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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저벅저벅.

       

       기권을 선언한지 어언 5시간이 지나가고 있었고, 석양이 지는 늦은 오후 즈음, 렌들러를 따라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목적은 저녁 식사요, 목적지는 그레이트 홀이다.

       마음 같아선 방으로 식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합숙 하루 전의 저녁 식사는 평범한 자리가 아니었다.

       

       최종 후보들의 첫 회동.

       

       내일부터 진행될 제 3 북부대공녀와의 합숙에 앞서 최종 후보들끼리 서로를 탐색하고 인사하는 자리가 작금의 저녁 식사 자리인 것이다.

       ‘공식’적인 일정이었던 터라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기 어려웠다.

       아직 ‘공식’적으론 최종 후보였으니까.

       렌들러의 뒤를 따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한숨 한 번 거하게 곁들이며.

       

       “하아아, 몸이 아프다 하면 되지 않나?”

       

       철부지 소년의 투정과 같았지만, 그만큼 내게 최종 후보들과의 회동은 불편한 것이었다.

       엮이고 싶지 않은 이들과 살갑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 어디 그 밥알이 목구멍으로 고이 넘어가기나 하겠는가.

       

       “왜 그러십니까? 후보님들과의 식사가 불편하신 겁니까?”

       “뭐, 비슷한 셈이지.”

       “허허. 이상하군요.”

       “뭐가.”

       “후보님들과 남다른 연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는 외려 반가워 하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실로 오랜만의 재회니까요.”

       

       ……쯧, 그 놈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이러는 것이건만. 속내를 이해하지 못 할 이에게 읍소를 올려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난 이준우라는 대한민국의 남자다, 여긴 소설 속 세계이고 자네가 섬기고 있는 이에게 빙의한 자이기도 하다, 라고 했다간 ‘저게 술만 퍼마시더니 기어코 맛이 갔구만’이란 멸시만 받을 게 뻔했다.

       

       “반갑기는.”

       “…흠.”

       

       렌들러가 돌연 걸음을 멈추곤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나저나,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뭐가.”

       “공자님을 모신지 어언 26년이 되어가는데, 오늘따라 꼭 다른 분을 모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확실히 노집사장께선 눈치가 빠르시군.

       어쩌면, 주인님 몸에 빙의한 현대인의 까무러칠 비밀을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충격에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콧방귀를 뀌며 렌들러를 앞질러갔다.

       

       “흥, 우리 노집사께선 실없는 소리도 할 줄 아시는군.”

       

       렌들러와 엘든 라펠리온 간의 깊은 유대 관계는 알고 있다. 무료편 막바지쯤 과거편이 짧게 나왔으니까.

       아버지와 같은, 때론 어머니와 같은 존재.

       눈물의 후피집이 시작됐을 때도 엘든의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노쇠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기가 꺼려졌다.

       

       ‘…자식을 강탈한 느낌이랄까.’

       

       강제로 빙의당한 내가 느낄 죄의식은 아니지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덜기 위해선, 개망나니 공자 엘든 라펠리온의 갱생 프로젝트를 충실히 수행해 드리는 수밖에.

       

       “안 오고 뭐해?”

       

       슬쩍 뒤를 돌아보며 그리 얘기하자, 렌들러가 늘 그렇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허허. 갑니다. 공자님.”

       

       곧, 그레이트 홀로 들어설 수 있었다.

       

       

       **

       

       

       ‘멋지네.’

       

       과연 북부대공성의 홀답게 웅장한 신전과도 같은 느낌이다.

       바닥은 고급진 대리석으로, 실내라고 믿기지 않는 중앙 분수대와 크리스탈로 만든 거대한 샹들리에들까지.

       단순히 식사를 하는 곳이 아닌, 거창한 행사를 진행하는 곳 같은 공간이었다.

       

       “저깁니다. 공자님. 저는 이쪽에 있을 터이니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불러주십시오.”

       “지금 도움이 필요한데.”

       “말씀하십시오.”

       “나 대신 저기 앉아줘.”

       

       척.

       

       근사한 식탁보가 깔린 원탁을 가리켰다.

       렌들러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본다.

       실없는 농담, 피식 웃으며 벙찐 렌들러의 어깨를 두드리곤 걸음을 옮겼다.

       ‘고, 공자님이… 웃었어…?!’라는 렌들러의 눈빛을 뒤로 한 채로.

       

       중앙에 커다란 촛대가 불을 밝히고 있는 원탁엔, 후회캐 3인방께서 앉아있었다.

       그 주변으론 끝이 뾰족한 안경을 쓴 중년 여성과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노년의 남성이 서있었다.

       손엔 서류 하나와 펜 하나를 쥔 채로.

       후보자 간 전체 회동, 대공녀와의 회동을 쫓아다니며 개별적인 평가를 기록하는 이들이었다.

       사실상 지금부터 최종 평가가 진행되는 셈이다.

       

       뭐, 내 알 바 아니다만.

       

       “일찍들 나오셨군요.”

       

       간단한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소설 속에서만 보던 후회캐 분들을 이렇게 영접하니 왠지 모를 반가움이 드는 건 참으로 우스운 마음이 아닐 수 없다.

       후회캐들 중 가장 계급이 높은 공작가 차남, 데론 켈리드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인사를 받았다.

       

       “늦었군.”

       

       음, 실제로 들으니 꽤 묵직한 중저음이 매력적인 캐릭터로군.

       기생오라비마냥 재수없게 생긴 건 흠이다만.

       그나저나.

       

       ‘너희들이 10분이나 일찍 도착한 건데.’

       

       딱히 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 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좌측엔 데론, 우측엔 백작가 장남 카일, 맞은편엔 후작가 차남 블런드가 있었다.

       소설 속 남주 후보들답게, 머리색도 형형색색인 것이 모아놓고 보니 꽃밭이 따로 없다.

       금발의 데론.

       청발의 카일.

       적발의 블런드.

       그리고 흑발의 나까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하지 않던가, 꽤 볼만하겠다.

       

       “후보자들께서 모두 모이셨으니, 식사를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친분들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부턴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탓에 다들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간악한 속내들을 숨기고 싶은 탓이겠지.

       문무를 시험쳤던 예선과 본선과 달리, 최종 평가는 그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물론 무료편까지의 흐름으로 볼 땐 이 4인방 중에서 최종 승리자가 탄생할 리는 없어 보였다만.

       

       ‘그나저나 상당히 어색하네.’

       

       예선과 본선을 치루는 동안은 후보자 간 왕래를 할 수 없었다. 애당초 개별적인 심사였고, 무예 시험도 대공가의 기사단장과 치뤘기에 마주할 일이 없었다.

       혼약대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 마주하게 된 상황인 것이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 서로 왕래가 없었기도 하고.

       어색한 건 질색인데.

       괜히 수저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자, 호화스런 식탁이 차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모든 음식이 올랐다.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중년 남성이 서류를 열며 시작을 알렸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부터 행해지는 모든 행위와 행사는 평가를 위함이다.

       간단한 식사조차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었으며, 후보들은 그에 맞춰 경건한 자태로 수저를 잡는다.

       

       뭐.

       

       ‘개 맛있겠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우걱.

       

       가장 맛있어 보이는 갈빗대 하나를 가져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갈빗대는 모름지기 뜯어 먹는 맛이 일품인 요리다.

       직후, 평가단 두 명의 펜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셰프에 대한 진심어린 찬사를 내뱉었을 때, 펜대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와, 존나 맛있는데?”

       

       슥, 스스스슥.

       

       

       **

       

       

       ‘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다니.’

       

       최종 평가전……, 조금 괜찮을지도?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와인잔을 들자 원탁 곁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 중 한 명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호로록, 와인을 한모금 머금고 입 안 가득 돌렸다.

       가글하듯이.

       

       ‘흠, 역시 입가심엔 소주가 최곤데.’

       

       마음 같아선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라며 검지 하나를 들고 싶지만, 중세시대에 희석식 소주가 있을 리 없을 터.

       아쉬운대로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후, 상의 포켓에 꽂아둔 손수건을 펼쳐 입술을 닦았다.

       

       탈탈탈.

       

       물론 빨래 털듯 손수건을 펼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접혀 있는 것은 자고로 털어서 펴야 제 맛인 법이다.

       와중에도 두 평가단의 펜대는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고생들이 많습니다.’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이들께 무언의 인사를 보내며 식사를 갈무리하고 있자,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데론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허기가 많이도 졌나보군. 숨도 안 쉬고 먹다니 말이야.”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데론 공자님. 엘든 공자가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제가 다 군침이 돌더군요.”

       

       공작, 후작, 백작.

       계급장 떼고 맞붙는 최종 평가전이라지만, 이미 교류가 있던 사이라 서열 구도가 잡히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엘든 라펠리온과 함께 서열 막내인 카일이 데론의 조롱에 동조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으며, 후작가 차남 블런드가 합세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엘든은 유일하게 쇠퇴한 가문의 영식이자, 재학 시절에도 궂은 일을 도맡아했던 따까리였으니까.

       

       “제가 기억하기론 아카데미 재학 시절엔 식성이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억이 왜곡되었던 모양입니다. 엘든 자네, 이렇게 식성이 좋았던가? 하하하.”

       

       내로라하는 귀족가 영식들답게 교묘한 언변으로써 상대를 짓누르는 세 명의 후회캐들.

       이러한 언변술은 감점보다 득점 요인이었다.

       귀족 사회란 그런 곳이니까.

       근데 미안해서 어쩌나.

       집단 린치도 경기에 진심인 선수에게 가해야 피해가 입혀지는 법인데 말이다.

       경기에 진심은커녕 관심도 없는 내겐 까막눈들의 지저귐에 불과했다.

       애당초 살아온 방식들이 그러할 터인데, 어쩌겠는가.

       응수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자 카일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무리를 아울러보았다.

       

       “그나저나 데론 공자님, 블런드 공자님.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그 많은 참가자들 중에 이렇게 4명이 최종 후보가 된 것이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

       

       말을 마친 블런드가 데론을 보았다.

       아첨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데론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을 때,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심산일 거다.

       

       “위대하신 켈리드 공작가의 데론 공자님과 함께 왕립 아카데미 동기생 4명이 나란히 최종 후보가 되다니, 이거 괜한 소문이 돌겠습니다. 하하.”

       

       눈물 겨운 아첨질에 데론이 흡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고개만 주억였다.

       이쯤에서 엄한 곳에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권이 반려되든, 이 옹졸한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미리 선을 그어두는 게 피차 편할 터였다.

       블런드에게 말을 걸었다.

       

       “저, 블런드 공자님? 죄송하지만 말씀을 정정해 드려야겠군요.”

       “…뭐? 정정?”

       “아카데미 동기생 3명이 최종 후보가 되었다… 라고 하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기애애한 아첨쇼를 깨는 의문스런 말에, 3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게 귀띔을, 하다 못해 기권 사유를 묻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답해줄 것이다.

       그것은 내막을 알고 탈주를 시도하는 빙의자가 가질 최소한의 책임이자 도리이니까.

       또한, 후회캐 3인방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으니까.

       히죽 웃으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오전, 최종 후보 기권 선언을 했습니다.”

       

       

       슥, 스스슥!

       

       펜대의 움직임이 급격히 빨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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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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