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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8

    푸른 하늘이 드리운 산속,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이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길을 따라 깨끗한 자갈들이 뿌려져 있어, 그 위를 걸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아름다운 계곡으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머리 위에는 검은 사신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검은 사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물이 정말 맑네. 자갈도 반짝반짝 빛나고. 공기도 상쾌하고! 여기 정말 좋다, 그치?” 

    삐-!

    그러자 검은 사신은 대답하는 것처럼 맑은 소리를 냈다.

    검은 사신도 이 장소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배낭을 내려놓고 검은 사신과 함께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남자가 망치처럼 변한 검은 사신을 가볍게 휘두르자.

    마치 텐트 팩이 부드러운 땅에 파고드는 것처럼, 단단한 바닥에 손쉽게 박혀 들어갔다.

    남자가 손을 휘두르는 것에 맞춰서 검은 사신이 자기 몸을 움직여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검은 사신 망치는 가볍게 휘둘러도 딱 필요한 만큼의 힘을 발휘했고.

    검은 사신이 남자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아 줘서 놓칠 일도 없었고.

    잘못된 방향으로 휘둘러서, 자기 손을 찍게 되더라도 검은 사신이 흐물흐물하게 변해서 다칠 일이 없었다.

    망치 머리에 달린,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도 귀여웠다.

    게다가 망치 말고도 장갑 같은 의류를 포함한 수많은 도구로 변형할 수 있으니, 다른 도구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검은 사신이 심심할 때마다, 조그마한 혀가 손바닥을 할짝거린다는 점만 빼면 정말 완벽했다.

    “고마워.”

    남자는 고마운 마음에 간이 탁자 위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검은 사신을 품에 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남자는 검은 사신에게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었다.

    현재 하는 일도 검은 사신이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남자의 직업은 풍경 좋은 자연을 돌아다니며 캠핑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오브젝트가 대대적으로 나타난 후 30년.

    필연적으로 인적 드문 곳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캠핑은 완전히 죽어버린 취미가 되어버렸다.

    캠핑을 즐기다가 오브젝트를 만나면, 야생 호랑이를 만난 것만큼 위험하니 말이다.

    오브젝트 무서운 줄 모르고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검은 사신 덕분이었다.

    검은 사신은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오브젝트였지만, 대부분의 오브젝트를 순식간에 물리칠 정도로 강력했다.

    옴뇸뇸.

    검은 사신은 남자의 품에 안겨 얌전히 과자를 받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은 사신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표정이 굳어졌고, 폴짝 뛰어서 남자의 손등 위로 올라섰다.

    사신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남자는 의아한 눈빛을 지어 보였지만, 곧 사신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깨닫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크르릉.

    고개를 들어 검은 사신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울창한 숲 그림자 속에서 수많은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또 호랑이 떼라니.

    얼마 전 관악산에서도 호랑이 떼를 마주쳤던 그는, 이번에도 호랑이 떼와 조우하고 만 것이다.

    남자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요즘 숲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느끼고 있었다.

    숲이 지나치게 우거져 가고, 좀처럼 볼 수 없던 동물들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사슴 같은 초식 동물부터 시작해서, 호랑이 같은 육식 동물까지.

    심지어 그 동물들은 ‘무리 짓는 호랑이’처럼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 양식을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오색의 깃털을 가지고 빛을 흩뿌리는 정체불명의 대형 조류까지 발견했었다.

    ‘아무래도 숲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캠핑을 미뤄야겠어.’

    캠핑을 가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검은 사신이 조금 시무룩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

    아귀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감미롭게 울려 퍼지는 세희 연구소 안뜰.

    뀨힝힝.

    나는 하얀 아귀를 스프링 감자 모양으로 썬 뒤, 모닥불 위에서 살살 돌리며 그 비명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를 비웃은 하얀 아귀의 말로였다.

    이상하게 요즘 간이 비대해진 하얀 아귀들이 자주 보이던데, 그런 하얀 아귀들은 모두 내가 배를 갈라서 통통해진 간을 확인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하얀 아귀의 배 속에는 간은 없고, 마시멜로뿐이었지만.

    아귀 간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조금 실망했다.

    그렇게 아귀를 괴롭히고 있으니, 안뜰 안의 미니 사신들의 고개가 하나둘 안뜰 입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감각에도 누군가 안뜰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예린이랑 인간 2명, 그리고 오브젝트 하나.

    “저 트리케라톱스 황금상 엄청나게 크네요.”

    “트리케라톱스랑 세희 연구소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군.”

    왕관을 쓴 주황 사신과 그 애착 인간, 그리고 안대를 쓴 보라 사신과 그 애착 인간이었다.

    ‘동생!’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동생들이라 그런지, 황금 사신들은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주황 왕관 사신과 보라 안대 사신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몇몇 황금 사신은 인간 형태의 오브젝트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보니 저 오브젝트는 내가 부활시켜 준 롤케이크 인간이었다.

    롤케이크 인간은 몰려든 황금 사신들을 품에 안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자, 자기 손가락을 떼어서 황금 사신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옴뇸뇸.

    그리고 “맛있지?”라고 되묻는 롤케이크 인간과 고개를 끄덕이는 황금 사신들.

    왠지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장면이었다.

    저 롤케이크 인간도 아귀 사신처럼 손가락을 먹이고 싶어 하는 병에 걸린 건가.

    아귀 사신이 떠오르는 장면이라, 나는 시선을 돌려 예린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린이는 자유 도시 연합에서 봤던 소녀, 청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룡 전문 연구소도 아닌데, 왜 저런 트리케라톱스 황금상을 전시해 둔 거죠?”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보통 저런 터무니없이 비싼 물건은 세희 소장님이 몰래 들여오는 경우가 많아서요.”

    예린이 옆에 서서, 청을 올려다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예린이보단 못하지만, 상당한 장작력이네. 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

    예린이와 청이 같이 서 있자,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장작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왼쪽에는 청을 두고, 오른쪽에는 예린이를 두면 좋을 것 같기도 하네.

    냠냠.

    내가 청을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자, 주황 왕관 사신이 나를 향해 박치기를 해왔다.

    왕관의 날카로운 면으로 내 눈을 푹!

    ‘으악, 패륜 2호기다.’

    온 힘을 다해서 나를 찌르려고 하는 왕관 사신을 가리키며, 미니 사신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미니 사신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처럼 주황 왕관 사신을 응원하기도 했다.

    ‘나쁜 엄마!’

    미니 사신들의 반항기가 시작되어 버렸다.

    ***

    울창한 밀림 속 공터에 헬리콥터 한 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제임스는 그 헬기에서 나와서 제임스 연구소 소속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한 천막 안으로 이동했다.

    그 안에는 높이가 3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새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은은하게 빛을 흩뿌리는 정체불명의 조류가 고고히 앉아있었다.

    “확실히 봉황이라고 부를 만하군.”

    사진으로만 봐도 전설 속에 나올법한 새였지만, 제임스는 굳이 직접 나와서 확인하고자 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녹색 달’을 제거할 명분이 되겠지.’

    제임스는 연구원에게 받은 자료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호랑이 떼, 최소 300마리 이상.>

    <히말라야산맥에 숨어든 거대한 드래곤.>

    <동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는 봉황.>

    <이미 멸종한 동물들의 부활.>

    <숲의 이상 번성.>

    모두 녹색 달이 발생한 뒤에 생겨난 이상 현상이었다.

    이제 제임스에게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제임스 우주 정거장으로 회색 사신을 보내는 방법뿐이었다.

    제임스는 노트를 펼치고, 사용할 만한 수단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주 정거장이 오브젝트에게 점령당했다고 방송을 뿌린다.>

    현재 내부 관측이 불가능한 데다가, 생존자도 없을 확률이 높아 회색 사신의 주의를 끌만 한 요소가 없음.

    <제임스 우주 정거장에서 티라노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고 거짓 정보를 뿌린다.>

    회색 사신이 앙심을 품을 가능성이 있음. 너무 위험.

    그 밖에도 많은 방법을 생각했지만, 조금씩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겠군.’

    제임스가 골머리를 앓고 있자, 황금 사신이 뚜방뚜방 다가와서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는 골든-메카-티라노 아머의 설계도였다.

    ***

    우주 공간에 외로이 떠 있는 제임스 우주 정거장.

    어둠과 적막 속에서 홀로 남겨진 여자는 마치 통신 콘솔 마이크가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꼭 쥐고 있었다.

    “누구든지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어둠 속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는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스르륵. 스르륵.

    마치 무언가가 기어 오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의 심장은 두려움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것이 무엇이든 그냥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을 잡아먹는 오브젝트? 아니면 정신 오염에 의한 환각일까?

    어둠 속에서 그녀는 자기 심장 박동 소리와 그 기이한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제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눈을 꼭 감고,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무언가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것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바로 앞에서, 기어다니는 소리가 멈췄다.

    끝없는 적막.

    눈을 뜨면 거대한 괴물이 입을 열고 한입에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밍!”

    그곳에는 눈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 사람 머리통만 한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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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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