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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루시에나 에스텔.

         

        애러건트 사가의 주인공.

         

        제국의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서 그런지 격식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호방한 성격과 타고난 재능으로 상당한 검술을 지닌 일개 병사였다.

         

        그런 그녀가 첫 마족 침공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보란듯이 성검 흐노니의 선택을 받아 용사가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주인공인 루시는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매력적인 붉은 포니테일의 톰보이 같은 표정을 짓고, 평소 흉갑에 가려져 있지만 드러나면 대단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따라 크게 벌어지는 골반을 가진 외형도 있었지만, 뭣보다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텍스트들이 인기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야? 나만 가서 몬스터 잡아야하는 퀘스트만 몇 번째야? 네 병사들은 뭐하고?”

         

        “건너편 상점에서 물품을 사다 달라고? 나 용산데? 마족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물품 사달라고? 너 돈 많아? 보상 많이 줄 거야?”

         

        “아니 너 혼자 오해해서 흑화해 놓고는 왜 그걸 마을 사람들 탓을 하냐? 안되겠다. 네 소꿉친구가 지금도 너 기다리고 있다는데 둘이 결혼하면 그 여자 인생 망해. 내가 잘 얘기해줄 테니까 넌 여기서 죽어라.”

         

        “동반 퀘스트라고 같이 따라와 놓고서 칼질 한 번 안하고, 어그로는 다 끌어서 처맞고 적들 끌고 올거면 집에 가. 뭐? 집안 가보니까 직접 되찾아야 한다고? 그럼 내가 그 가보 뺏을테니까 나한테서 직접 되찾아볼래?”

         

         

        그 어떤 게임에서도 품을 수 밖에 없는 의문.

         

        퀘스트 주는 NPC 자식들은 대체 할 줄 아는 게 뭔가.

         

        왜 이딴 퀘스트를 주는 것인가.

         

        하지만 스토리 깨려면 귀찮음과 눈물을 머금고 깨야만 하는 것이 장르 불문 모든 게임 플레이어들의 숙명.

         

        루시는 대사로나마 이런 플레이어들의 속마음을 잘 긁어주는 예쁜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도 DLC에서 루시가 배반당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올 것이 왔다는 입장이었다.

         

        라인폴드의 말처럼 툭하면 제국 고위층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황제나 주요 대신들을 교체하겠다 제거하겠다 라는 반역이라 볼 수밖에 없는 언행을 수도 없이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시가 게임 내내 강경한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왈가닥이기만 할 것 같지만 호감을 쌓아 연애에 들어가면 전형적인 츤데레가 나오면서 그 갭모에도 상당했다.

         

        기본적으로 동료들에게는 살가우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고 챙겨주는 모습도 있었으니 직설적인 언변과 함께 시원시원한 행보와 별개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뭣보다 투덜거리면서도 퀘스트는 착실하게 했었다.

         

        동료들도 각별히 보살폈다.

         

        자신만큼 입이 거친 성녀 아르실이 하층민 골목 출신이라는 것에 자신 역시 어렵게 자라왔음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이해했다.

         

        하이엘프로 일족의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지고 있는 나이드리안과는 초반에 마찰이 있었지만 사실은 루시도 본래의 자신과 용사로서 기대 받는 모습이 달라 힘들다고 솔직하게 상담을 요청하며 둘만의 공감대를 가졌다.

         

        감정이 거의 없는 마법사 티그리아에게는 그녀가 눈여겨 본 물품이나 맛있다고 한 소소한 주전부리를 기억했다가 챙겨주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라인폴드.

         

        루시의 큰 단점인 높은 미의 기준, 속칭 얼빠 기질을 뚫고 들어온 금발벽안의 방패기사는 처음 볼 때부터 두근거림을 느끼고 먼저 데레데레한 모습을 보여준 첫사랑이었다.

         

        좋아하는 티를 열심히 보이며 용사 파티가 결성되면서 약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루시를 살뜰히 지켜줬다.

         

        손도 함부로 잡지 않고, 그녀가 먼저 진도를 나가자고 돌려 말해도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그때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마음껏 하자고 도리어 안심시켜줬다.

         

        제일 큰 스킨십이라고 해봐야 황제와 황태녀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리나시엔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 질투하는 루시의 이마에 해준 짧은 입맞춤이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루시는 붉어진 얼굴로 밤잠을 설쳤지만 어찌됐든 라인폴드는 그녀의 사명을 일깨워주고 전장에서나 일상에서나 든든하게 지켜주는 약혼자였다.

         

        짐꾼과는 별 서사가 없다.

         

        게임에서도 크게 부딪치는 게 없었고 심지어 있다는 것도 까먹는 개그씬이 있을 정도.

         

        하물며 전생한 짐꾼이 무시 받는 현실이 일어난 이 세계 속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누구보다도 죽고 못살던 라인폴드를 필두로 살갑게 지내던 동료 전원이 그녀를 배반했다.

         

        각자 그녀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버린 그들은 추악한 표정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기 바빴고 그 틈을 타 평소 무시하고 구박하던 짐꾼이 루시를 구해 도망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루시의 눈에는 모든 게 느리게 보였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부터 차가운 물속에 담궈지는 모든 순간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멍한 그녀의 눈은 대체 무엇을 담아야할 지 정하지 못한 채 허공을 헤맸다.

         

        풍덩!

         

        물속은 어두웠다.

         

        완연한 암흑이라기보다는 탁한 더러움이 있었다.

         

        그 더러움에 대고 루시는 지난날을 투영했다.

         

        웃고 떠들고 다투던 동료들과의 나날들.

         

        마음 깊이 사모하던 그와의 나날들.

         

        그러나 과거를 더듬어 거슬러 오면 싸늘한 태도로 자신의 사지를 잘라내는 용사 파티에 이르렀다.

         

        끔찍한 악몽이다.

         

        고통이 진짜라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악몽이다.

         

        눈을 감아보자.

         

        꿈에서 깨려면 꿈속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야겠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동료들에게 물어보자.

         

        혹시라도 자신에게 섭섭한 게 있었는지.

         

        마왕도 토벌한 마당에 시간은 차고 넘친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동료들이다.

         

        그들이 싫었다고 하면 앞으로 말도 한 번 더 생각해서 하고 다혈질도 고칠 용의가 있었다.

         

        아주 잠시만 눈을 감고 뜨면 모든 게 돌아와 있을 거야.

         

        과연,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눈을 감자 자신의 몸이 물 위로 부상하는 것이 느껴졌다.

         

        루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의식을 놓았다.

         

         

         

         

         

         

        온기가 느껴진다.

         

        타닥타닥 불타는 장작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푹신한 침구류에 폭 파묻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럼 그렇지.

         

        지독한 악몽이었던 것이다.

         

        좀 더 자고 싶었지만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와 방해했다.

         

        식사시간인가 싶어 루시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으윽?!”

         

         

        이상하다.

         

        팔이 짧다.

         

        다리도 짧다.

         

        바닥에 닿은 부위가 타들어가는 듯이 아프다.

         

         

        “아아아악!!!”

         

        “용사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팔다리 끝단에서 몸 전체로 불타는 고통이 번져갔다.

         

        반도 안되는 사지로 허우적거리며 난리를 치자 죽을 끓이고 있던 린이 크게 놀라 황급히 루시의 상태를 살피러 다가왔다.

         

         

        “아파! 아파아!!!”

         

        “용사님! 숨을 쉬세요!”

         

        “커흑! 라인폴드으-!!!”

         

         

        당황하기는 린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고 밤이 한창이었다.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는 무리들이 숲을 헤집고 다닐 시간.

         

        이런 상황에서 장작불에 루시의 찢어지는 비명까지 더해지니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아파아!!!!!”

         

        “용사님!!”

         

         

        허우적거리는 팔다리는 이미 티그리아가 불로 지져 말끔히 봉합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환지통에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한다.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진정될 때까지, 그녀가 원하는만큼 외치고 지칠 때까지 두고 싶었지만 그들은 도망자 신세였다.

         

        어쩔 수 없이 린은 그녀의 몸뚱아리를 들어 품에 안았다.

         

         

        “싫어!”

         

        “쉬이이-.”

         

        “누구야 너!”

         

        “짐꾼입니다.”

         

        “라인폴드는? 내 약혼자는!”

         

        “기억 안나십니까? 방패기사를 비롯한 용사 파티가 당신을 배신했어요.”

         

        “뭐…?”

         

        “황권에 위협이 된다고 당신의 사지를 잘랐죠.”

         

         

        몸부림이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시는 짐꾼을 바라봤다.

         

         

        “정신이 드십니까?”

         

         

        꿈이 아니었다.

         

         

        “내 팔….”

         

         

        양쪽 팔 길이는 제각각이었으나 팔꿈치 위까지 잘려나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 다리….”

         

         

        비극적이게도 양다리는 허벅지에서 골반 사이쯤에서 끊겨 있었다.

         

        결국, 용사 루시는 관절조차 없는 사지 병신이 되고 말았다.

         

         

        “아아아….”

         

         

        쉬어버린 한탄이 흘러나왔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강에게 모두 빼앗긴 것처럼 말라버린 눈가는 더 건조해지기만 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고?”

         

         

        짐꾼의 속삭임에 루시는 공허한 마음을 분노로 채웠다.

         

         

        “살아있기만 한 병신인데 무슨 의미가 있어?”

         

        “살아있다는 건 중요한 겁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는 거에요.”

         

        “이 상태로 뭘 어떻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건데!”

         

        “그건 당신이 선택하기에 달렸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죽고 싶어.”

         

        “그건 안됩니다.”

         

        “내 선택에 달렸다며.”

         

        “생색내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목숨은 제가 살렸습니다. 그러니 기껏 살려놓은 사람 앞에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살려달라고 했던가?”

         

        “죽고 싶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말을 이렇게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오래 하고 있는 대화 같습니다.”

         

         

        맥이 탁 풀렸다.

         

        루시는 왜 자신이 이런 몸으로 짐꾼과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이 더 쓰라리고 아플 줄 알았는데 머리는 빌어먹게도 빠른 순응과 적응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슴 속의 공허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뭘 해야하지.”

         

        “여러가지가 있죠.”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가령 복수라던가.”

         

        “복수… 하….”

         

         

        이 몸으로?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이제 입 밖에 안남았다.

         

        목덜미를 물어뜯기라도 해야 하나.

         

         

        “제가 도와드리죠.”

         

        “비전투원인 네가 어떻게 도와!”

         

        “당신의 몸을 회복시키면 됩니다.”

         

         

        뜻밖의 답변에 눈동자가 떨렸다.

         

         

        “이미 잘리고 지져진 팔다리를 회복시킨다고?”

         

        “예.”

         

        “어떻게?”

         

        “북부, 혹한 산맥 봉우리 어딘가에 여신님께서 직접 제조하고 축복하신 절대회복약이 있습니다.”

         

         

        이른바 엘릭서.

         

        상태이상 해제에 만병통치약하면 무조건 엘릭서라고 하는 것이 판타지 세계관 게임의 국룰이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거짓말이야!”

         

         

        쿵쿵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으며 루시는 다시 패닉에 빠졌다.

         

         

        “이건 모두 꿈이야.”

         

         

        부정하고

         

         

        “깨기 어려운 꿈이라고!”

         

         

        부정한다.

         

        그런 그녀를

         

         

        “그렇다고 하죠.”

         

         

        린은 긍정했다.

         

         

        “깨기 어려운 꿈에서 배신을 당했군요.”

         

         

        그리고 꿈속의 현실을 주지시켰다.

         

         

        “그럼 복수하죠? 어차피 꿈인데 당한 채로 끝내는 건 찝찝하지 않습니까?”

         

         

        살포시 그녀를 침구류에 내려주고 뒤돌아 약을 발랐다.

         

        박치기 당한 곳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너 누구야?”

         

         

        낯설다.

         

        가면 속의 표정은 늘 이랬던 것일까.

         

        고통스러워 하며 울부짖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아주 옅은 미소가 감도는 저 입가가, 어딘가 지쳐보이는 처진 눈가가, 루시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냥 짐꾼입니다. 이래봬도 용사 파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러나 이 대답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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