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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내가 『루미노르 아카데미』에 빙의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로부터 일주일.

         

        의외로 블랙우드 저택에서의 하루하루는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아무 일도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5년 만에 저주에서 깨어난 블랙우드 가문의 외동아들 때문에 요 며칠 더럽게 바빴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아직 혐단 본인이 나를 귀찮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놈이야말로 아직 저주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떨떨한 상태일 테니.

         

        엄밀히 따지면 근본적으로 그 에단 때문에 바빠진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 녀석이 저주에서 깨어남에 따라 블랙우드 저택에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게 그 원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하루 세 번의 식사 준비 서빙과 간단한 청소, 그리고 세탁만 제외하면 딱히 할 일도 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가문이었는데.

         

        지금은 에단 리처드 블랙우드가 깨어난 것을 빌미로 저택에 들리는 병문안 손님들 때문에 블랙우드 가문의 사용인들도 덩달아 바빠진 상황이었다.

         

        매일같이 밀려들고 떠나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블랙우드 가문의 객실을 가득 채운 손님 전부의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해야 하며, 늘어난 청소 횟수와 세탁량까지.

         

         

        평소 전체적으로 모든 업무를 조금씩 맡아서 하던 메이드들도 지금 같은 비상 상황만큼은 철저하게 분업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탁만 하는 메이드는 따로, 청소만 하는 메이드는 따로 같은 식으로.

         

        그리고 내가 맡은 업무는 하필 많고 많은 업무 중에서도 제일 피곤한 ‘접객’ 업무였으니.

         

        사실상 선임 메이드들이 가장 기피하는 일을 나와 이사벨에게 짬처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더럽게 피곤하네….”

         

         

        블랙우드 공작 가문의 가주, 해럴드 리처드 블랙우드.

         

        다섯 세기 전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검술 집안, 블랙우드 가문 출신의 영웅인 그와 약간의 친분이라도 쌓아보려는 귀족들은 이 나라에 널리고 널렸다.

         

        지위라든가 재물 따위에는 전혀 욕심이 없다고 알려진 해럴드 공작이 죽고 못 사는 게 바로 그의 외동아들 에단이었으니까.

         

        뒷배경 스토리에서는 원래 자신의 부인인 타나시아까지 포함하여 가족 전체를 아끼는 사람이었으나, 유일한 반려인 그녀가 죽은 뒤로 오히려 더욱 에단을 애지중지하게 되었다나.

         

        일개 하급 메이드가 어떻게 자신이 들어오기도 전에 죽은 타나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냐고?

         

        플레이 타임만 2천 시간을 갈아 넣다 보면 이런 엑스트라 캐릭터의 뒷배경까지 다 알게 되는 법이었다.

         

        특히 릴리스 루트를 타게 되면 필연적으로 블랙우드 가문과 엮이게 될 수밖에 없었으니, 가문의 가주인 해럴드와도 많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물론 지금 상황에서의 해럴드는 루미노르 아카데미의 엑스트라 따위가 아니라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주인님이었지만.

         

         

        “릴리스, 교대 시간이야.”

         

         

        한 시간의 휴식 후 어김없이 돌아온 근무 시간에 맞춰 사용인 대기실로 들어오는 이사벨.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한 내 몸뚱이는 좀비처럼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 응…. 쉬고 있어….”

         

        “…혹시 릴리스가 너무 피곤하면 내가 한 시간만 더 하다가 교대할까?”

         

        “아니, 됐어. 내가 할 일은 해야지.”

         

         

        괜히 나 대신 이사벨에게 무리해서 일을 시켰다가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피곤해질 테니까.

         

        애초에 이사벨에게는 이 이상으로 빚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고.

         

         

        “알았어. 그럼 힘내!”

         

        “응, 고마워….”

         

        “만약 하다가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교대하러 와도 돼!”

         

        “응….”

         

         

        그나마 이 자비 없는 감정 노동의 위안이 되는 건 이사벨의 이 활기찬 응원이었다.

         

        게임에서도 릴리스 루트를 타다 보면 종종 릴리스의 옛 친구로서 만나게 되는 캐릭터였는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제법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고.

         

        그런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교대 근무를 하기 위해 사용인 대기실 밖으로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해럴드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아들 에단이 저주에서 깨어났다는 건 고작 사흘 만에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이후로는 블랙우드 가문으로부터 가까운 영지에 있는 귀족들이 하나둘 이 블랙우드 영지에 줄줄이 방문했고.

         

        해럴드 공작이 유일하게 아끼는 것으로 소문난 에단의 쾌차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을 한다면 어떻게든 그와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겠지.

         

        심지어 저주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녀석과 약혼을 시키겠다고 자기 딸을 함께 데리고 방문한 귀족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래, 백 보 양보해서 하루하루가 더럽게 바쁘고 하루하루 손님을 맞이하느라 피곤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전생에서 어떤 인물이었건 지금의 나는 블랙우드 가문의 메이드라는 신분이고, 블랙우드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7년 동안 성실히 메이드 근무를 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안 그래도 피곤한 나를 더욱 열 뻗치게 만드는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그 대부분은 저택에 방문하는 남자 손님들이 주요 원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서스 밴더벨트 백작님. 주인님께서는 3층 집무실에 계시니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거 고맙네. …그건 그렇고, 자네 이름은 뭔가?”

         

        “릴리스 로즈우드입니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군. 블랙우드 가문에서의 계약 기간은 몇 년이나 남았지?”

         

        “약 7년 정도 남아있습니다.”

         

        “…흐음, 아쉽군. 1년 내외였으면 내 세 번째 첩으로 삼아줄까 했거늘.”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서 몬드레이크 변경백 님. 주인님께서는 3층 집무실에 계시니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다. 전에도 와 본 적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묵고 갈 테니 내 방을 준비해놓도록. …그리고 만약 네가 원한다면 오늘 밤 내 방으로 찾아와도 좋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블랙우드 가문의 사용인답게 엉덩이가 비싼 여자로군.”

         

         

         

        “어서 오십시오, 오스칼 피어몬트 자작님. 주인님께서는 현재 외출 중이시기에 필요하다면 제가 후에 말씀을….”

         

        “이야, 역시 블랙우드 가문은 메이드도 장난이 아니구만. 한 달에 얼마나 받고 일해? 너 정도 얼굴이면 거의 금화 다섯 개 정도는 받겠는데?”

         

        “…사용인의 급여는 블랙우드 가문의 내부 정보이기에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해럴드 공작님도 말로는 죽은 마누라를 잊지 못한다니 뭐니 하시더니만, 뒤에서는 매일 이런 여자를 안고 계셨구만! 공작님이랑 한 번 할 때마다 얼마나 받아? 돈만 내면 혹시 나도….”

         

        “주인님께서는 사용인과의 사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또한, 저는 블랙우드 가문의 사용인으로서 외부인에게 제 신체를 위탁하지 않으므로….”

         

        “거 존나게 비싼 척 구네? 야, 지금 내가 겨우 자작이라고 만만해 보이냐? 이래 봬도 내가 10년 전 대전쟁에서 해럴드 형님이랑 의형제까지 맺은 사람이야! 앙?!”

         

        “…내가 너 같은 녀석과 의형제를 맺었다니,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군.”

         

        “……해, 해럴드 형님?”

         

        “이자는 내가 직접 응대할 테니 자네는 내 집무실에 가서 대기하고 있게. 잠시 전할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인님.”

         

        “형님, 아, 아니, 해럴드 님…. 방금은 잠시 오해가….”

         

         

         

        대충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손님, 아니, 손놈 때문에 다른 의미로 머리가 피곤해지는 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블랙우드 저택 안에서 나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저택에 방문하는 모든 손님을 포함해서.

         

        공작 저택의 현관을 통과할 수 있는 평민은 기껏해야 그 저택의 사용인뿐이었으니.

         

        그 외에 귀족이 아닌 평민이 이런 저택의 출입 허가를 받는다는 건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라고 보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응대해야 하는 손님의 수도 늘고, 그 손님 중에서 나를 좆 같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손놈의 수도 늘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이중으로 열이 뻗칠 수밖에.

         

        물론 나에게 이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빙의한 캐릭터 자체가 야겜의 메인 히로인이니만큼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더욱 끌게 하는 외모였다.

         

        실제로 릴리스였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2차 성징이 발현한 이후 음흉한 눈빛으로 이 몸을 바라보는 남자도 제법 많았던 것 같고.

         

        그때의 나는 전생의 경험을 기억해내기 전이었으니 그 시선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지만.

         

         

        “누가 야겜 아니랄까 봐 메이드복도 무슨 창녀복 같은 걸 입혀놔서는….”

         

         

        가슴과 허벅지를 거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내는 이 의상도 여러모로 악의적이었다.

         

        물론 성인 미연시 기반의 SRPG 게임인 만큼 이 세계에서는 평범한 메이드복이었지만.

         

        후반부 이벤트로 얻을 수 있는 릴리스의 다른 의상 같은 경우에는…그냥 상상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웠다.

         

        플레이어로서는 여러모로 고르는 맛이 있었던 히로인들의 의상이었지만, 막상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위기감이 느껴지는 의상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이 릴리스는 제작진들의 악의가 가득 담긴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안타까운 캐릭터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거의 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에단에게 조교를 당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는 때에 따라 정신이 망가질 정도로 심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할 정도로.

         

        이런 캐릭터에게 제작진들이 입히려고 들 의상이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겠지.

         

         

        어쨌든,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에 의상까지 이딴 옷을 입혀놓았으니 좋든 싫든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릴리스 로즈우드라는 캐릭터는 루미노르 아카데미의 메인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까. 다른 일반적인 여자들보다는 확실히 외모 경쟁력이 있어야겠지.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부터 만난 남자 중 이 몸뚱어리를 한 번도 야한 시선으로 보지 않은 남자는 기껏해야 다섯 살 이하의 어린 귀족 자제들이 전부였다.

         

        아직 어린애들은 내 외모를 보고 예쁘다는 것 정도는 알아보았지만, 적어도 성인들처럼 가슴이나 허벅지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성에 대한 관념 자체가 없는 어린애들을 제외한다면, 딱 한 명 정도 더 있기는 했다.

         

        나를 한 차례도 야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위인이.

         

         

        “…기다리게 했군.”

         

         

        블랙우드 저택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고.

         

        눈앞에 나타난 주인님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그를 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해럴드 리처드 블랙우드.

         

        현재 나를 고용하고 있는 내 주인님이자, 빌어먹을 혐단 새끼의 아버지.

         

         

       

        또한, 이 저택의 남자들 중 유일하게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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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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