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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방학을 맞이한 학교는 적막했다. 기지개를 켤 내일을 기다리는 양 학문의 요람은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모든 곳이 잠든 건 아니었다.

         

       학생회실에 인기척이 났다. 분홍톤 소녀가 의자에 앉아 기사단의 보고서를 들여다봤다.

         

       “교단인가요.”

         

       정장 차림의 악마가 같이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조사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닌가? 교단은 망한 지 얼마 안 됐어. 벌써 재건될 리 없다.』

       “교단이 구체적으로 뭐길래요?”

       『인격신을 부정하고 악신을 떠받드는 단체다. 인격신의 계시가 끊겼던 공백기 동안 급격히 세를 불리고 신전을 위협했지.』

         

       파스텔은 악마를 따라 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종교 다툼이에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 하지만 다르다. 교단은 악신을 떠받들지만 종교 집단이 아니라 사익 단체에 가까워. 악신과 대가를 주고받으며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살인도 테러도 가리지 않는다.』

       “신의 윤리적 말씀을 따르기보단 악신의 세속적 계약을 따르는 집단이라는 거군요. 본인들 부귀영화를 위해서요.”

       『맞다.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야.』

       “헤에.”

         

       파스텔은 미묘한 표정으로 악마를 직시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곤 묘한 미소를 지었다.

         

       “교단의 활동은 악마 계약과 크게 다를 게 없겠네요. 악마가 요구하는 걸 들어주고 본인은 사악한 힘을 얻는.”

       『동화적으론 그렇지.』

       “헤에.”

         

       파스텔은 악마를 콕콕 찔렀다.

         

       악마님은 그런 거 못 하시나아.

         

       사악한 힘 얻고 싶은데에.

         

       막막 칼질 한 번에 떠나는 비공정을 동강 내고 그런 거어.

         

       악마가 복잡미묘하게 내려봤다.

         

       『괜한 유혹에 빠져들지 마라. 널 파멸시킬 뿐이야. 견고한 힘은 성실한 노력 끝에 얻어진다.』

         

       파스텔은 급격히 뚱해졌다.

         

       완전 악마답지 않아.

         

       이럴 땐 악마 계약을 권유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됐어요! 악마님이 제 인생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건 항상 알고 있었죠! 이번에도 그럴 뿐이에요!”

       『뭐?』

         

       악마가 황당해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개는 습관부터 들이고 그런 말을 해라. 대충 구겨놓은 이불을 누가 정리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침대가요! 침대 친구는 저랑 사이가 좋아서 이불도 정리해 주거든요! 몰랐죠? 전 알았는데! 칙칙한 악마님은 친구가 없어서 그래요!”

         

       혓바닥을 내밀었다.

         

       베에.

         

       “흥!”

         

       파스텔은 홱 고개를 돌리고 깃펜을 휘갈겼다.

         

       교단, 교단, 교단, 교단, 교단.

         

       내 충실한 가신들을 죽게 만든 집단.

         

       그래 놓고 뻔뻔히 날 가지고 논.

         

       거친 휘갈김이 보고서를 더럽혔다. 잉크가 번지고 뒤엉켰다. 깃펜이 종이를 찢었다. 찢긴 보고서를 잡아챘다. 종이 찢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사악한 악신 숭배자들.”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파스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공기가 가라앉았다.

         

       악마가 뭔가 말하려다 관두고 손을 움직였다. 손이 분홍 머리를 눌렀다.

         

       시간이 흘렀다.

         

       파스텔은 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아침마다 이불 정리해 주시는 거 알아요.”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냥, 복수해야 할 상대들을 멀쩡히 보낸 게 너무 분해서……. 괜히 악마님께 화풀이했어요.”

         

       항상 도와주는 악마님께 무슨 무례인지.

         

       『괜찮다.』

       “죄송해요.”

       『괜찮아.』

         

       파스텔은 찢은 종이를 하나씩 주워 정리했다.

         

       “그때 싸우는 게 맞았을까요? 겁쟁이처럼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가주로서 복수를 감행해야 했던 걸까요?”

       『넌 이성적으로 판단한 거다.』

         

       고개를 저었다.

         

       “전 가주 자격이 없는 거 같아요. 왜 저 같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죽은-”

       『어린 크래프트.』

         

       손길이 분홍 머리를 쓰다듬었다.

         

       『삶에 스스로를 잃지 마라. 결과는 네 선택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자책하기엔 인간은 세상 앞에 무력해. 넌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 단지 시기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지. 다음을 노려라. 기회는 많다.』

         

       으아.

         

       악마님의 친절한 조언.

         

       이것이 악마의 속삭임?

         

       악마 계약을 못 했다면 악마의 속삭임에라도 의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거 같다.

         

       파스텔은 일부러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힘껏 외쳤다.

         

       “알겠어요!”

         

       양팔을 번쩍 들었다.

         

       “호르몬 친구! 우리 같이 복수를 기다려 보자! 강약약강끼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혼자 도망치지 말고!

         

       아자아자!

         

       죽일 수 있다!

         

       아드레날린이 뿅뿅 분출됐다.

         

       호르몬 친구가 호응하듯이 대답해 왔다.

         

       그래! 다음번엔 상대를 토막 내자! 사지를 자르는 거야! 아자아자!

         

       오잉.

         

       믿음직한 답변.

         

       오예.

         

       파스텔은 양볼을 짝짝 쳤다.

         

       할 수 있다!

         

       악마를 돌아봤다.

         

       “악마님! 악마님! 우리 이렇게 된 거 밀무역을 열심히 하죠! 돈을 왕창 모아서 세력을 기르고 사악한 교단을 쓰러트리는 거예요!”

         

       분위기에 맞춰서 호응해 줘야 할 악마가 순간 머뭇거렸다. 껄끄러운 단어가 뜬금없이 등장하니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으에에?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악마님? 저 사악한 교단을 쓰러트리지 못하는 거예요? 정말요?”

         

       으에에?

         

       악마님은 호르몬 친구보다 못한 거야?

         

       악마가 황급히 호응했다.

         

       『물론 쓰러트려야겠지. 넌 할 수 있다.』

         

       손길이 분홍 머리를 토닥였다.

         

       토닥토닥.

         

       파스텔은 손길을 느끼다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밀무역을 잘할 수 있어요!”

       『아니.』

       “악마님도 긍정한 밀무역! 열심히 하겠습니다!”

         

       악마의 말문이 막혔다.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파스텔은 그 모습을 보고 뿌듯해졌다.

         

       좋아.

         

       악마님이 당혹스러워하는 걸 보니 기분이 확실히 좋아지네. 우울감이 날아갔어.

         

       이게 말괄량이의 희열이려나?

         

       헤헤.

         

       배덕감 은근 기분 좋다.

         

       파스텔은 웃다가 깃펜을 잡았다.

         

       기분 환기가 됐네.

         

       새 종이를 꺼내 글을 적었다.

         

       방학 동안 할 일이 차분히 적혔다.

         

       먼저 할 건 기숙사 신축을 틈타 지하에 있을 마왕의 유산을 확보하는 것.

         

       마왕의 유산?

         

       얼마 전까진 마석 복제를 원했지만 마음이 변했다.

         

       마석 복제보단 호르몬 친구가 좋아할 만한 게 있으면 좋겠어.

         

       예를 들어.

         

       전기톱 같은 거!

         

       톱날 부와앙~!

         

         

         

       #

         

         

         

       “지하통로요?”

         

       공사 담당자와 함께 걸었다.

         

       “바닥을 드러내니 설계도에 없던 통로가 있어서요. 깊어 보여서 일단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아 그거요.”

         

       파스텔은 괜히 아는 척했다.

         

       “아시다시피 여기가 예전에 장교 양성소였잖아요. 군사 기밀이 좀 있어요. 일단 공사 중지해 주시고요. 저희 학생회에서 살펴보고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학생회 권한을 발동하곤 얼마 뒤 기숙사 신축 현장으로 갔다.

         

       기존 기숙사를 허물고 바닥만이 남은 상태였다. 담당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현장을 나갔다.

         

       파스텔은 혼자 남았다. 바닥에 덩그러니 있는 어둑한 지하 계단을 내려봤다. 쾌쾌하고 서늘한 공기가 맡아졌다. 물비린내가 났다.

         

       “무슨 시설일까요?”

         

       돌멩이를 슬쩍 던지자 소리가 울렸다.

         

       으아?

         

       울리는 걸 보아하니 상당한 넓이 같다.

         

       『군사시설이 아닌 거 같군.』

         

       파스텔은 대뜸 손을 모아 소리쳤다.

         

       “야호~!”

         

       소리가 울렸다.

         

       야호야호~.

         

       우왕.

         

       다시 소리쳤다.

         

       “파스텔은 똑똑하다~!”

         

       잽싸게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들려왔다.

         

       파스텔은 똑똑하당~.

         

       허억.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악마님! 악마님! 그렇대요!”

         

       파스텔, 완전 똑똑.

         

       지하시설 친구도 인정했음.

         

       악마는 잠시 말이 없다가 파스텔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다시 했다.

         

       『군사시설이 아닌 거 같다. 아마 장교 양성소가 세워지기도 전에 만들어진 하수도겠지. 그냥 파묻고 양성소를 세웠나 보군.』

         

       허억.

         

       우리 친구 하수도였어?

         

       미안 정정할게.

         

       지하시설 친구 → 하수도 친구

         

       오해를 풀었다.

         

       짝짝짝.

         

       『이곳은 엄밀히 말해 넓게 보면 마족의 성지다. 인간이 강탈한 뒤 조롱 차원에서 일부러 장교 양성소를 세웠지. 마족의 성지에서 교육받은 장교가 마계를 침공하는 꼴이니 말이다.』

         

       대충 듣던 파스텔은 멈칫했다.

         

       에.

         

       뭐 그런 흉악한 의도가.

         

       인간 완전 사악.

         

       『하수도 매립도 제대로 안 하고 굳이 양성소를 세웠나 보군. 유산이 여기 있는 이유도 알겠어. 마왕이 하늘섬 전쟁 중에 하수도 어딘가 숨겨뒀겠지.』

         

       파스텔은 도덕적으로 격분했다.

         

       “인간 정말 나쁘네요! 저도 인간이지만 성지에 장교 양성소를 세우는 발상은 진짜 너무해요!”

         

       전쟁 중이긴 했겠지만 평화로워진 여태까지도 돌려주지 않고 아카데미가 다시 세워진 꼴 아닌가.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오래전이라 나쁜 사람은 묘지에 있겠지만 혹시라도 만나면 제가 혼내줄게요!”

         

       빠샤빠샤!

         

       악마의 목소리가 복잡미묘해졌다.

         

       『그때 추진자가 크래프트였다.』

         

       오잉.

         

       가문의 사악한 내력을 듣게 됐다.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슬쩍 시선을 돌리고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고, 곤란.

         

       허리 숙이고 사과해야 할 거 같은 기분~.

         

       허리 숙이기 100단 파스텔~.

         

       『그보다 어서 출발하지. 공사를 계속 미루는 것도 안 좋아. 괜한 시선을 끌 거다.』

       “앗, 네!”

         

       파스텔은 후다닥 진입했다. 어둡고 긴 통로가 이어졌다. 축축하고 습했지만 구정물 자체는 증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깊이 들어가자 계단에서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바로 앞을 걷기 어려워졌다.

         

       쪼그려 앉아 가져온 기름 랜턴을 조작했다. 분홍톤 소녀가 잘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랜턴을 만지작댔다.

         

       만지작만지작.

         

       잉.

         

       아! 여깄다!

         

       랜턴에 붙어 있던 부싯깃과 부싯돌을 찾아 꺼냈다. 부딪히자 불씨가 튀었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기름 묻은 심지에 옮겨 붙일 수 있었다.

         

       랜턴이 밝아지고 통로가 은은히 비쳤다.

         

       “후우.”

         

       파스텔은 괜히 이마를 훔쳤다.

         

       랜턴 완전 붙이기 어렵네.

         

       적성에 안 맞나봐.

         

       『……다음부턴 밝은 곳에서 불을 붙이고 들어와라.』

         

       허억, 천재인가?

         

       어쩐지 어렵더라.

         

       아하하.

         

       파스텔은 혼자 빵 터져서 웃고는 랜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둠이여 물러나라!”

         

       은은한 빛이 짱짱.

         

       우왕우왕.

         

       용사처럼 검을 들었다.

         

       “빛이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무엇이든 나오라 그래.

         

       울트라 짱짱 검술로 상대해 줄 테니!

         

       하수도를 탐험했다. 갈림길을 지나치고 미로 같은 이곳저곳을 돌았다.

         

       그리고 소원대로 무언가를 마주쳤다.

         

       어두운 건너편을 미지의 눈동자가 빼곡히 채웠다.

         

       오잉.

         

       랜턴을 들었다. 무릎 높이의 쥐가 통로를 가득 메운 광경이 펼쳐졌다. 무수한 눈동자가 파스텔을 바라봤다.

         

       우왕.

         

       안녕 찍찍이 친구들?

         

       나도 찍찍.

         

       너도 찍찍.

         

       우리 찍찍.

         

       호응하듯이 거대쥐 한 마리가 주둥이를 벌렸다. 피 묻은 앞니가 보였다.

         

       오이잉.

         

       우리 친구 맞지……?

         

       『보이는 눈동자만 수십인가. 최소 수백 마리는 되겠군. 도망쳐라. 쥐 떼는 자연재해다.』

         

       거대쥐 한 마리가 찍찍~! 하고 울었다.

         

       헉, 짱 귀엽.

         

       통로에 울음소리가 울렸다. 어둡던 통로 저 너머까지 무수한 눈동자가 돌아봤다. 눈동자 수백 개가 파스텔을 응시했다.

         

       헉, 안 귀엽.

         

       쥐 울음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통로가 진동했다. 검은 해일이 몰려왔다.

         

       “으아아!”

         

       파스텔은 뒤돌아 쏜살같이 달렸다.

         

       『어딘가에 유적 입구가 있을 거다. 찾으면 산다.』

         

       추격전이 시작됐다.

         

       파스텔 살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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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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