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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고,

       

       얻었으면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아직도 왜 황실에서 지원금을 더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아무튼 내 하드캐리로 ‘지원금 30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 95%는 벌어온 사람에게 환원되어야 도리에 맞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자색 마탑주는 공정한 지원금 분배에 이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 내 마탑이야⋯⋯! 자색 마, 마탑은 내 마탑이라고!”

       

       “제가 타 낸 지원금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 그걸 혼자 다 처먹겠다는 게⋯⋯!”

       

       “남은 5%로도 작년이랑 비교하면 1.5배 늘었던데요.”

       

       “늘! 었! 지! 만!”

       

       

       세뱃돈 천만원을 받았다가 부모님의 무자비한 ‘어른 되면 돌려줄게’에 5만원만 남아버린 아이처럼, 자색 마탑주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땡깡을 부렸다.

       

       “우, 우리 제자들⋯⋯ 구질구질하게 쓰던 마정석, 재, 재활용 안 해도 된다구⋯⋯ 이제 최하급 말고 하급 쓸 수 있다구기대하고있었는데엑-!”

       

       자색 마탑주가 ‘식구들 먹여살리기 위해서 필사적인 가장’ 감성을 한 스푼 담아내자, 내 단련된 양심에도 조금씩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자색 마탑에 먼저 입주한 선배들은 다들 꼬질꼬질했으니까.

       

       각 마탑에서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모여들었던 날, 다른 마탑에서는 마탑주 뒤로 수행원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모두들 각 마탑을 상징하는 멋진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었고.

       

       하지만 자색 마탑주의 뒤에는 수행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자색 마탑 마법사들이 다 아웃사이더 성향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단체복이 없어서 그냥 안 나왔던 거랬다.

       

       

       그래, 자색 마탑은 유니폼도 없을 정도로 쪼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비 아끼겠다고 접시에 남은 빵가루 핥아먹는 선배도 봤다.

       

       마법사라는 고소득 직종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짠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양보하면⋯⋯ 내 연구가 늦어진다.

       TRPG를 위한 가상현실 구현이라는 가슴 떨리고 원대한 연구가.

       

       ‘개짱센 드래곤을 내서 플레이어들이 영웅적인 전투 끝에 간지나게 잡게 해야지.’

       

       내면의 속삭임이 내 마음 속에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마탑 선배들의 고통과 눈물은 불가피한 희생이 아닐까.

       

       

       내 눈동자에 스친 독심(毒心)을 읽었는지, 자색 마탑주는 땡깡 2페이즈에 들어갔다.

       무릎으로 사사삭 기어와서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찡찡대기 시작한 것이다.

       

       “지원금 죠오오오으으흐흐흑⋯⋯!”

       

       “흠.”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

       과연 나는 이대로 내 연구비(잠정)를 마탑에 헌납해야만 하는 걸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벼락과도 같은 영감이 스쳐지나갔다.

       

       “선배들이 지원금이 필요한 거잖아요.”

       

       “⋯⋯응?”

       

       “그럼 마탑 선배들 전원이 ‘지원금 없어도 돼’ 라고 생각하면, 제가 양심의 가책 안 느껴도 되는 거 맞습니까.”

       

       그게 되겠냐고.

       자색 마탑주는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법사란 자고로 연구비에 미친 사람들이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쪼들리는 마탑이라지만 자색 마탑은 무려 황실에서 지원금을 타먹는 입장. 그런데 설거지를 혀로 하고 유니폼도 없어서 대외활동 못 하고 하는 게 이상하지 않던가.

       

       유니폼 살 돈, 맛있는 걸 먹을 돈을 연구에 꼴아박아서 가난한 거다.

       평생을 바쳐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집요한 구석이 있다. 

       

       나보다는 못 하지만 존중할만한 정도의 독심. 어지간해서는 연구비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묘책이 있었다.

       

       

       “마탑 선배들을 설득해보죠. 설득에 실패하면 깔끔하게 50%만 먹겠습니다.”

       

       “야, 야호⋯⋯! 50% 먹었다⋯⋯!”

       

       내가 설득에 성공할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 자색 마탑주는 벌써부터 만세를 불렀다. 기분이 참 좋았는지 주변에 비눗방울 환영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떠오른 비눗방울을 가만 들여다보자, 내가 선배들에게 ‘미친새끼야내연구비를탐내!!’ ‘당장 나가지 않으면 고백하겠다.’ 등의 험담을 듣는 이미지가 스쳐지나갔다. 

       

       마탑주는 기분이 좋으면 가끔 이렇게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게 새어나온다.

       

       다짜고짜 ‘제 연구가 더 중요하니까 연구비의 95%는 제가 쓰겠습니다.’ 라는 본심을 말했다가는 방금 본 환영처럼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예쁜 사람이 설득력이 높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진리. 잘생기고 예쁜 웃는 낮에는 침을 못 뱉는다는 속담마저 존재하지 않던가. 그러니 정답은 하나.

       

       

       “미인계 씀.”

       

       “?”

       

       박수 짝짝.

       

       의지와 함께 마력을 일으키자 내 배후에 하트쨩이 기묘한 자세로 나타났다.

       배후에서 인간형의 무언가를 소환할 때에는 기묘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씹덕공통의 예법이니까.

       

       탑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는 사람들의 약점은 명명백백하다. 바로 미인계다.

       밖에 나가서 사회생활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하며 유혹 내성을 기른 인싸들과 비교하면, 셀프 통조림 연구자의 유혹 내성은 종잇장 수준⋯⋯.

       

       여기서 출격하는 게 대륙의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린 팜므파탈, 환상 마법으로 만들어 낸 NPC 하트쨩의 3차 수정판이다. 

       

       자색 마탑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 연구비를 위해서 환상 마법으로 탈을 쓰고⋯⋯ 가, 같은 남자 선배들을 유혹하겠다고⋯⋯!!”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분리된다니까요.”

       

       “하, 하지만 마탑의 절반은⋯⋯ 여자! 머, 먹히지 않을 거야⋯⋯.”

       

       “하트쨩 뿐이었다면 그랬겠죠.”

       

       

       여캐가 있으면 남캐도 있다. 당연한 이치다.

       곧 죽어도 여캐만 굴리며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인 TRPG를 여는 괴인들도 몇몇 있다지만, 나는 인간 본연의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내가 남캐란들 할 수 없겠는가.

       

       짝.

       미중년 외눈안경 올백머리 중후한 집사.

       

       짝.

       하라구로── 겉은 순수해보이지만 속은 소악마인 반바지 쇼타 집사.

       

       짝.

       투덜대면서도 은근히 챙겨주는데다 성실히 업무에 일하는 약간 불량해보이는 까치머리 미청년 집사.

       

       짝.

       목소리가 섹시하고 로판 화법을 탑재한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실눈캐 집사.

       

       

       “주인님,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북대륙산 커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조제프가 아니라 제 것을 맛보세요! 자스민 티가 잘 우러났답니다!”

       

       “이봐, 주인! 저번에는 떫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좀 더 신경 써서 타 봤어.”

       

       “후후후⋯⋯ 아가씨. 나름대로의 사랑을 담은 홍차입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흐이아아앗⋯⋯!!”

       

       집사 4인방이 자색 마탑주를 둘러싸고 차 좀 드실래요 포위진을 형성하자, 마탑주는 트랩에 걸린 카피바라처럼 오들오들 떨며 쭈그러들었다.

       

       고개를 숙여서 표정을 관찰해보니, 당황으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부끄러워도 좋긴 좋은 거구나.

       

       집사 기본형 아키타입 ABCD 4종 중에 먹히는 캐릭터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이 조제프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주인님, 얼굴이 새빨개! 열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잠깐 재 볼게⋯⋯.”

       

       “그, 뭐냐, 감기에 걸린 거라면 내가 이번에 만든 목도리가 있는데 말이다. 너 줄게, 주인.”

       

       “감기는 남에게 옮기면 쉬이 낫는다고들 하더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아가씨의 감기를 입으로 받아가도──”

       

       마탑주의 표정에서 ‘우와, 싫다.’는 기색이 보여 마지막 실눈 집사는 즉시 지웠다. 캐릭터가 버터맛이 많이 나는 게 문제였나. 나머지 집사’s는 합격이었는지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무자비한 집사 융단폭격에 무지성 나데나데를 당하고 10분.

       자색 마탑주는 완전히 녹아 허물어졌다.

       

       

       “시범 운행 완료.”

       

       확신이 들었다. 자색 마탑주가 유달리 함락시키기 쉬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선배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트와 집사 부대는 열을 맞추어 척척척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탑의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연구 지원금을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끌어내기 위하여.

       

       “으, 아, 안⋯⋯ 돼⋯⋯!”

       

       흐물흐물한 마탑주가 마지막 기운을 짜 내서 손을 뻗었다.

       그녀도 직감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내 NPC 군단에 의해 마탑이 평정당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녹아버린 표정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마탑주에게 허락된 일은 아기사슴밤비처럼 행복을 곱씹으면서 마탑함락의 순간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나는 후드를 눌러 쓰며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뉘였다.

       

       마탑점령에 걸린 시간은 이틀 하고도 두 시간이었다.

       

       ===============================================================

       

       지원금을 혼자 다 처먹고 연구를 시작한지 2년이 또 흘렀다.

       

       내게서 지원금을 빼앗아가려는 자색 마탑주의 사악한 계략을, 환상 마법을 이용해 슬기롭게 돌파해나가는 목가적인 나날이었다.

       

       NPC의 자동 조작을 구현하려다가 막혀서 골머리를 앓았다. 현실감 있는 세계를 보여주려면 최소로 잡아도 NPC가 10명은 필요하다.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좋고.

       

       그러니 언제까지고 내가 수동조작을 할 수는 없었다. 집사 군단을 수동으로 조작했던 날 절절히 체감했다.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더라.

       

       자동으로 설정한 성격에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비상시에 내가 탑승해서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 나는 AI 기술이 필요했다.

       

       그걸 환상 마법 원툴로 구현할 수 있나. 다른 학파와 협업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때 자색 마탑주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대한민국에는 앉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가정사를 토해내게 하는 정신지배의 의자가 있다. 특유의 그 오묘한 분위기가 사람의 마음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그래, 분위기.

       나는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자색 마탑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는, 어떤 마법을 만들고 싶은 거야?”

       

       항상 쫄랑거리던 사람이 웬일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자,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됐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속마음을 드러내고야 마는 새벽감성의 분위기 말이다.

       

       나는 단출하게 대답했다.

       

       “세계요.”

       

       “여기⋯⋯ 지금 발 딛고 있는 세계로는, 부족해서?”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머, 머리도 좋은 녀석이⋯⋯.”

       

       

       마탑주는 우물쭈물하다가, 직구로 때려박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둥그런 눈동자에 결의가 스쳤다. 단단해서 부러질 것 같지 않은 심지다.

       

       “내 이름, 한 번도 불러준 적 없는 거 알아?”

       

       “마탑주님이시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

       

       없었다.

       사실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일종의 정신병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가 싶다가도, 어느샌가 이름을 잊었다. 

       

       환생 특전을 저주로 줬나 싶어서 마탑에 소속된 이후로 이것저것 검사를 해 봤다. 몸도 영혼도 말끔했고, 새겨진 저주의 흔적은 없었다. 순수한 정신병이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자색 마탑주’로밖에 기억할 수 없는 소녀의 표정을 살폈다.

       저건 슬픔과 걱정이라고 부르는 표정이다.

       

       

       “⋯⋯는, 가끔, 아주 가끔씩⋯⋯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아.”

       

       “⋯⋯⋯⋯.”

       

       마탑주의 말이 맞았다. 

       바라지 않는 환생이었다. 혹은 결함 투성이의 환생이었다.

       

       차라리 전생의 기억이 없었어야 했다.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한다. 맑다고는 못 할 공기, 뒷산의 소나무 향, 어머니가 해 주신 된장찌개, 자글자글 튀긴 가자미, 죽 찢은 생절이 김치.

       

       통학로의 옆구리 터진 쓰레기 봉투, 야밤이면 네 번은 깜빡이고 나서야 불이 들어오는 가로등.

       아직도 핸드폰 앨범 한 켠에 남아있는 전 여자친구의 사진. 지금까지 해 온 TRPG 기록들.

       

       그래.

       

       내 영혼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머물러 있었다.

       

       

       “만약,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라면⋯⋯.”

       

       “보여드릴까요?”

       

       “⋯⋯응?”

       

       “제가 있었던 세계, 보여드릴까요.”

       

       충동적으로 뱉었고, 자색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생한 이후의 첫 마스터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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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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