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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제국.

     

     처음에는 저기 노스트럼 왕국의 지브롤터 백작령보다 작은 크기였던 나라.

     스스로 제국을 천명했을 때 주변 여러 군소왕국이 이를 무시하고 전쟁을 벌였으나, 오히려 제국에게 잡아먹히며 멸망했다.

     제국이 대륙 서부를 통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500년.

     그동안 제국의 수도는 몇 번이고 옮겨졌고, 지금은 대륙 서부의 정중앙에 이르렀다.

     깎아지른 산을 등지고, 남쪽에는 강이 흐르는 땅에 우뚝 솟은 드높은 성.

     세간에는 ‘백악의 거성’이라고 불리는 곳의 꼭대기.

     “제도는 언제나 조용하군.”

     하얀 수염이 지긋한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벽부터 시끄러웠건만.”

     머리칼 하나 없는 그의 머리에 햇빛이 비치며 반짝이고, 노인은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도전철은 파업 없이 정시에 출발하고, 새벽부터 시끄럽게 달리는 마도바이크도 없고.”

     “그야 다 폐하께서 법을 제정하셨기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노인, 황제의 뒤에 선 중년의 남자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술의 발전은 또다른 문제를 초래하는 법.”

     사자와도 같은 인상의 헝클어진 군청색 머리칼.

     낮게 깔리는 중후한 목소리.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표정.

     여느 장군 못지않은 큰 체격.

     “노동자들이 스스로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것도, 자유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폭주를 즐기는 것도 전부 마도공학의 발전 덕분입니다.”

     그리고 눈동자에 서린 은은한 보라색.

     “이 모두, 자비로운 폐하께서 오랜 기간 마도공학에 국비를 투입하시어 빚어낸 발전입니다.”

     노인과 닮은 점이 있다면, 그 연보랏빛뿐.

     “항상 감사드립니다.”

     “문안 인사로 올릴 이야기치고는 제법 가볍구려. 답지 않게.”

     노인, 황제는 탁자에 놓아둔 신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변명해보시오, 황태자.”

     “변명할 것이 무어 있겠나이까.”

     “오크의 군락을 건드려 그 혈흔이 협곡을 향하게 하고, 변경백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백작가에 그림자를 보낸 건에 대하여.”

     “그 건이라면 변명이 아니라 ‘보고’이옵니다, 폐하.”

     황태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신문에 큼지막하게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변경백과 대치하는 모습을 통해 국내 주전파의 여론을 끌어냈습니다. 납치범은 당연히 우리 제국 사람이 아닙니다.”

     “그림자를 내세웠음에도?”

     “그림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직 들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것도 모르잖습니까.”

     황태자는 손가락 끝을 비볐다.

     “몰락한 예슬람의 연금술사들이 제국을 망가뜨리기 위해 만들어낸 물건입니다. 저희 제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죠.”

     “그 연금술사들을 황태자가 거두어 공방을 차린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폐하.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서입니다. 제 효심을 어찌 이리 몰라주십니까?”

     황태자의 미소가 짙어진다.

     “전부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저 노스트럼의 왕도에 제국의 깃발을 꽂는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소자의 진심을 이리도 몰라주십니까?”

     “그 길이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어도?”

     “하하. 그 누구보다 많은 피를 대륙에 뿌리신 분의 말씀이라니. 가당찮군요. 정복 황제라고 불리셨던 분이.”

     “…….”

     황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안심하시옵소서. 설령 폐하께서 몸져누워계시더라도, 제가 침대를 들고 하늘을 날아서라도 왕도를 정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아들아.”

     “폐하.”

     황태자는 정색하며 황제의 말을 끊었다.

     “저희는 부자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황제와 그 후계자입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내 황제로서 명하리다.”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마물이 가득한 오염지대. 엘프의 숲. 남부 해역. 북부 설원. 어디든 좋소. 노스트럼 왕국으로 가는 길을 뚫으시오. 그대의 방식대로.”

     “폐하의 명대로.”

     황태자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폐하. 또다른 길이 하나 더 있잖습니까?”

     황태자는 창밖, 하늘을 가리켰다.

     “지브롤터 협곡.”

     “……전쟁은, 병사를-”

     “예. 살릴 겁니다. 왕국을 지배하면 그 땅에 우리 제국민들이 가서 살아야 하는데, 당연히 살릴 것입니다.”

     황태자가 창문을 열었다.

     곧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으나, 그 바람 속에는 코를 찌르는 매연이 스며들어있었다.

     “폐하. 안심하시옵소서. 적어도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사랑스러운 황손들은 저 축복받은 땅에서 살도록 하겠나이다.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하여.”

     창 아래.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미래를 위하여.”

     황성 정원의 가운데, 은은한 연보라색이 섞인 머리칼의 소녀가 정원을 달리며 웃고 있다.

     * * *

     사람에게는 누구나 대나무숲이 필요하다.

     어머니가 강제든 무언의 합의든 국왕과 부정을 저지른 걸 결국 내게 털어놓고 감정을 추스른 것처럼.

     아버지가 매국을 결심한 뒤 그 선택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하여 나와 논의하며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는 미래를 아는 나의 정보를 받아줄 존재가 필요하다.

     “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시는 거네요?”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묻는다.

     “뭐든지 배출하세요. 저한테. 언제나 그랬듯이.”

     “감정만 배출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배출할지도 모르는데?”

     “어머?”

     내가 공주의 두 손을 붙잡자, 공주가 게슴츠레 나를 올려다보며 씩 웃는다.

     “떽. 어린아이가 벌써 이런 거 하면 못써요.”

     “어른인데. 누가 봐도 어른인데?”

     “말하는 걸 보면 유치해서 애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원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다 유치해지는 법이거든.”

     “뭐래. 그렇게 이야기를 해봐야, 꿈속에서는 전부 자기 망상이라는 거 알죠?”

     “그렇지.”

     나는 공주가 저항하지 못하게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 감정뿐만 아니라, 욕정의 배출구가 되어주셔야겠어.”

     “와. 쓰레기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에서 악명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뭐 달라지나.”

     휘이잉.

     바람이 분다.

     “그리고 애초에 내 기억으로 빚어졌으니, 잘 알 거 아닙니까. 이곳이 어딘지 잊으셨습니까?”

     

     기억 속 그때와 같이, 모래가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그럼요. 당연히 알죠. 잊을 수 없는…첫 경험을 한 곳인데.”

     공주가 혀로 입술을 훔치며 웃는다.

     “변태.”

     “자주 듣던 말이라.”

     “이번에도 들을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게 해 봤자 결과가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흐응….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주가 내 손을 맞잡는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아가씨의 마음을 훔치고 다니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연회장에서 춤을 추듯 손을 잡으려다, 손깍지를 끼며 몸을 가까이한다.

     “어때요?”

     “그러다가 잡혀서 광장에 질질 끌려가기라도 한다면, 그들에게 돌팔매질 당하고 그럴 겁니다.”

     나는 발을 내밀었고, 곧 공주가 내 발등 위로 살포시 맨발을 얹는다.

     “그들이 반한 건 지브롤터 변경백의 권력, 핏줄의 축복으로 빚어진 외모, 매국노로서 3대가 놀고먹어도 남을 재산이었으니까요.”

     “하나 더 있던 걸로 아는데~”

     “그걸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까? 제일 잘 아시면서.”

     “히히힛.”

     공주가 키득거리며 몸을 바싹 붙인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저를 원하시는 건가요?”

     “예. 피를 뒤집어쓰고 송장 하나 치르고 나니, 몸이 좀 쑤셔서.”

     “이런. 어떻게 하나. 그러면 저라도 풀어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흠?”

     바람이 분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하얗기만 하던 세상에 붉은 바람이 휘몰아친다.

     “이건….”

     “쉿.”

     공주가 내 입술 위로 검지를 얹는다.

     “무시해요.”

     “…….”

     “뭐 어때요? 이곳은 꿈인데. 백작님이 필요해서 저를 부른 거잖아요? 백은까지 써가면서.”

     공주가 그대로 한 손을 내 목뒤로 휘감으며 얼굴을 가까이한다.

     “백작님은 자기가 필요하면 저 같은 사람도 마음대로 다루는 그런 사람이었던 걸로 아는데.”

     “…이번 생은 좀 다르게 살려고 했더니.”

     나는 공주의 허리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공주님?”

     “언제는 안 그런 것처럼-”

     

     나는 그대로 공주를 모래사장으로 쓰러뜨린 뒤, 공주의 입을 막아버렸다. 

     * * *

     지브롤터, 백작 저택.

     “누아르와 레타르를 잘 보살펴주시오.”

     “네, 백작님.”

     백작 부부는 손을 잡고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대도 은연중에 느꼈겠지만, 그레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오.”

     “네. 평범을 넘어…특출나죠.”

     “그렇기에 나는 그레이에게 많은 걸 맡겨볼 생각이오. 이미 그레이는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했으니.”

     “…너무 큰 짐을 맡기는 게 아닐까 합니다만.”

     “그레이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지겠다고 한다면, 괜히 우리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지.”

     백작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는 하인들에게 잠시 시선을 보내자, 하인들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지브롤터가 어떠한 쪽으로 날개를 꺾든, 그레이는 우리의 장남이자 후계자요.”

     “하아….”

     “부모의 품을 스스로 걷어내고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려고 하지. 그레이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그늘이 아니라-”

     “정말 그럴까요?”

     그레이의 방문 앞에서, 백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이인데.”

     “지브롤터의 아이지.”

     “…그렇다면, 백작님께서 아버지 역할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백작 부인은 자조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어머니로서….”

     “그만.”

     백작은 백작 부인을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렸다.

     “당신이 무엇을 했든, 당신은 죄가 없소.”

     “백작님….”

     “그레이를 일깨운 건 나의 선언이었지,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잘못이 있다면 그 쓰레기에게 있지.”

     “…….”

     백작은 한참 부인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그레이가 위태로울 때 도와주는 것이오. 부모로서, 그리고 백작과 부인으로서.”

     스륵.

     백작이 문을 열었다.

     경첩 소리 하나 없이,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하나 없이 방문이 열렸다.

     새근, 새근.

     암막 커튼이 햇빛을 차단하는 침대의 위, 회색 머리칼의 소년이 깊게 잠들어있다.

     소년의 옆에는 다 틀어간 램프만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방은 지극히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

     “그레이가, 아버지를 믿고 저렇게 깊게 잠들었나 봐요.”

     혼자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하인을 물리고 잠을 잔다.

     아마도 백작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또 다른 납치범이 나타나더라도, 백작이라면 바로 눈치를 채고 달려와 줄 거라는 믿음.

     “…최소한 소드 마스터로서는 신뢰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구려.”

     “저기, 백작님.”

     백작 부인은 곤히 누워있는 그레이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매국노가 되겠다고 선언을 하며 잔을 든 날로부터,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정말이지, 행복해 보이는군.”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는 그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 * *

     “…….”

     얼마나 잤을까.

     백은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꿈도 짧았지만, 확실히 피로는 풀렸다.

     “끄으응…!”

     이불 안에서 기지개를 켠다.

     “아악…!”

     동시에 온몸이 쑤신다.

     특히 허리가.

     “근육통이….”

     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침입자를 제거하면서 집중한 나머지, 운동신경을 과하게 사용하여 생긴 문제니까.

     ‘백은에 몽마의 가루가 섞여 있어서 그런가. 서큐버스가 따로 없다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 근육통의 원인이 다른 쪽에 있는 것 같을까.

     “…하.”

     나쁘지 않다.

     ‘백은을 확보해야겠어. 하급이기는 하지만 제국 걸 확보하든, 아니면 내가 만들든.’

     아이의 몸으로 겪는 여러 문제-매국노 그레이였을 때 누렸던 것들에 대한 결핍.

     꿈속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면, 최소한 그게 현실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겠지.

     ‘사기네.’

     부작용은 꿈에서.

     이득은 전부 현실에서.

     “…….”

     그리고 오직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이 시간대에 과거의 그녀가 존재해도, 내가 아는 그녀는 아니기에.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까.’

     촤르륵.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는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햇볕의 따스함이 전신을 휘감는다.

     “날도 밝았으니….”

     지금부터.

     “땅부터 보러 가볼까.”

     당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철근을 빼돌려, 시설을 만들고, 아이들을 모은 다음….”

     스읍, 하아.

     ‘약 좀 많이 만들어야겠네.’

     지하실에 연금공방을 만들어, 몸에 좋은 약을 좀 만들어야겠다.

     “다음에는….”

     오늘따라.

     “…무조건 이긴다.”

     더 상쾌한 기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권 끗

    최대 30편마다 1권 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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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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