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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9

        

         습도가 낮아서 그럴까?

         낮에 좀 후덥지근했던 공기도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이 되면 비교적 쉽게 식어서 더위가 금방금방 가신다.

         

         이제 문제라면… 어두워진 주변 풍경만큼이나 내 정신도 깜깜해졌다는 건데.

         뭐, 어쩔 도리가 있나. 이미 입은 옷을 여기서 싫다고 벗어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치껏 일행들 틈바구니에 슬쩍 숨어 있어야지. 으으….

         

         “…그, 이렇게 좀 시야각을 가리듯이 퍼져 볼래?”

         

         – 허면 움직임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소한의 간격만 남긴 채로 밀착 경호 모드에 돌입하겠습니다. –

         

         진짜 위험한 장소라면 헬레나와 제로가 앞서서 길을 여는 형태로 진형을 짜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보여주기용 의전에 가까웠던 만큼 우리는 활기차게 지팡이를 휘두르시는 알프레드 씨 뒤에 따라붙었다.

         

         노인의 바로 뒤쪽 좌우에는 헬레나와 내가, 바깥쪽으로는 제로들을 둘러친 상태라고 할까.

         더 뒤에서는 캐피탈 직원분들이 금고를 밀면서 따라오고 계시고.

         

         이렇게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에 ‘양손의 꽃’이라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것도 그렇게 틀린 묘사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자신감 넘치는 우리의 언니 정도라면 또 고려해볼 가치가 있겠으나, 졸지에 세트로 묶여서 ‘꽃’ 반열에 포함된 나야 할 말이 많은 상태지만. 이걸 견디는 것도 어디까지나 업무의 일환이라면 참아야겠죠. 예.

         

         또각또각 하는.

         평소와 다르게 얕은 굽이 있는 단화를 신어서 그런지, 대리석이 깔린 경매장 실내로 들어오니 정말 여성분들이 걸을 때나 나던 청아한 소리가 내 발치에서 생성되었기에 기분이 영 묘해졌다.

         

         아무튼 경호 기본 체계와 퀄리티는 제로가 혼자서도 유지해주고 있겠다 그 망할 드레스코드에 대한 얘기를 아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일단 여러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도장 깨기 비스무리한 걸 할 때 봤던 것처럼 입구마다 가드가 서서 복장 검사를 하고 있다던가~ 그런 게 아니었다.

         

         필수 조항이라기 보단 권장 사항, 식당에 간다고 치면 잊지 말고 꼭 챙겨야 하는 지갑이 아니라 테이블 매너.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었던 셈이다.

         진짜 누가 잠옷바람으로 나들이라도 나오는 걸로 어기게 되면 말단 직원들이 달려 나와서 ‘아이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며 발목에 매달리고, 다른 손님들은 뒤에서 비웃는 수준으로 끝날 해프닝이고.

         

         결국 알프레드 씨가 가상의 적을 압박할 겸 연출하고 싶었던 장면은 만들었어도 이거 너무 많은 불특정 다수가 쳐다보고 있던 상황이라 나로선 반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감이 전혀 안 오는데….

         

         “…….”

         

         에라, 모르겠다.

         애당초 난 전파 방해나 가상 네트워크 침투가 일어나면 그걸 차단하고 근원을 파악해서 격멸하는 수비수 역할이었지 다른 부분은 관여할 게 아니었으니까.

         

         수동적으로 시킨 일만 해도 되는 것도 나름 피고용인의 특권이지. 암.

         

         복잡하게시리, 굳이 직접 뭐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없이 물길 따라 흐르듯 얌전히 돌아가는 상황에 순응하도록 하자.

         

         버릇처럼 주변부터 싹 훑어서 파악하던 헬레나도 시선 처리를 전방으로만 한정하고 있지 않나?

         물론 그녀야 기본적으로 신체 스펙이 초인 반열에 올라있다 보니 시각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직관만으로도 충분히 정보를 얻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은.

         

         “그래서, 이대로 그냥 들어가서 시작 시간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시간이 빡빡하다 하셨던 것치고는 오는 길이 안 막혀서 그런지 외려 빨리 온 것 같은데.”

         

         “음? 아니, 아닐세. 먼저 금고에서 물건부터 꺼내서 감정도 다시 받고, 경매 리스트에 올려놓기도 해야지! 이게 아무래도 내가 억지를 부려서 일정을 당긴 입장인지라 경매사 사정을 더 무시하면 곤란해서 서두른 건데…. 마침 저기 오는군!”

         

         양반은 못될 팔자인지, 혹은 때마침 입구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사무실 쪽에서 뛰쳐나오신 직원분이 부리나케 이쪽으로 달려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아,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했다고.

         

         과장된 반응을 노렸다고 하니 굳이 창고에서 금고를 열고 내용물만 쏙 가져온 게 아니라 저렇게 통째로 질질 끌고 온 것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겠지만, 이번 의뢰의 쟁점이 된 만큼 못해도 안에 들어있는 골동품은 진짜 귀중한 물건일 거 아닌가?

         

         따로 경매로 구매자를 찾아야 할 정도로 비싼 상품… 과연 그게 뭘까.

         

         내가 알고 있는 고가품의 지식은 대부분 게임 상에서 쓰던 전투나 이동 관련 물품에 단편적으로 편중된 상태인지라, 안에 들은 게 뭔지 감도 안 온다.

         

         그 외에 비싼 아이템이라고 해봐야 마이 홈에 꾸미는 빌리징 장식품이 아니면 다 루팅한 다음 판매하는 기타 아이템이었으니까… 보석이나 액세서리 종류이려나?

         

         왜 그 있지 않나. 캐럿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역사적으로 어느 위인이 착용했던 공식적인 기록 같은 것도 남아있어서 따로 이름이 붙는 유명한 녀석들.

         

         “미스터 알프레드! 어떻게 중간에 연락이라도 한 번 더 주시지… 오늘 오신다고 예약 변경했던 걸 지금이라도 취소해야 하나 걱정했습니다.”

         

         “아이고, 급하게 일정을 바꾸게 돼서 미안허이. 진작에 결정했어야 할 문제지만 이 늙은이가 신경 쓰이는 게 좀 많아서. 설마 내 고집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니겠지?”

         

         “사실 약…간 아슬아슬합니다. 원래도 출품 목록의 대미를 장식할 상품이라 비공개로 두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일이나 모레로 미뤘어야 했겠네요.”

         

         경매와 직결되는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떠드는 걸로 보건대 단순한 일반 직원은 아니고 진행 측의 치프 스태프나 매니저쯤 되려나?

         

         하여간 본디 친분이 있던 모양인지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눈 둘은 이것저것을 막 협의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들어줘서 고맙다. 주말에 가게로 오면 식사는 물론이고 그 뒤의 여흥도 거하게 챙겨주겠다느니.

         어차피 실내도 넓겠다 자사 소속 감정사들이 대기 중인 방으로 아예 금고를 밀어 넣고 슬쩍 꺼내면 되겠다느니.

         혹시… 자기가 날짜를 옮기자마자 따라서 바꾸거나, 급하게 새로 참가를 원한 손님이 있으면 들어가기 전에 미리 좀 귀띔해달라는 노인의 요청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얘기를 옆에서 듣고만 있으려니 이건 또 꽤나 새로웠다.

         

         주변에 멀쩡히 있어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된다.

         눈이 마주친다 한들 구태여 누구인지 캐물어보거나 인사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괜히 서로 어색하기만 할 뿐.

         

         어쩐지 같이 정장 갖추는데 헬레나가 왜 선글라스도 맞출 수 있냐며 묻나 했네.

         

         내가 사는 것도 아닌데 나도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며 사양하지 말고 하나 그냥 받아 둘 걸. 이런 일하시는 분들이 꼭 눈 챙겨 쓰시는지, 시선 처리를 감춘다는 것 외에도 용도가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하게 편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점은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상태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의뢰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일절 없다는 거? 적어도 일하는 와중인 경호원에게 집적거리며 추파를 던질 얼빠진 놈은 없다는 소리렸다.

         

         이게 연애나 즉석 만남(One night stand) 등에 개방적인 동네라 그런지, 농담이 아니라 일단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치근덕대는 인간들이 넘쳐난다니까? 외출하기가 짜증나요 진짜.

         

         “응…? 왜, 눈 둘 곳이 곤란하면 아샤가 쓰고 있을래?”

         “아니, 아니. 필요 없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뺐어 쓸 만큼 양심 없지는 않거든.”

         

         정말 감도 좋지.

         

         평소에 그 많은 성희롱범들을 바에서 큐볼 두들겨 팬 것처럼 일일이 다 기절시키며 다니는 걸까… 혼자 상상하며 헬레나의 얼굴을 힐끔거렸더니, 귀신 같이 눈치 챈 그녀가 선글라스를 순식간에 벗어서 안경다리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고개를 열심히 도리질 치자 구태여 더 강요하지는 않고 아쉽다는 것처럼 물러나기는 했는데.

         

         솔직히, 날 조금이라도 더 못 챙겨줘서 안달인 게 계속 보여서 미치겠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친근한 건 여전한데 그 과정에 곁들여지는 눈빛이나 접촉의 레벨이 달라졌다고 할까.

         

         동거할 때는 자칫 가족애 이상으로 해석되지 않게 조심해주던 그녀 나름의 리미터가 풀리다 못해 사라진 느낌…? 이것도 괜찮아, 저것도 괜찮아. 하나하나 마냥 허락해주다 보면 내가 잡아 먹힐 것 같다고요.

         

         그때 헤어지고 난 후에 시간이 거의 일 년 가까이 지났는데 그간 어떤 심경 변화를 겪었는지 아직도 감이 안 와서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더 속이는 흉내를 내기 싫어서 아까 낮에 개인사를 다 털어놓은 이래로 뭔가…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진 게 체감된다니까? 흡사 꽃봉오리가 만개한 것처럼.

         

         ………이거 혹시 내부의 플러팅에도 장기적으로 주의해야 한다는 적신호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럼 어디, 물건부터 같이 확인하도록 하는 걸로 하고. 어여 가세나! 잠금은 감정사분들 앞에서 내 직접 해제하지.”

         

         얘기가 무사히 잘 풀렸는지, 방향을 선도하는 매니저를 따라 캐피탈 직원들이 낑낑대며 금고를 옮겨 나가셨다.

         

         가변형 궤도는 멀쩡히 달려있는데 정작 저걸 원격으로 조종해서 이동시킬 동력원이 없는 이유는 역시 보안상의 문제 때문이려나? 어유,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그려.

         

         그렇게 피라미드 건축 현장 마냥 움직이는 금속덩어리를 따라가며, 쓸데없이 무슨 이벤트인 줄 알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미리미리 제로를 시켜서 분위기 잡는 걸로 얼마나 쫓아 보냈을까.

         

         앞서가는 사람들과 우리의 거리가 좀 벌어진 사이를 틈타 헬레나가 노인에게 물었다.

         

         “잠시, 미스터 알프레드. 오기 전에 말씀하셨던 가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만. 이 크라이테리아 경매사 쪽 사람들을 얼마나 믿으시는지…?”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하는 말이라면.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네.”

         

         “그럼 감정하는 동안 안에는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아샤? 혹시 모르니 제로 한 대만 빌릴게.”

         

         “응, 오케이. 그럼 실시간 통신도 항상 열어놓을 테니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던 태도는 집어치우고 우리에게만 찝찝한 기색을 드러낸 알프레드 씨.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노인을 모시고 감정실로 들어가기 직전, 헬레나가 손가락으로 천장 구석을 슬쩍 가리켰으니.

         

         거기에는 이제 또 감시와 기록에 미친 사회답게 쌩쌩 돌아가는 폐쇄 회로 카메라가.

         

         아하, 실제로 싸움이 일어날지 아니면 그의 과대망상일지는 몰라도. 알프레드 씨의 안전을 지키는 게 우리 본분인만큼 거동이 자유로운 틈에 회선을 얼른 따달라는 뜻이구나.

         

         어째 중요한 부분을 딱 골라 짚는 게 나보다 더 능숙하다. 과연 이게 실전 경력의 차이인가….

         

         어디 감탄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우선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쌓인 선물 상자를 몰래 먼저 들여다본다는 감각으로 살짝 경매 참석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러 가보실까요? 흐흠.

         

         ……근데 말이다. 잘 생각해보니 하나 곤란한 사실을 깨달았는데.

         

         “…야, 제로. 일개 사설 경호원이 합법적으로 남의 회사 건물 보안실 접근 권한을 얻을 그럴싸한 핑계가 대체 뭐가 있을까?”

         

         – 네오 헤이븐 법령상, 자연 자해 발생시나 테러로 인한 무분별한 피해가 일어나는 도중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 외의 경우는 굉장히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

         

         아이씨. 그럼 이거 또 어디 몰래 숨어들어야 한다는 소리랑 똑같잖아!

         

         하… 이놈의 직업은 하여간 깨끗이 살고 싶어도 불법이 일상이야 아주 그냥.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들키지 않으면 무죄(절대 아님).

    이게 또 하루 지각해서 꼬이니까 연달아 늦기 시작하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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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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