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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헉?!”

       

       문을 열고 들어간 키르린은 깜짝 놀라 다시 뒷걸음질치며 도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하, 하지만….”

       

       2황녀의 명령에 키르린은 완전히 얼어붙어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지금 2황녀는 창가에서 막 옷을 입고 있는 도중. 보고를 받기에는 굉장히 부적절한 타이밍이다.

       

       하지만 비단 키르린이 그것 때문에 당황하며 물러나려 한 것은 아니다.

       

       맨살이 드러난 황녀의 등 대부분이 끔찍한 화상 흉터로 뒤덮혀 있었다.

       

       일족의 숲에서만 살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세상으로 나온 키르린이 그것을 차마 똑바로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미안하군. 네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거기 서있지 말고 들어와라. 내 몸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흉한 게 아니라면.”

       

       여기서 물러났다간 결국 황녀의 몸이 흉물스럽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꼴.

       

       키르린은 어쩔 수 없이 쭈삣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섰다.

       

       그 사이 셔츠를 입은 황녀는 단추를 잠그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왼쪽 얼굴 절반을 잠식한 흉터 때문에 키르린은 단 하나의 시선을 마주했고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번에는 흉터 때문이 아니었다. 2황녀는 흉터로도 가릴 수 없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다만 키르린은 2황녀의 저 눈빛을 똑바로 감당할 정도의 배짱이 없었다.

       

       4년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해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혁혁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한 여자.

       

       아비의 뒷배경으로 얼떨결에 교장이 되어버린 키르린과는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그건 뭐지?”

       

       단추를 모두 채운 황녀가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을 걸치며 키르린의 손에 들린 결재판을 쳐다봤다.

       

       “이, 이건… 혀혀, 현안업무 보고… 보고서입니다….”

       “그래? 보고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뭐, 좋아.”

       

       의자에 앉은 황녀가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네가 준비했다고 하니 들어 보지. 가까이 와라.”

       

       황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키르린이 머뭇거리며 황녀의 옆에 섰다.

       

       미세하게 떠는 키르린을 올려다 보며 황녀가 낮게 웃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나.”

       “죄송합니다….”

       “보고해.”

       

       키르린은 떨리는 손으로 결재판을 황녀의 앞에 펼쳐 놓고 보고를 시작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보고의 내용은 올해 키르린이 새롭게 추진할 아카데미의 사업들.

       

       연초에 시행해하는 외부 특기생 선발부터 졸업예정자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외부 공모전과 자체평가, 그리고 채용 예정기관의 사전면접과 설명회 유치 등.

       

       자못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저 이렇게 노력할 테니까 제발 예쁘게 봐주세요’.

       

       그 속내를 모두 간파한 2황녀는 그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끝까지 보고를 경청했다.

       

       애초에 2황녀는 나이로만 따져도 키르린보다 몇 년이나 더 연상인 데다 직급으로는 몇 단계 위의 상사.

       

       키르린이 황제의 낙하산으로 교장이 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싫어할지언정 키르린 그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지금 2황녀의 눈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는 키르린의 모습이 그저 귀여울 수밖에.

       

       “모두 좋아. 네가 보고한 대로 추진해라.”

       

       보고가 끝나자 2황녀는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역시 너는 보고서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드는구나. 우리 안보실의 실무관들이 네 반만 해주어도 좋을 텐데.”

       “헛?! 가, 감사합니다…! 아얏!”

       

       갑작스러운 기습칭찬에 깜짝 놀란 키르린이 황망히 허리를 깊게 숙여 머리를 조아리다 그만 책상에 이마를 찧고 말았다.

       

       다크엘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언동이었지만 지금 키르린은 2황녀 앞에서 마치 태풍 속 갈대와도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군.”

       “말씀하십시오….”

       “그 동안 너는 내 명령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기에만 급급해 전투과목의 교육훈련을 소홀히 해왔지.”

       

       직설적인 황녀의 발언에 키르린은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뻥긋댔다.

       

       “하지만 오늘 보고한 내용들을 보니 아무래도 지난 과오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각오를 한 모양인데,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꾸게 된 이유는?”

       “아, 그게….”

       

       키르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디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과감하게 일을 벌이다 문제가 생겨도 디안이 자신을 지켜주고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키르린이 우물쩡거리자 2황녀가 턱을 괴며 물었다.

       

       “혹시 새로 부임한 전투수석교수 때문인가?”

       “엣…?! 아, 아닙니다!”

       

       2황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키르린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내저었고 그것을 본 2황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라고 치지.”

       “정말로 아닙니다, 각하….”

       “그래. 알았다.”

       

       고개를 떨구는 키르린을 보던 황녀가 물었다.

       

       “그런데, 디안 교수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전투수석교수는… 요즘 굉장히 바쁩니다. 안 그래도 어제는 브룬 고원의 야생마들을 직접 포획해 왔습니다.”

       

       키르린은 2황녀에게 디안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 야생마를 서른 마리 넘게 끌고 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 조성한 상점가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수석교수가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학생과 교직원들 모두 디안 교수를 좋아하고 있어요.”

       “거기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겠군.”

       “그렇습니지 않습니다.”

       

       키르린의 단호한 대답에 2황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 키르린. 오늘 보고는 잘 들었다. 돌아가서 네 본분에 최선을 다하라.”

       “알겠습니다, 각하. 그런데 저는 사실 호출을 받고 온 것인데….”

       “이미 내 용무는 끝났다.”

       “네…?”

       “그만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키르린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황녀가 두 번이나 돌아가라 명령했기에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보면서 황녀는 또 한번 웃음을 흘렸다.

       

       본래 황녀가 키르린을 호출한 것은 디안이 교수로 간 이후 키르린의 태도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

       

       만약 키르린이 이전과 다르지 않다면 황녀는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키르린을 갈아치우고 디안이나 라이너스를 교장으로 올릴 생각이었다.

       

       내년 초 특수임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최대 수요처는 2황녀가 거느린 안보실을 비롯한 예하조직들.

       

       어차피 각 조직에 선발된 학생들은 거기서 추가로 훈련을 받아 보다 완벽한 요원이 될 것이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에서부터 수준을 올린 상태여야만 한다.

       

       그래서 키르린을 호출했던 것이고 키르린과 대면한 2황녀는 마음 속 계획을 더 보류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키르린은 이전과는 다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디안 때문이겠지.

       

       디안이 아니고서야 키르린이 저렇게 극적으로 변할 특별한 계기가 최근 아카데미에서는 없었으니까.

       

       역시 라이너스 경의 친구라 이건가.

       

       그럼 당분간은 키르린은 내버려 두기로 하지.

       

       

       # # # # #

       

       

       “됐다, 됐다, 됐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키르린은 기쁨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떨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보고를 잘 했고 또 황녀님께서 처음으로 칭찬을 해주셨다.

       

       이게 다 디안 덕분이야.

       

       디안이 와서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바꿨고 나를 지켜주고 용기를 주었기에 이렇게 된 거야.

       

       정말이지 디안은…. 하아….

       

       키르린이 혼자 헤실헤실 웃으며 양볼을 감싸고 있을 때 마차는 아카데미 정문을 통과해 본청에 멈춰섰다.

       

       “어? 벌써 오셨어요?”

       

       마차문을 열자 마침 지나가던 디안이 멈춰서서 키르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디안…?”

       

       그의 얼굴을 본 키르린은  반가움과 애정이 가슴 속에서부터 북받쳐 올라 그만 디안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디안!”

       “켁!”

       

       비록 혼혈이지만 키르린은 다크엘프였고 그래서 그 도약은 상당히 날카로운 것이었다.

       

       “디안! 정말로 고마워! 나한테는 너뿐이야!”

       “왜 이래요?! 보는 사람도 많은데!”

       

       키르린이 가슴에 얼굴을 부비자 디안이 기겁하며 키르린을 떼어냈다.

       

       그제서야 키르린은 자신이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미친짓을 했다는 것, 그리고 디안의 뒤에 전투학과 교수들이 서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히익?!”

       

       모두에게 보여져 버렸다는 수치심에 키르린은 와다닥 뒷걸음질치다 마차에 등을 부딪혔다.

       

       그런 키르린을 전투학과 교수들이 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으며 빤히 바라봤다.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적으로는 모두 침묵. 할 말이 없거나 말하기도 싫거나 말문이 막혔거나.

       

       “검둥이 교장이 수석교수에게 번식할 것을 애둘러 제의했다.”

       

       그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침묵을 뚫고 오크 교수 브로그가 입을 열었다.

       

       “입 다물어라, 브로그.”

       

       모턴 교수가 낮게 말하자 브로그가 거기다 대고 또 뭔가 말하려 했다.

       

       “하하!! 정말 화기애애하니 참 좋아 보입니다!”

       

       그러자 생존교수 웨이버가 시끄럽게 웃으며 양쪽에 선 오렌디와 펠레미아의 어깨를 탕탕 때렸다.

       

       “얼마나 보기 좋아요. 그렇죠? 자, 그럼 우리는 먼저 가도록 합시다! 어서요!”

       

       교수들이 저만치 멀어지자 디안이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교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혹시 2황녀님께 잔뜩 혼나서 넋이 나가버리신 겁니까?”

       “그런 거 아냐! 나 칭찬 받았다고!”

       

       아까 황녀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흥분해서 재잘대며 키르린은 도로 디안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래서 내가 황녀님께 ‘제가 책임지고 이것들 완수해 보이겠습니다!’하니까 황녀님께서 ‘키르린 너는 정말 최고야!’라는 취지의….”

       

       정신없이 자랑하던 키르린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디안의 바로 앞까지 와서 까치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기생 선발을 하기로 하신겁니까?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거든요.”

       

       디안이 웃으며 키르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교장님하고 저하고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토, 통하는 게 있다고…? 거기까지는 아직이야!”

       

       디안을 밀쳐낸 키르린이 한번의 도약으로 이 층 교장실 테라스로 훌쩍 뛰어 올라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뭐야, 진짜. 오늘 왜 저래?”

       

       키르린이 사라진 테라스를 올려다 보던 디안은 구시렁대면서 저 멀리까지 가버린 전투학과 교수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본청 모퉁이에서 마야 사제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 #

       

       

       며칠 후.

       

       제국 곳곳에 특수임무 아카데미 특기생 선발공고문이 나붙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지사항에 전투학과 교수일동 일러스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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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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