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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 * *

       

       

       

       

       

       앞으로가 중요하다.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하나.

       

       어차피 며칠 후면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잠시 회복할 테니까.

       

       이후에 트로츠키가 적군을 손보면서 반격을 가해 다시 뜯긴다.

       

       

       “흠.”

       

       

       이곳에서 가까운 백군 지역은 뭐 동쪽으로 바로 가면 되지만.

       

       가깝다면. 돈일까.

       

       분명 돈 카자크가 있는 지역으로 여기서는 좀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머리를 굴려라.

       

       뭔가 지식이 샘솟을 것 같으니.

       

       시간이나 보내보려고 도서관에서 한참 책을 뒤질 때 읽었던 세계사, 러시아사를 떠올려본다.

       

       그래.

       

       분명 돈 공화국의 지도자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인가.

       

       거기도 훗날 적군에 점령당하니, 위험하다. 

       그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최대한 빨갱이 붉은 군대를 피해 백군 쪽으로 옮기기는 해야 하는데.

       

       시베리아 쪽으로 가서 열차를 어떻게든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 하는데 이 꼬락서니를 보니 한동안 나는 주목받을 것이 뻔하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레닌 동지의 이름으로 저주받은 로마노프의 마지막 핏줄을 끊으리라!”

       

       

       아, 볼셰비키다.

       

       팔자에도 없던 암살 시도를 몇 번이나 받는 걸까.

       

       저 빌어먹을 개과천선 빨갱이들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린 바람에 내 꼴이 우습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잘못한 건 니콜라이 2세인데, 그 자식에게까지 죄를 묻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이쯤 되면 다 보인다.

       

       총구를 가까이에서 나한테 들이대고.

       

       개과천선 빨겡이들이 막으려 하지만 당연히 총보다 빨갱이들이 빠를 리 없었다.

       

       아니, 총을 든 저놈도 빨갱이니 그게 그건가.

       

       

       타앙!

       

       

       솔직히 이쯤 되면 그냥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데.

       

       여긴 일종의 게임 속이라고. 나는 아나스타샤라는 캐릭터를 한번 죽으면 끝나는 하드모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죽으면 나는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 몸은 총에 맞아도 죽지 않았다.

       

       좀비가 된 듯 상처를 입으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총알이 먹히지 않는다.

       

       마치 무엇이든 튕겨내는 신의 방패처럼 총알은 내 머리에 닿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오오. 황녀께서는 멀쩡하시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전러시아의 성녀셔!”

       “황녀님! 부디 아픈 제 자식놈을 어루어 만져 주소서!”

       

       

       방금 전까지 나를 보고 진짜 황년가. 황녀면 뭐 해 잘나신 차르의 딸인데, 불쌍해라.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던 인간들이 태세 전환을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무리한 설정을 박아넣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아나스타샤가 답이 없다고 하지만.

       

       이럴 거면 그냥 다른 인물에 빙의시켜 주지.

       

       벙어리가 된 암살 빨갱이를 처리하고, 그냥 조용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자꾸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있다.

       

       이곳이 백군지역이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애초에 무교다.

       

       주님의 사랑이든 뭐든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되는대로 저지르고 본다.

       

       

       “황녀님 부디 제 손을 한 번이라도!”

       “황녀님! 황녀님!”

       

       

       손을 잡아달라는 노인들의 손을 잡아주고. 아픈 아이들의 손도 잡아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쇼맨십. 이미지 개선을 위한 짓에 불과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굶주려서 말라 오늘내일하는 노인들의 두 눈에 생기가 깃들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소년은 노파의 품에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배고프고 굶주렸던 자들은 굶주림이 사라졌다.

       

       

       “배가 먹지 않아도 배불러?”

       “힘이 넘쳐나.”

       “아이고 황녀님 제 자식놈이 되살아났습니다! 황녀님!”

       “진정한 성녀님이시다!”

       

       

       뭔 개소리야. 미친놈들이신가.

       

       이게 원효대사 해골물이라는 건가.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이 성녀로 기억되려는 순간이었다.

       

       오냐. 그렇게까지 머리가 깨져도 아나스타샤란 말하고 싶다면 들어 주겠다.

       

       나는 즉석에서 적당히 나무상자를 모아 만든 연단 앞에 섰다.

       

       그리고.

       

       모든 어린 양들 앞에서 나는 조곤조곤.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흘린다.

       

       

       “제국의 신민들이여. 주님의 어린 양들이여.”

       

       

       조심스럽게, 최대한 불쌍하고 동정을 얻을 것 같은 목소리로.

       

       한때 제국의 신민이고 지금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언제 붉은 역병에 휘둘릴지 모를 불쌍한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연설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붉은 역병이. 이곳까지 들이닥치려 합니다. 그들은 신민들에게, 노동자들의 해방이란 달콤한 속삭임으로 회유하려 하나 절대 그들의 마수에 현혹되면 안 될 것입니다.”

       

       

       그저 되는 대로. 아는 거 하나 없지만 어떻게든 또박또박, 신이 점지해주셨다는 것처럼.

       

       주님의 어린 양들을 말도 안 되는, 방금 전에 뇌에서 생성된 말들을 쏟아 낸다.

       

       

       “나를, 내 아버지를, 무능해서 총살당한 차르와 내 형제자매를, 황실을 욕하고 비웃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들 볼셰비키는 자기들이 정한 체제에 노동자를 예속시키려 합니다. 이는 해방도, 노동자의 권리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노동자란 노예들을, 말 잘 듣는 노예들을 원할 뿐입니다.”

       

       

       볼셰비키는 무조건 나쁘다.

       

       그들은 제정 시절보다 더 영악하게 복종을 요구할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복종 당하는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굴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를 단결하자며 이상론으로 무장한 권위주의를 들이밀 것입니다. 당에 복종하지 않는,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어 반발한다면 가차 없이 탄압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볼셰비키에게 철저히 굴려지고 이용당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복종하지 마십시오! 투쟁해야 합니다! 저 붉은 역병을 물리칠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따라 주십시오. 약속하겠습니다. 농노의 해방을! 토지개혁과 노동자의 권리를 로마노프의 이름으로, 아니, 로마노프를 믿지 말고, 아나스타샤라는 개인을 믿으십시오. 전러시아 성녀의 이름으로 보장하겠습니다! 러시아인의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나는 그대로 실망한 척 떠나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열차 타고 백군 지역으로 가서 미국까지 가는 방법을 찾고. 아무런 접점도 없으니, 뭐 한국의 독립은 직접 도와줄 수 없지만, 나중에 적당히 입에 담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솔직히 말해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 로마노프의 막내 딸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 라시아인들이 차르에게 당한 게 얼만데, 이 아나스타샤를 믿을까?

       

       

       “황녀님을 따르겠습니다!”

       “황녀님을, 로마노프를 다시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전 러시아의 성녀, 아나스타샤 황녀님 우라!”

       

       

       허.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러시아인들은, 주님의 어린 양이 되려 하는 이 인간들은, 머리에 마구니가 껴있다고 내가 손수 뚝배기를 깨도 따를 것이라는 것을.

       

       그래. 어쩌면 지금이 골든타임일 수도 있겠다.

       

       붉은 역병이 완전히 번지기 전에 그나마 아직 제국 시절의 향수에 젖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대체 지금, 이곳에는 도시를 관리하는 볼셰비키들은 없는 건가?

       

       머리 세척한 체카 요원들이 그러니 나를 끌고 나온 거겠지만.

       

       적백내전 초기 행정력이 별로라더니 그 말이 맞다.

       

       아니면 백군 때문에 뒤로 빠졌다거나?

       

       어쨌든.

       

       결국 이렇게 되면 내가 적백내전에서 백군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지.

       

       그런데 내가 무슨 공약을 내걸든 결국 전쟁은 백군 지휘관들이 할 것이다.

       

       표트르 브란겔, 알렉산드르 콜차크, 안톤 데니킨.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그리고리 세묘노프.

       

       이중 콜차크의 백군은 얼마 후 예카테린부르크를 탈환할 것이다.

       

       지금이 정확히 몇월 며칠인지 시간 개념도 없고.

       

       콜차크의 백군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 지도 도무지 감이 안 잡히니.

       

       아마 볼셰비키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 멍청이들은 황실이 구심점이 될 것을 우려해서 급하게 니콜라이 일가를 처형했다 이 말이다.

       

       그럼, 어떻게든 남은 황녀를 죽이려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새끼들도 악에 받쳤을 테니.

       

       그 증거로, 지금 나를 또 죽이려는 것들도 나타났고.

       

       아마 쥐어짜내서라도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일단 한 번 떠보기라도 해야 할까.

       

       여기 대가리 깨진 놈들이 이용하면 빨갱이들을 거를 수 있을 거 같은데.

       

       

       “성녀님! 이곳에는 아직 볼셰비키들이 많습니다!”

       

       

       한 노인이 외쳤다.

       

       

       “볼셰비키들이?”

       “황녀님을 찾아 죽이겠다는 놈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원래 이 타이밍에서는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콜차크의 백군이 잠시만이라도 탈환할 수 있던 거 아닌가.

       

       아, 그렇군.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다.

       

       백군의 구심점이 될 것을 우려해 급하게 니콜라이 일가를 처형한 볼셰비키다.

       

       이미 다 죽여놨는데 하나가 살아남아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비록 여자라 하나 예카테리나 같이 러시아는 여제. 차리나가 존재했다.

       

       어떻게든 잡아 죽이려 하겠지.

       

       그래서 예카테린부르크가 백군에 함락당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황녀만은 죽이려 할 것이다.

       

       아마 이 중에서도 만일 황녀를 찾으면 바치려고 했던 자들도 있을 거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목도했다.

       

       그러니까. 나를 거스르면 신을 거스르게 되는 거라 여기고, 내심 따를 수밖에 없다고 여기겠지.

       

       이미 굴복을 택한 상황에서, 제아무리 개 짓거리를 해서 망했다고 해도 오랫동안 제정의 통치를 받은 러시아인들이다.

       

       그럼 결국 이쪽을 택할 수밖에 없지.

       

       적백내전 기간, 백군은 군벌집단에 가깝지만, 녹군이나 흑군등, 볼셰비키든, 백군이든 공격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도 이곳에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대가리 깨진 신민들이 있으니, 이곳만큼은 거점으로 잡아 둬야 한다.

       

       그래야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고기 방패들을 만들어두고 바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튀어야지.

       

       물론 내가 시간과 속도를 지배한 조선 선조만큼 런은 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때까지만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래, 볼셰비키만이 선동을 잘 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냥 지금 런하면 될 뿐이다.

       

       

       “전러시아의 복된 신민들이여. 기왕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이라면, 이곳에서 붉은 역병을 축출해야 한다! 이곳 예카테린부르크가 새로운 러시아의 중심이 되려면 저 고름을 짜내야 하니, 신민들이여, 무기를 들라!”

       

       

       러시아의 신민들은 그렇게 스스로 의용군이 되었다.

       

       이들은 작게는 진실로 로마노프에 충성을, 또는 신의 기적을 보고 광신도가 되든, 신이 무섭든 간에 나를 따르기 시작했고.

       

       예카테린부르크의 볼셰비키놈들이 붙잡혔다.

       

       내 앞에 무릎 꿇려 있는 빨갱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희열감이 느껴진다.

       

       적개심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들이다.

       

       자, 그럼 효과 빠지기 전에 조금 더 이 몸을 이용해볼까.

       

       

       “나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군.”

       “과연 라스푸틴에 놀아난 황실답소! 이렇게 인민을 현혹하다니!”

       “너희가 할 말은 아니지 않느냐? 듣기 좋은 말로 선동해서 겨우 정권을 탈취한 주제에 말이다.”

       

       

       어딜 감히 주둥일 나불거려. 

       

       바퀴벌레들 주제에.

       

       

       “너희가 상대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보아라.”

       

       

       나는 볼셰비키가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아 스스로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타앙!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원래 2회 올리려고 했는데, 실수로 지금 올리네요.ㅠㅠ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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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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