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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매국노가 되었다가 처형당한 성년 그레이의 인생이 전부 꿈인가?

     아니면 10살로 돌아온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둘 다 현실이야.’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인간은 이기적인 생물이고, 나는 내가 가장 바라는 대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과거로 돌아온 거다.’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미래를 겪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에 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아쉬운 소리를 하자면.

     ‘하필 과거에 떨어져도 아버지가 잔을 든 날로 돌아오다니.’

     좀 더 과거로 돌아갔다면, 아버지가 변절을 선택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브롤터 가문의 변절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아니지.’

     한 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왕도에서 일어난 파티에 어머니 혼자 가게 되어서 난리가 났으니, 어머니를 막았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번뿐이었겠지.

     사건은 그날 한순간에 일어난 게 아니라, 쌓이고 쌓였던 앙금이 기어이 터져버린 거니까.

     “너도 알다시피, 왕은 과거에 네 어미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불러 독대하며 말하는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남자는 내가 샬롯의 마음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더군. 썩을 자식.”

     “일단은 왕입니다, 아버지.”

     “나를 이해하는 아들의 앞에서 편하게 말도 못 하나?”

     “아뇨. 계속하십시오.”

     나도 지금의 왕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너를 낳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세기의 로맨스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했지. 소설로 썼다면 분명 네 어머니가 여주인공이었을 것이야.”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와 소드마스터 변경백 사이에 있는 당대 최고 미녀 남작 영애로군요.”

     내 부모의 일만 아니었다면, 일단 나도 흥미가 동했을 소재다.

     “로맨스 소설이라면, 일단 기본은 먹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변경백이 남작 영애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나겠지. 아이들을 키우며 사랑을 나누는 외전도 좀 나오고.”

     아버지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해피엔딩을 국왕, 그놈이 기어이 전쟁물로 2부를 시작하자고 하는군.”

     “…….”

     “추하디추한 자로다. 너도 알다시피, 그 남자에게는….”

     “저와 같은 나이의 딸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주가, 있다.

     “그래. 놈은 이미 딸이 태어났는데도 기어이 샬롯을 차지하려고 했지.”

     “현 왕비는 분명 대공가의 적녀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 편하구나. 하룻밤 사이에 10살은 훌쩍 더 먹은 것 같아.”

     아버지가 나를 차갑게 바라본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께서 바란 아들의 모습이 이런 거 아니었습니까?”

     회귀 전,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되기를 원했다.

     “잔을 들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아들로 대하셨다면, 지금은 대사를 앞두고 이야기를 나눌 동지…혹은, 수하나-”

     “후계자.”

     아버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를 어찌 부하 따위로 둘 수 있을까. 너는 내 아들이고, 내 후계자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네 어미를 욕보인 왕에게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니.”

     “…예.”

     후계자라는 말이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진다.

     “누아르나 레타르는 제법 영민하지만 이런 대화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지. 역시 너로구나.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내 자식다워.”

     아버지가 나를 그만큼 가까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만.

     “그러니 네가 맡은 바 책무가 크다. 네게 따로 일을 당장은 시키지는 않을 것이나, 준비가 다 되고 때가 되면 무엇이든 해야 할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버지는 요구했다.

     “그래. 무엇이든.”

     친구를 배신하는 것도.

     어둠의 길로 빠뜨려 몰락시키는 것도.

     여인의 순정을 희롱하고 침대에서 상대 귀족의 기밀정보를 듣는 것도.

     가문의 실체가 들킬 위험 속에서 세작을 직접 죽이는 것도.

     그리고 왕국을 향해 제국의 편이라는 상징으로서, 왕도 점령의 선봉에 세우는 것도.

     

     모두, 내가 해왔던 일이다.

     모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 제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

     “예.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게 하도록 손가락만 빨고 있기 이전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호오, 무엇이냐?”

     “그야.”

     이 자리를 피하는 것.

     “쓰러지신 어머니를 위로해드리는 것이지요. 빨리 일어나실 수 있게.”

     “…….”

     

     아버지의 표정에 약간, ‘고작, 겨우’라는 느낌이 스쳤다.

     ‘죄송하지만, 저도 일단은 변경백을 좀 해봐서.’

     아버지는 뛰어난 검사지만, 정치는 그의 검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어머니가 빨리 일어나야, 아버지가 국왕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 아닙니까?”

     “뭐라?”

     “제가 가서 힘을 북돋고, 일으켜 세워 드려야죠. 아버지가 일으킨 혈사(血事) 때문에 누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겁니다.”

     “……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아버지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런, 젠장.”

     그래도 다행히 앞뒤 잘라먹으며 유추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답게, 내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네 말은 설마, 그 발정이 난 짐승 새끼가 지브롤터로 올 수 있다는 것이냐?”

     “예. 뭐, 풍문이 돌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두 손을 들며 한 걸음, 아버지의 ‘간격’에서 물러났다.

     “어머니의 일을 전해 들은 아버지가 홧김에 가솔들을 죽였고, 어머니가 그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면.”

     “……!!”

     “욕심에 미쳐 기어이 변경백을 상대로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욕심의 대상이 죽을 위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레이. 첫 번째 명령이다.”

     아버지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밖을 가리켰다.

     “네 어머니를 깨워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왕이 여기에 오기 전에.”

     “예.”

     * * * 

     잠시 뒤.

     “어머니.”

     얼굴이 창백해진 채,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이 여인이 바로 내 어머니이자 삼각관계의 피앙세-샤를로트 지브롤터다.

     전 이름은 샤를로트 군터.

     애칭으로는 두 사람에게 모두 샬롯이라고 불리는 여인으로, 미모만으로 사교계를 휘어잡은 전설적인 존재.

     그 우월한 외모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나를 비롯한 우리 세 남매 모두 외모는 확실히 어디를 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

     그런 여인이 지금 의식을 잃고 쓰려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사는?”

     “전혀….”

     잔뜩 겁에 질린 하녀장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내게 답한다.

     하녀장은 조찬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이유는 몰라도 그 자리에서 메이드 여럿이 심장에 나이프가 박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시체를 치운 건 그들과 함께 일하던, 그 자리에 마침 없던 가솔들이었으니.

     “도, 도련님?”

     그리고 이 여자는 지금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 혹시 백작님께서는 뭔가 말씀을….”

     갑자기 미쳐버린 백작의 서재에서 긴 시간 독대를 하고, 하루아침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나를.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어머니가 깨어나면 제가 직접 그 소식을 전하라 하셨다.”

     “아, 그건….”

     “그리고 잠깐,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

     “아버지의 명이다. 음, 나도 이런 사소한 일로 아버지께 이르러 가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문을 눈으로 가리켰다.

     “하녀장? 아버지를 오랫동안 모셨다면, 알아서 눈치를 채야겠지?”

     “…아, 알겠습니다! 호,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하녀장은 방 안에 있던 메이드들에게 시선을 보낸 뒤, 메이드들이 전부 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나가며 문을 굳게 닫았다.

     “후.”

     아버지가 한 번 첫 단추를 살육으로 채워서 그런지, 하인들은 약간의 협박만 해도 곧잘 말을 잘 듣는다.

     공포정치는 효과적이다.

     대신 나중에 역사가 판단할 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왕국의 어느 한 가문을 몰락시킬 때, 그렇게 역사서를 쓰도록 만들었으니까.

     ‘군터 가문이었지.’

     어머니의 가문.

     

     자기 딸이 왕비가 아니라 변경백의 부인이 된 것에 앙심을 품었던 나의 외조부.

     “어머니가 왕도의 축하연에 초대받은 건, 외조부이신 군터 남작의 초청장을 받아서지요.”

     나는 잠들어있는 어머니의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어머니.”

     가볍게, 한 번.

     “제가 두려우십니까?”

     미동도 없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두려우셔야 할 겁니다.”

     어머니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건.

     “저는 어머니가 지난밤, 왕궁의 세 번째 침실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거짓이니까.

     

     벌떡!

     어머니가 상반신을 일으킨다.

     “너, 너…!”

     그 어떤 순간보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귀신을 보는 것처럼 나를 노려보며 몸을 떤다.

     “물 한 잔 드릴까요?”

     “…….”

     “그렇게 보셔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아버지 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 편이기도 하니.”

     “너….”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제 친모시니까요. 이 얼굴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머리와 눈 색은 완전히 다르지만.”

     “…….”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건넨 잔을 받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니.”

     “믿어 주시는 겁니까?”

     “내가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자식이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도 네가 내 아들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지금 저는 지브롤터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온 것이라.”

     “…무슨 하룻밤 사이에 10살은 더 먹었니? 아카데미에서 정치학이라도 배우고 온 것이니?”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카데미 부분은 없었지만.”

     “하….”

     어머니는 물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빈 잔을 내게 넘겼다.

     “그래. 어디까지 알고 있니. 네 아버지처럼 선문답이라도 할까? 아니면, 혹시 너, 지금 의심을….”

     “저는.”

     일부러 어머니의 말을 끊으며, 목소리에 힘을 높였다.

     “저 그레이 지브롤터는 국왕과 샤를로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크림슨 경과 샤를로트 영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믿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고요. 일단은.”

     “일단, 은.”

     말에 뼈가 있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지만, 그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는 심신이 불안정해 보였다.

     “어머니. 걱정되시겠죠. 하지만 무엇이 걱정입니까?”

     당연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비행을 알까 봐?”

     그 어떤 부모도.

     “아니면 다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을까 봐? 왕에게 희롱을 당한 게 아니라, 젊은 시절의 정에 이끌려 순간의 부정을 저질렀다는 걸?”

     불륜을 저지른 걸 가족-특히 자식에게 들키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

     “시, 실수였어! 수, 술 때문에-”

     “아니죠. 어머니께서는 두려우신 겁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가.”

     나는 어머니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두 분 모두의 편입니다.”

     “하아….”

     어머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내가 빈 잔에 물을 채워 슬쩍 목을 축이니, 손가락 사이로 힐끗 나를 바라본다.

     안도의 눈빛이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어머니가 안도했다는 걸 이미 직감했다.

     “충격이 크시겠지만, 하인들을 갑자기 죽인 것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 걸로 하시죠.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지브롤터 성에 피바람이 불 거니까요.”

     “또…?”

     “그냥 피바람도 아니죠. 이곳을 찾아온 국왕을 상대로 휘두르는….”

     “이, 일어나마. 그,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돼…!”

     “예. 일어나셔야죠.”

     어머니는 황급히 침상에서 일어나, 화장대 옆에 놓인 물그릇 앞에 섰다.

     “그…. 그레이? 아들?”

     “예.”

     “…그,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진짜다.

     왜냐하면.

     “그, 내 말은….”

     “제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서 미안하다. 그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

     이미 이 여자는 그 말로, 나를 상처입혔으니까.

     “저는 지브롤터 변경백, 크림슨 지브롤터 경의 아들인 것도 매우 좋습니다.”

     “…….”

     “다만 아버지가 더 사람을 죽이기 전에 일을 수습해야 하니, 지금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바로 방을 나섰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지 않고 나갔지만, 문밖에는 누구도 없었다.

     “다행이야.”

     좀 더 앞으로 걸어나가 복도 통로의 귀퉁이를 돌고 나자마자.

     “누가 문에 귀 대고 있었으면, 분명 죽었을 거니까.”

     “히, 히익…!!”

     메이드들이 사색이 된 채 서로 손을 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농담이야. 어머니 깨어나셨어. 가서 보살펴드려.”

     “아, 으.”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네, 네!!”

     하녀장을 비롯한 메이드들이 바로 어머니의 침실로 들어갔다.

     “휴. 이걸로 일단은 다행인 건가.”

     이제 사랑하는 여인이 의식불명에서 깨어났으니.

     ‘시작부터, 정해진 미래를 바꾼 건가?’

     미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짓을 해놓고도 왕도에서 여기까지 날아오는 그런 일은 없겠지.

     잠시 뒤.

     “왔느냐? 그래. 잘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했다.

     “뭔가 바라는…. 무슨 일이지? 그렇게 허겁지겁.”

     “왕가에서 마차가 오고 있습니다, 백작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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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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