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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저 멀리서 보이는 깃발에는 ‘로맨스 판타지 소미레 편’의 주 무대가 되는 제국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때 질리도록 봤던 사자의 문양.

        

       그 깃발을 달고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단. 그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갑옷과 투구가 사납게 울었다. 모래 먼지가 휘날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있던 줄이 맨 마지막 줄이었나 보다.

        

       “저, 전하! 이제 어찌하실 예정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다 죽이든가, 튀든가 해야지.

        

       “전하! 전하만이라도 도망을…!”

        

       전쟁 포로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확실히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일단 도망치는 건 불가능이다. 빙의 직후인지라 오러를 사용하는 법도 모르고, 상대는 말을 탄 기사단. 따돌리긴 쉽지 않을 거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싸우는 수밖에. 나는 칼자루를 굳게 잡았다.

       

       “씨발, 어디 한번 해보자고.”

        

       결의와 함께 내뱉은 욕설에 주변 포로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전하…! 어찌 그런 상스러운 말을!”

        

       지금 그게 중요하냐? 당장 기사단이 몰려오고 있는 와중인데? 어떻게든 싸울 생각을 해야지.

       

       나는 검을 굳게 잡으며 위로 올렸다.

        

       “전하…?”

       

       여기서 거세게 소리친다.

       

       “다들! 병장기를 들어라! 우리는 결코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내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포효했다.

       

       ―전하를 위하여! 바렌베르크를 위하여!

       

       마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모두가 땅에 떨어진 병장기를 들었다. 무기를 들지 못한 사람은 조약돌이라도 들었다.

       

       “항복하라!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기사단이 도착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돌격하라!”

       

       두두두두! 발걸음이 세차게 울리며 멈추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사막의 모래가 비산하며 흩날렸다.

       

       “젠장, 진 바렌베르크부터 잡아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명심하라!”

       

       기사단이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포위한다. 나는 다른 전쟁 포로들에게 소리쳤다.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시해라!”

       

       그리 말하고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아직 메시지로 떠오른 효과는 유효하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감각은 최대로 활성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장딴지와 허벅지가 팽창하며 근육이 올라온다. 뿌득! 우락부락한 팔뚝에는 핏줄이 솟아오르며 칼자루를 부수고도 남을 악력이 생겼다.

       

       “으아아!”

       

       기합을 내지르며 달렸다. 병사와 싸웠을 때처럼만 하면 크게 다를 거 없을 터.

       

       “기병들 먼저 진격하라!”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세밀하게 들려온다. 솔직히 기병과 맞붙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지만, 지금은 방도가 없다.

       

       어떻게든 싸우는 수밖에.

       

       기병들과 거의 근접했다. 중세의 탱크라 불리는 기병의 핵심은 말이다. 내 검은 어디로 향할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흐읍!”

       

       투욱! 무뎌진 검날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말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한국사에 나오는 장군처럼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 푸욱! 말에서 떨어진 기병의 가슴에 검끝을 찔러넣었다.

       

       “컥, 커헉!”

       

       입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다. 쉴 틈은 없다. 곧장 기병이 떨어트린 창을 주웠다.

       

       “…!”

       

       그대로 등을 돌려 뒤에 있던 기사의 복부에 창을 꽂아 넣었다. 푸욱! 갑옷이 뚫려 창끝이 바깥으로 나왔다.

       

       치이익. 땅을 긁으며 자세를 바꾼다. 바닥에 떨어진 기병의 창을 줍고, 한 손에는 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젠장, 진 바렌베르크부터 잡아라!”

       “전쟁 포로들이 너무 격하게 저항합니다!”

       “무시하고 진 바렌베르크부터 잡아!”

       

       장딴지의 근육이 끝까지 올라왔다. 쿵!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수백에 가까운 기사단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내가 중앙에서 주의를 끌면 전쟁 포로들이 더 잘 싸울 터.

       

       “흐읍!”

       

       창으로 거리를 유지하며 찌르고, 빼고를 반복한다. 가까이 다가온 기사는 검으로 베어내고, 발길질까지 하며 개처럼 싸워댔다.

       

       “진 바렌베르크!!”

       

       포효하는 기사들.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대로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원래의 힘을 절반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당장이라도 통곡하고 싶지만, 이런 감정은 사치다. 목숨이 아슬아슬한 순간이니까.

       

       “아아악!”

       

       악바리로 견뎠다. 창을 휘둘렀다. 검으로 베어내고, 무기를 주우며 싸움을 반복했다.

       

       그렇게 전투가 얼마나 진행됐을까.

       

       “허억, 허억. 헉!”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심장이 터질 듯이 아프고, 호흡이 거칠다.

       

       기사단의 숫자는, 아까와 다른 바 없었다.

       

       ‘이렇게나 싸웠는데 그대로라니.’

       

       기사는 현대의 전투기 조종사와 같다. 이렇게 숫자가 많은 걸 보니 제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잡히지 않았다.

       

       “진 바렌베르크. 투항하라.”

       

       이미 다른 전쟁 포로들은 죽어있거나, 무릎을 꿇은 채 속박당해 있었다. 다들 여기까지인가.

       

       “후우.”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다. 팅. 나는 손에 들린 창과 무뎌지다 못해 부러진 검을 떨어트렸다.

       

       “잘 생각했군.”

       

       기사들이 다가와 나를 다시 포박했다. 아까와 같은 강철 수갑 다섯 개가 내 팔을 속박했다.

       

       “쓸데없는 소란이 있었군. 다들 제국으로 복귀한다!”

       

       나는 탈출에 실패했다.

       

       “…….”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플레이하던 여주인공, 소미레의 시점으로 봤을 때는 이런 사실은 알 수 없었는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화창한 날씨. 지금 나의 복잡한 마음도 모르는 듯 마른하늘은 푸르렀다.

        

        

       * * *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위의 사막을 지나고, 푸른 이파리들이 가득한 숲속을 지났다. 그렇게 우리는 제국의 국경에 도달했다.

        

       국경에는 제국의 임시 거점인 막사가 있었다. 우리는 그 막사로 인도되었고, 망국의 포로인 우리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진 바렌베르크. 고개를 들어라.”

        

       조심히 고개를 올렸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레제프 페델리안.’

        

       제국의 황태자. 내가 망나니라고 부르는 미친 새끼였다.

        

       “지금 그 하찮은 모습을 보니 꼴이 좋군.”

        

       황태자와 진 바렌베르크 사이에서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던 건가? 내가 알기론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교류의 장에서 잘난 척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는군. 그때 참 재수 없었는데 말이야. 전쟁 포로가 되어 잡혀들어온 기분은 어떤가?”

        

       뭐야, 그냥 잘난 척 좀 했다고 그걸 마음에 담아둔 거야? 하여간,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에요. 망나니 새끼.

        

       쯧,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당시의 모습이 생각나서 열이 뻗쳤다.

        

       “이 자식이…!”

        

       짜악! 황태자가 내 뺨을 휘갈겼다. 오늘 동안만 뺨을 몇 번이나 맞는 건지 모르겠다.

        

       “시건방진 건 여전하군. 여 봐라! 이 자를 끌어내라!”

        

       황태자가 손을 털며 장갑을 꼈다. 어우, 저 표독스러운 얼굴 봐. 라면 사리 망나니 새끼.

        

       “이 자를 어찌할까요? 그래도 망국의 왕족입니다만.”

       “망국의 왕족? 웃기는군. 멸망해버린 왕국에도 왕족이 있었나?”

       “죄송합니다…….”

       “그 마법사에게 말해 노예의 각인을 찍어라. 그리고 경매장에 올려. 최대한 질이 나쁜 곳으로.”

       “명, 받들겠습니다. 따라와!”

        

       황태자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나를 묶고 있는 포승줄을 당겼다. 나는 자연스레 그를 따라 걸었다.

        

       기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푸른색 막사. 대부분 초록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임시 거점에서는 특별한 막사였다.

        

       “들어가!”

        

       기사가 내 등을 발로 찼다. 나는 바닥을 나뒹굴며 푸른색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진 바렌베르크를 잡아왔군?”

        

       마귀할멈과 흡사한 외모를 가진 노인. 웃음이 어찌나 사악한지 목덜미가 서렸다.

        

       “태자 전하의 명이 내려왔다. 이자에게 노예 각인을 찍어라.”

       “한 나라의 왕자였던 자에게 노예 각인을 찍으라고? 태자 전하도 너무한 처사를 하시는군. 킬킬킬.”

       “태자 전하의 선택이시다. 말조심하도록.”

       “고럼고럼. 잘 알고 있지. 킬킬킬.”

        

       마귀할멈이 내게 다가온다. 손에서 타오른 초록빛의 불꽃이 여러 획으로 나누어져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각인 중에서도 제일 강한 각인이라 조금 아플 거여. 킬킬킬.”

        

       저 기분 나쁜 웃음소리 좀 안 내면 안 되나.

        

       마법진이 다가와 내 등에 찍혔다. 치이익. 마치 뜨겁게 달군 철판을 내게 찍는 기분이었다.

        

       “끄아악…!”

        

       단말마에 가까운 얕은 비명. 눈이 동그래지고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고통이었다. 동기화가 진행될 때 느꼈던 두통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마귀할멈은 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킬킬킬, 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노예 각인은 끝났수. 이제 알아서 처리하면 될 거야. 킬킬킬.”

        

       고통에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는 나를 기사가 들쳐멨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지.”

        

       그렇게 푸른 막사를 나오자 기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기분 나쁜 노인네. 초월 마법사면 다 인가.”

       

       초월 마법사라고? 게임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그 최강의 마법사가 내게 각인을 새긴 건가…….

       

       “이제… 나는 어찌… 되는 거지…?”

       “어찌 되긴 뭘 어째. 노예 매물로 올라갈 거다.”

        

       역시 예정대로 되는 건가.

        

       ‘개 같은 거.’

        

       이로써 내 운명은 정해졌다. 프란체 데카르트의 장기말.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노예인 진이 최종 보스가 되었던 거지?’

        

       최종 진 엔딩 루트에서 프란체 데카르트는 진이 최종 보스로 등장하기 전에 죽었다. 그럼 노예 각인도 풀렸을 터. 어째서 그가 마지막에 최종 보스로 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에서도 나오질 않았으니.’

        

       하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되겠지. 내가 진 바렌베르크가 되었으니까…….

        

       그때. 기사가 내 목줄을 끌어당겼다.

        

       “제대로 걸어!”

        

       나는 기사들에 의해 철창들로 이루어진 마차에 들어가게 되었다. 등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집중된다. 마치 동물원의 사자가 된 기분.

        

       “이송해!”

        

       기사의 말이 울려 퍼지고, 덜컹. 마차가 움직인다. 허리가 들썩였다. 노예 각인이 붙은 등에서는 아직도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진다.

        

       이런 답이 없는 상황을 마주하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 * *

        

        

       짜악! 강렬한 충격에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나, 이 새끼야!”

        

       노예 취급 한 번 더럽다. 뭐,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긴 한데.

        

       철컥. 철창의 문이 열렸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강철로 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따라와라.”

        

       나는 기사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게임에서도 본 적이 있는 제국의 암흑가. 이곳은 온갖 희귀한 물품들이 거래되고 엘프와 같은 이종족이 노예 매물로 나오는 곳이다.

        

       평소라면 볼 수 없는 매물이 나오기에 귀족들이 즐겨 이용했다. 나 또한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희귀한 아이템을 얻기 위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이고, 오셨군요. 미리 전서구를 통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노예 하나를 매물로 올리고 싶으시다고?”

       “그렇다. 익명의 이름으로 매물을 올려라. 태자 전하의 명령이시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태자 전하의 이름을 먹칠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암흑가의 중개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기사를 구슬렸다.

        

       “구경이라도 해보시겠습니까요? 오늘은 좋은 매물들이 올라갈 예정입니다만.”

       “되었다. 예정된 금액이나 내놓아라.”

       “그거라면 여기 있사옵니다.”

        

       테이블에 올려진 무수히 많은 황금. 불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금액은 확인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요!”

        

       기사는 들고 온 가방에 황금 더미를 쓸어 담고 유유히 떠나갔다.

        

       중개자가 말했다.

        

       “자, 따라와라.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노예 인장을 받았으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붙였을 뿐.

        

       “쯧, 눈빛 한 번 매섭군. 싸가지 없는 새끼.”

        

       중개자는 피식 웃고는 인장을 짓눌렀다. 그러자 등에서 불이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끄아악…!”

        

       정신이 혼미하다. 눈이 반쯤 감긴 나는 중개인에 이끌려 암흑가의 경매장으로 들어섰고, 철창에 갇히게 되었다.

        

       “곧 경매장에 올라갈 거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구매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프란체 데카르트.’

        

       나는 그녀의 것이 될 거다.

        

       원작의 주인공, 소미레의 대적자인 그녀의 노예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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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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