 보장은 못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간다면, 어쩌면 개죽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관념으로 판단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은 싸움이니까요.”

     “노스트럼의 피에 흐르는 황금룡의 권능 말입니까.”

     “예.”

     마법의 범주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적들이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마지막까지 어떤 수단을 남겨뒀는지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뒤-당신이 성인이 되는 날부터는 우리가 반격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믿겠습니다.”

     나리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10살에 만났던 순간부터 믿고 있었으니까요.”

     “네?”

     “저를 여왕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잖습니까. 여왕이 된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나리아가 퉁명스럽게 잠시 투덜거렸으나, 곧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축출하고, 더 이상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에게 살해 위협을 받지 않는 여왕으로 만들어준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예.”

     

     아스타시아를 위해 합스베르크를 죽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감정에 기반한 삶의 목표라고 한다면.

     “당신을 여왕으로 만들고, 무능왕을 제거하겠습니다.”

     나리아를 여왕으로 만드는 건 은혜갚기다.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나에게 넘겨준 것에 대한 보은.

     “사실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설령 노스트럼이 멸망한 세계선을 되돌려 노스트럼이 멸망하지 않고 나리아로부터 대를 이어나가도록 한 황금룡의 안배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남의 어머니를 계속 노리는 국왕을 왕으로 섬길 수는 없죠.”

     회귀한 뒤든, 회귀하기 전이든.

     “저는 10살 때부터 무능왕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으니까요.”

     * * *

     구구구.

     최대한 안전하면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풍석의 출력을 높이며 하늘을 달린 게 약 3시간.

     황금의 비행선이 지브롤터 후작령-캐롤라인 성에 도착했다.

     중간에 혹시나 비룡을 이용한 습격이 있을까봐 다소 걱정하기는 했지만 습격은 없었다.

     아마도 윈체스터 대공이 붙여준 흑장미 용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호위해준 덕분이겠지.

     -카르멘을 잘 부탁한다, 그레이. 왕도의 혼란은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마.

     윈체스터 대공은 나의 부탁으로 왕도 톨레도에 남았다.

     사실상 혼란과 공포에 빠진 백성들을 대공에게 전부 맡겨버린 택이 되었지만, 오히려 대공이기에 왕도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왕도에서 인망을 쌓은 권력자.

     소드 마스터이며, 강력한 무력집단을 가지고 있는 자.

     동시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에 의한 황금폭발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본인이 아닌 딸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자식이 죽음에 이를 뻔 했으니.

     대공은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내가 어느정도 조언을 하기도 했다.

     -카르멘 왕비가 죽기 직전에 크림슨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리아 여왕은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옆을 지키는 것이다?

     나리아가 왕도를 떠나는 건 백성들을 버리는 게 아니다.

     사실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걸 직접 말하면 안 된다.

    -…확실히. 공식적인 명분이라고 하면 이상하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심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군.

     카르멘 왕비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설령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나리아가 진정한 여왕이 되는 순간 이후에 살아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적어도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나리아는 어머니의 유언과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 지브롤터에 왔을 뿐이다.

     “도련님. 착지합니다. 충격에….”

     덜커덩.

     땅에 착지하기 무섭게, 땅과 이어지는 출입용 보조계단을 설치하기도 전에 갑판 위로 누군가가 뛰어올랐다.

     “카르멘은?”

     “이쪽입니다.”

     아버지가 바로 갑판으로 뛰어왔다.

     이미 마도구를 통해 상황을 들은 아버지는 캐롤라인 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요?”

     “가장 안전한 방에 모두 대기 중이다. 누아르도 있고 멘테 경도 있으니, 그 괴물이 나타나도 안전할 거야.”

     “예. 두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달려갈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여기입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아버지를 보며 흠칫 놀랐고, 곧 아버지의 시선을 받자 다들 알아서 방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

     

     저벅, 저벅.

     아버지는 침대를 향해 그대로 다가갔다.

     

     카르멘 왕비는 일어나지 못했으나, 아버지는 카르멘 왕비의 옆에 앉아 외투를 벗었다.

     “그레이.”

     “예, 아버지.”

     “캐롤라인을 순정으로 가져와다오. 아무래도 체력이…조금 많이 필요할 것 같으니.”

     아버지는 카르멘 왕비를 덮은 이불을 옆으로 걷은 뒤, 손에 오러를 일으키며 카르멘 왕비의 복부 위에 올렸다.

     “몸 안에 퍼진 황금을 오러를 이용해 전부 제거해야겠다.”

     “아버지. 제가 돕겠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르멘 왕비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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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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