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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8

   ‘…아이야. …거라.’

   

   뇌리를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목소리에도 프레테의 정신은 여전히 깊은 곳에 잠들어있다.

   

   ‘나의 아이야. 아직 그대에겐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일어나거라.’

   

   눈에 새겼던 그 풍경이 프레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광경을 뇌리에 새기느라 바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정신이 깊은 늪에 빠져 있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여신께서 간곡히 불러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나의 아이… 하아. 일어나라고! 아르마디님께서 독점한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간직하기로 했잖아! 그거 훈수 두려고 목소리 낼 기회 아끼고 있었는데 이러면 곤란해! 일어나! 일어나아아아아!’

   

   “흡?!”

   

   여신의 간곡한 외침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프레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왜 정신을 잃은 채 처음 보는 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단 말인가.

   

   …아. 그래. 나는 알른 영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리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숲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곳에 오자마자 노출이 많은 복장을 입은 알른 영애를 마주했고 그 분의 모습을 눈에 담은 나는.

   

   나는.

   

   “크헉?!”

   

   루시의 모습을 되새기다 또 다시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프레테였지만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또 기절하지 마라. 이 허약한 변태 녀석아.”

   “…리나님.”

   

   리나. 거대한 숲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주인이자 자신의 영역에서는 가히 신에 가까운 권능을 지닌 자.

   

   그녀는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아니한 채 프레테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녀와 루시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한 것도 열이 받는데 코피를 쏟으며 기절하는 것으로 본녀와 루시의 시간을 빼앗기까지 하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 분노가 너무나도 정당했기에 프레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리나님. 그 알른 영애께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바깥에 나가 단련을 하는 중이다.”

   

   가볍게 숲 한 바퀴를 돌고 온다 그랬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것이라는 리나의 말에 프레테가 헛웃음을 흘렸다.

   

   리나님께서 관리하시는 숲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한 바퀴가 가볍게 달릴 거리는 아닐 터인데.

   

   정말 아직 아카데미 1학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신체능력을 지니신 분이구나.

   

   “그대라는 불행이 일종의 축복이 되었다 봐도 무방하겠구나. 덕분에 땀범벅이 된 루시가 그 매끈하고 보드랍고 말랑한 발로 이 얼굴을 짓밟아 줄 터이니. 아아. 상상만 해도 행복하군. 이 혀로 발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녹아내리다 못해 징그러운 리나의 얼굴에 프레테가 쓴웃음을 짓는다.

   

   나도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 생각한다만 리나님은 격이 다르군.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을 듯 해.

   

   “그렇담 알른 영애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겠군요.”

   

   영애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초상화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세팅을 해둬야지.

   

   그 분의 미모를 화폭에 담는 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프레테였지만 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안개가 퍼져선 프레테의 어깨를 짓눌러 강제로 앉혀버렸으니까.

   

   “그 전에. 몇 가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나약한 변태 놈아.”

   “…어지간한 것이라면 이러지 않아도 답을 해드릴 것입니다만.”

   “네 놈과 네 놈이 모시는 여신은 무엇을 목적으로 루시에게 접근하는 것이냐.”

   

   리나의 눈빛에 짐승 특유의 사나움이 새겨짐과 동시에 프레테의 어깨를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여신의 사도로써 충분한 강자의 반열에 든 프레테마저도 부담을 느낄 수준의 압박.

   

   다급히 신성을 돌려 간신히 압박에서 벗어난 프레테가 다급히 목소리를 낸다.

   

   “미와 예술을 추종하는 이로써 영애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생각 뿐입니다. 그 이외의 의도는 존재치 않습니다.”

   “네놈이 모시는 여신도 그렇더냐?”

   “고귀하신 여신의 뜻을 이 어리숙한 사도가 어찌 모두 알겠습니까만은. 영애의 아름다움을 널리 퍼트리라 한 것이 그 분이시니. 제 뜻과 크게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레테가 말을 끝마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던 리나는 이내 짜게 식은 눈빛과 함께 다른 물음을 던졌다.

   

   “루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네 녀석은 기꺼이 그녀를 도울 터인가?”

   “당연하지요.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가 있는데다가. 그녀라는 기적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어찌 가만 두고 보겠습니까.”

   

   여신께서도 칭송하길 망설이지 않는 그 아름다움이 져버릴 위기라면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설령 프레테가 두려움을 품는다 하여도 여신께서 그의 등을 밀어주실 터이니 프레테는 당연히 루시를 돕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시에게 음험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겠지?”

   “저를 뭘로 보시는 지 모르겠군요. 전 인간이기 이전에 예술 교단의 사도입니다. 그녀라는 예술품을 어찌 저 따위가 더럽히겠습니까.”

   

   점차 기세를 더해가는 압박 속에서도 프레테는 코웃음을 쳤다.

   

   다른 의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만큼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물음이었기에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쯧. 쓸데없이 정직해선.”

   

   리나가 혀를 찬 순간 프레테를 짓누르던 연기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물으실 것이 더 있다면 빠르게 해주시지요.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지라.”

   “네가 데리고 간 악신의 사도는 지금 어찌하고 있느냐.”

   “교단에서 심문 중입니다. 악신과 관계된 자들은 서로 모시는 신이 달라도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니까요. 타리키의 잔재를 지움과 동시에 다른 악신의 흔적을 묻고 있습니다.”

   “루시에게 보여줄 만한 상태인가?”

   “…음. 아뇨. 고결하고 선하신 영애께 보여드리기엔 다소 험악한 모습인지라.”

   

   프레테는 시체를 보고 창백하게 질리던 루시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녀는 고결하고 굳건하지만 그만큼이나 섬세하고 가녀리다.

   

   그렇기에 끔찍한 모습은 보여 줄 수 없다. 루시라는 예술품에 흠집을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자에게서 얻어낸 정보야 전달해 드릴 테지만 그 놈의 얼굴을 보여드릴 일은 없을 듯 하군요.”

   “옳은 선택이다. 루시의 정신에 부담을 더할 필요는 없지.”

   “다른 것은?”

   “이제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류의 물음이다만. 혹여 루시의 그림을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안 됩니다. 저는 그림을 개인적인 소장의 용도로 사용하기로 약속을.”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니다. 내 감추어 두었던 소장품의 일부와 거래를 하잔 게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는 루시가…”

   

   *

   

   평소에 정돈된 흙바닥만 달리다가 숲에서 달리기를 하니까 느낌이 전혀 다르네.

   

   제대로 닦인 길이 없어서 신경 쓸 부분이 많은데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장애물들을 피하는 게 재밌고.

   

   숲의 공기가 상쾌한 것도 마음에 들고. 중간중간 자그마한 새나 귀여운 동물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뭣보다 갑작스레 뛰어드는 호랑이 같은 애들을 꿀밤으로 진정시켜 준 후에 마음대로 쓰다듬어 줄 수 있는 게 최고였어.

   

   덕분에 아침부터 잔뜩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다.

   

   변태 사도가 코피를 쏟으며 기절했을 때는 진짜 오만 생각이 다 들었었는데 지금은 녀석이 쓰러져줘서 다행이다 싶을 지경이야.

   

   물론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역겹단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만.

   

   인벤토리에서 꺼낸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저택의 문을 연 나는 당연히 얼빠여우가 튀어나오며 괴상한 소리를 지껄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빠여우는 내가 안 쪽으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네. 평소 같았으면 코를 킁킁거리면서 헤벌래 웃다가 내 피부를 핥으려고 들어야 하는데.

   

   여기에 있는 게 본체라 나름 자중을 하려는 걸까 생각하던 중 복도 안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는 걸 보면 변태 사도랑 얼빠여우가 이야길 나누고 있는 건가.

   

   무슨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길래 내가 온 것도 눈치 못 챈 거지?

   

   호기심이 생긴 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오오. 이것이…”

   “어… 굉장…”

   

   얼빠여우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묻어나네. 자기 권능 같은 걸 보여주고 있는 거려나.

   

   “농축된 향취가 너무도 향기롭군요.”

   “그만! 거기까지 해라! 이 이상은 거래를 끝마치고 나서다!”

   거래? 뭔 거래?

   “…리나님. 다른. 다른 것으로 값을 치를 순 없겠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루시의 땀이 서린 이 옷감은 오롯이 루시의 초상만으로 교환할 수 있다! 그딴 소리를 지껄일 것이라면 내 그대를 쫓아버릴 것이야!”

   

   …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깨달은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인벤토리에서 메이스를 꺼냈다.

   

   <후아. 여아야! 저 인벤토리라는 곳은 너무나도 답답하다!>

   ‘할아버지.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무슨 일이. 아니.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마. 신경 쓰지 말거라.>

   

   문을 걷어차며 방 안에 들어서자 과거 내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수건을 꼭 쥐고 있는 얼빠여우와 그 수건을 매달리듯 붙잡고 있는 변태 사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루시? 어. 언제 온 게냐. 아! 이건 저 그러니까!”

   “ㅇ…영애님. 일단 그 메이스는 내려놓으시죠. 대화. 대화를 합시다. 저희 지성인 답게.”

   “뒈져♡ 살 가치도 없는 역겨운 쓰레기 새끼들♡”

   

   *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에 발을 들인 후. 나는 자주 스스로의 약함을 한탄했다.

   

   대련에서 패배하여 입술을 곱씹던 그 순간부터 시작해 죽음의 위기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던 그 순간까지.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되뇌고 또 되뇌었지.

   

   그리고 지금도 난 스스로의 약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내 힘이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두 쓰레기를 변태 주신의 곁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씹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소름이 끼치네.

   

   대체 얼빠여우 저 변태새끼는 내가 땀 닦은 수건을 언제 빼돌린 거지?!

   

   그리고 변태 사도 이 새끼는 도대체 왜 그 수건을 가지고 싶어서 발악을 하고 있던 거고!?

   

   진짜 뭐가 문제지?

   

   대체 뭐가 문제기에 내 주변에 이런 미친 변태 새끼들이 꼬이는 거냐고!

   

   “저어. 여아야.”

   

   진지하게 스스로의 업보를 점검하고 있으려니 엎드린 채 내 의자 역할을 하고 있던 얼빠여우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으. 포상을 주는 건 좋다만 그 수건만큼은 돌려주면.”

   “숨 쉬는 것도 아까운 개변태는 가구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닥쳐♡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흐아앗. 이건 이것대로…”

   

   아래에 깔려선 부들거리는 얼빠여우를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들자 가만 날 지켜보던 변태 새끼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신을 모시는 사도라는 녀석이 대체 왜 이런 정신병자인걸까.

   

   사도면 최소한의 경건함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자기가 모시는 신이 이 꼴을 보면 무슨 생각을.

   

   …아. 맞다. 기억났어. 미와 예술을 관장하는 그 까마귀 년도 정상은 아니었잖아.

   

   아름다운 거라면 뭐든 가지려 드는 탐욕스러움에 개 쩌는 일러스트를 지니고도 민폐 까마귀라 불린 여신한테 뭘 기대하겠냐.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변태 사도가 슬며시 내 눈치를 봤다.

   

   자기가 정신 나간 짓거리를 했단 자각 정도는 있는 모양이지?

   

   하. 그래. 좋게 생각하자.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이 변태 새끼한테 보석을 받아낼 명분이 생긴 거잖아.

   

   “야♡ 변태 새끼♡”

   “부르셨습니까?!”

   “난 무지무지무지~하게 착한 사람이라서♡ 재활용 불가능한 개변태쓰레기 새끼인 너한테도 특별히 용서받을 기회를 한 번 제공해줄게♡”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이 프레테! 제가 모시는 여신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사람들이 너 같은 변태 새끼가 만든 보석을 참 좋아한다며?♡”

   

   턱을 괸 채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프레테가 눈을 끔뻑였다.

   

   “뭔데♡ 역겨운 변태 새끼주제에 나름 예술가랍시고 뻗대는 거야?♡”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영애께서 착용하실 장신구를 드리는 것은 제 입장에서 보상이 되는지라.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말에 순간 혼미해진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았다.

   

   “하♡ 너 같은 변태 새끼가 만든 걸 내가 찰리가 없잖아?♡ 꿈도 크시네♡ 주제 파악 좀 하고 찌그러져 있지?♡”

   “그런?! 영애! 부디 생각을 바꿔주십시오! 최소한 제가 만든 것을 보고서 생각을!…”

   

   사극에 나오는 신하마냥 한 서린 목소리로 통촉해달라 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일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때.

   

   악신들을 조지러 가기 전에 일단 얼빠여우랑 변태사도부터 처리하자.

   

   그게 맞는 것 같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신보다도 위협적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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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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