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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괴인족장의 저주 때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여타 귀족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는, 가족을 제외하고선 전속시녀와 겔우드 외의 인간과 교류해본 적이 없는 르미앙이 귀족사회의 악랄한 뒷면을 알 리 없었다.

       

       물론 겔우드 경과 아버지께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릴적부터 체득하며 살아온 이와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인 이의 간극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와… 여, 여기가 왕립 아카데미라니…!’

       

       르미앙에겐 그저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을 뿐.

       

       “호호, 그렇게 좋으세요?”

       

       지금은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난 전속시녀, 로니카와 함께 왕립 아카데미에 도착한 르미앙은 난생 처음 해본 고된 여정길이었음에도 그 피로가 단숨에 씻길 정도로 기뻤었다.

       처음 와본 낯선 곳, 아카데미 교정의 풍경은 온갖 설레임으로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응! 정말 최고야!”

       

       곧바로 치뤄진 입학식.

       수많은 귀족가 도련님들과 아가씨가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되게 많다….’

       

       족히 100명은 되어보이는 생도들.

       그 사이에 주눅든 채 서있던 르미앙이 교장을 따라 선서를 읊었다.

       우렁차게 말이다.

       

       “선서! 제 1절! 배움에 있어선 신분의 귀천이 없으며, 신성한 학문 아래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르미앙은 그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저주 탓에 신분을 숨겨야 했던, 자작 이상의 신분으로 위장하기엔 발각의 위험이 커 어쩔 수 없이, 이름 한번 못 들어봤을 어느 변방 영지의 어느 남작영애가 되어야 했던 르미앙에겐 최고의 선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교수님! 질문 있어요!”

       

       르미앙은 선서 제 1절을 따라 신분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움에 임했었다.

       너무 기뻤다.

       늘 독학과 고민으로 배워야 했던 지난 날과 달리, 이젠 의문을 단숨에 풀어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 누구보다 강의 시간에 열정을 다했으며, 방과 후에도 의문이 생긴 것들에 대해선 서슴없이 교수를 찾아가 해소하곤 했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만 같았다.

       지지부진했던 지난 날들이 보상을 받듯, 학문의 발전이 날개를 펼치고선 순풍을 탄 것이다.

       강의 시간엔 제일 앞줄에 앉았으며, 교수님의 질문에 늘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응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귀족사회의 어두운 면을 속속히 알지 못 했던, 신분의 귀천을 두지 않는다는 선서가 부질없는 맹세임을 알지 못 했던 르미앙이 데론 무리의 눈총을 사버린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아니꼽다는 이유로, 이름도 못 들어본 어느 변방 영지의 남작영애가 강의 시간에 감히 나댄다는 이유로 모진 학대가 시작된 것이다.

       

       “건방진 년 같으니. 출신이 천하면 적당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왜… 왜 그래. 우리 모두 선서했잖아….”

       “푸하하! 선서? 그게 뭔데?”

       “나, 난 그냥 배우는 게 좋아서…”

       “그래? 그럼 오늘부터 우리한테 배워라.”

       “뭐를…?”

       “인생 공부, 썅년아!”

       

       퍼억!

       퍽!

       

       “꺄악!”

       

       매일 같이 교정 뒤편의 공터로 끌려가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얼굴에 멍이 들고 목에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연고를 발라주지 않았고 그렇게 3년간 식고문과 술래잡기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 괴롭힘을 당했던 그녀였다.

       

       “큭큭. 잡히면 뒤지는 거다. 얼른 도망치라고.”

       “제발… 그만….”

       

       확!

       

       “꺅!”

       “썅년이, 그만하든 시작하든 그건 우리가 정해. 알겠어? 자, 그럼 10초 준다. 잽싸게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고작.

       고작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렇게 당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르미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멍든 얼굴로 강의실 제일 앞줄에 앉아 최선을 다했고, 아픈 몸을 이끌어 연구와 실험에 매진했었다.

       그것이 그들의 분노를 더 크게 부를지라도, 그 열정과 아집이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올지라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우수 장학생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었다.

       

       그리고.

       

       “씨발. 그러니까 그 영광 좀 우리에게 나눠주면 된다니까?”

       

       데론 무리 또한 우수 장학생이 되었고, 그렇게 수석 졸업생이 됐었다.

       수석 졸업생, 그런 것들보다 그저 배우는 게 좋았던 르미앙이었기에 억울하지 않았었다.

       그저 3년의 과정을 끝으로 교정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웠을 뿐.

       

       “큭큭. 이제 이 지긋한 악연도 끝이구나? 후련하겠어? 에린시아?”

       “이제 우리 안 봐도 되서 좋잖아. 웃어봐. 큭큭.”

       “잘 살아라. 3년 동안 우리가 가르쳐준 인생 공부, 까먹지 말고.”

       

       그것이 끝이었다.

       3년의 지옥이 그리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원통하지는 않았다.

       그들 말대로 후련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그렇게 북부령으로 돌아온 르미앙은 지난 날의 기억을 잊기 위해 더욱 연구와 실험에 매진했었고,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 했다.

       고통과 상처, 눈물이 그렇게 망각의 길로 사라져가는 듯했다.

       

       아니.

       

       후보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만 없었더라도 분명 사라졌을 터였다.

       그들의 이름을 본 순간, 불현듯 흉터의 욱씬거림이 시작되지만 않았더라면,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이 피어오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던 르미앙이었다.

       

       3년의 지옥은 쉬이 망각할 수 없으리란 걸.

       

       

       

       **

       

       

       

       “아, 저기 후보자들이 오는군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르미앙이 겔우드의 말에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카일을.

       그 뒤로 눈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블런드를.

       죽음의 술래잡기 이후, 늘 사색이 되었던 자신의 얼굴과 똑같아진 데론을.

       미소가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엘든과 반대 방향으로 갔기에 그들이 문양을 들고 오진 못 했을 터다.

       그저, 각 동굴마다 배치된 거대 몬스터에게 뒤쫓기다 지레 포기를 한 거겠지.

       의자에서 일어선 르미앙이 친히 카일을 마중나갔다.

       

       “호호. 일찍 돌아오셨군요? 어떠셨나요?”

       

       무서웠다.

       공포스러웠다.

       포기하겠다.

       그러한 답이 들려오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 보십시오! 대공녀님!”

       

       카일이 숨을 헐떡이며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북동쪽 800M 동굴에 있어야 할, 엘든 라펠리온이 들고 왔어야 할 대공가의 문양이었다.

       르미앙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

       “죽을 뻔했지만, 사투 끝에 제가 들고 왔습니다!”

       “….”

       

       곧이어 블런드와 데론이 도착했다.

       무언가 할 말들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저 카일의 뒤통수를 노려볼 뿐이었고, 르미앙에겐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 같은 건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참으며 카일에게 묻는 르미앙.

       

       “엘든… 엘든 공자는 못 보셨나요.”

       “예?”

       “그곳에 엘든 공자는 없었냐고요.”

       “그것은… 왜…?”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대공녀께서 기뻐하리라 여겼던 카일.

       가장 큰 점수를 하사하시겠다 하여 와일드 빅보어가 쓰러지자마자 문양을 탈취해 잽싸게 달려왔던 카일은, 예상과 달리 진노한 대공녀와 마주해야 했다.

       

       “어, 없었습니다만…?”

       

       르미앙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려오는 악인에게 한 여인으로서 고백까지 했었다.

       치욕스러워 꺼내들고 싶지 않았던, 차오르는 구역감 때문에 절대 쓰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방법을 쓴 것이다.

       한데, 북동쪽으로 향한 엘든 라펠리온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단 말인가.

       

       화가 났다.

       수치스러웠다.

       독려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고백까지 해냈었다.

       친히 아리엘 영애까지 찾아갔었다.

       하지만 또 다시 실패했다.

       물론 엘든이 노력했으나 실패한 건지, 노력조차 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예감상 후자에 가까웠다.

       그곳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자신의 고백을 거부하겠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치가 떨려왔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왔다.

       분명 성공하리라 여겼다.

       우승을 약속해 주었기에, 이번만큼은 최선을 다하리라 여겼다.

       그래야만 했다.

       회심의 독려책은 기필코 성공해 엘든에게 죽음의 술래잡기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알려주어야 했다.

       

       대체 무얼까.

       대체 왜 번번히 실패만 하는 걸까.

       

       속이 뒤집어져 천불이 들끓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구역감까지 참아가며 고백 쪽지를 적었건만, 결국 실패만 거듭한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대전제가 잘못된 걸까.

       정말 스스로 참회의 길을 걷기 위해 기권을 했다는 걸까.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는 없다고.

       

       “대, 대공녀님…? 그럼 2차 평가전은 제가 승리한….”

       “닥치세요.”

       

       카일의 조심스런 말에,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다.

       지옥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가문의 전통이자 신성한 축제인 혼약대전을 개인적인 복수심에 이용했다.

       그렇기에 기필코 성공해야 하건만, 엘든이란 뱀 한마리가 당최 손에 잡히질 않고 얄밉게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때.

       

       “…!”

       

       숲길을 걸으며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엘든이 보였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과일 하나를 우적 씹으며.

       그 꼴이 너무도 눈꼴 시려웠다.

       그 꼴이 너무도 아니꼬워 보였다.

       

       부들부들.

       

       당장이고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으나, 이 억하심정이 지난 3년간 자신을 바라보았던 데론 일행의 것과 같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씹으며 참는 르미앙.

       

       결국.

       

       

       콰직!

       

       

       카일이 가져온 문양을 바닥에 내팽개치고선, 걸음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부리에 부딪힌 문양이 산산조각나버린다.

       균열이 일고 있는 르미앙의 신념처럼.

       

       이어, 뒤늦게 출발지로 돌아온 엘든이 과일을 크게 베어물고선 얼어붙은 데론과 블런드의 뒤에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안 좋군요.”

       

       

       우적, 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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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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