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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1

        

         차마 내 입으로 말하는 건 뭔가 자랑 같아서 어색하지만… 아무튼. 어엿한 한 사람의 현역 기술자 용병으로서.

         그리고 나름 탄탄한 기반 실적과 높은 고객 평가 만족도를 보유한 해커, 바꾸기도 귀찮아서 그대로 사용하는 중인 코드네임 ‘아이보리’로 통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내가 말하건대.

         

         제일 간단하며. 동시에 겁나 확실하고, 효과적인 해커 대책은 처음부터 그냥 하드웨어나 네트워크 상에 아무런 전자화된 데이터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목표물을 훔치러 들어온 게 가상 세계에서 이름난 대도둑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낚아챌 대상이 없다면 남겨진 단서를 가지고 원래 얻어내야 했을 정보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거든.

         

         정 어렵다면… 단순히 종이 문서로 기록해서 정보를 보존하는 걸로도 해커를 충분히 엿 먹일 수도 있고.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구두로만 상의하고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는 건데….

         

         “…이 자식들, 처음에는 사내 메신저로 이러쿵저러쿵 떠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어. 내부 협의가 다 끝났나? 아, 이런 걸 찾을 줄 알았으면 시스템 감염에 시간을 좀 덜 투자하는 건데!”

         

         애당초 순서를 약간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다.

         

         상식적인 비유로 따지자면 시스템 원격 장악은 과정과 서술이 복잡한 주관식 문제고, 손님 명단을 슬쩍 뽑아내는 건 정해진 답을 고르는 객관식 문항이니까. 아무래도 거꾸로 푸는 게 맞았지. 음.

         

         아니, 저라고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처리한 건 아니랍니다?

         손님 명단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을 경우엔, 당연히 먼저 보안 자격을 덧씌우고(Override) 빼내는 편이 훨씬 더 안전했으니 변수를 신경 써서 선후를 나눈 건데 막판에 이런 걸 찾게 될 줄이야.

         

         “에라이…!”

         

         드드득!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삐끗했다는 불쾌감에 나지막하게 혀를 차자, 곳곳으로 뻗어 있는 내 전선 줄기들이 공명하며 건물 전체 시스템에 뒤숭숭한 진동을 남겼다.

         

         하. 평정, 평정심을 유지하자.

         

         사소한 감정 변화나 사고 자체가 전기 신호로 곧장 치환되는 공간이다 보니, 내 사소한 짜증도 전자기기가 일시적으로 오작동한다든가 하는 실제 괴현상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이것들이 뒤에서 하는 짓에서 구린내가 좀 진동을 하긴 해도, 척지고 뺨을 갈겨야 할 이유가 확정된 건 아닌 만큼 내가 먼저 나서서 남의 집을 뒤엎지는 말아야지.

         

         여기서 직면한 작은 문제는 그거다.

         대체 어떤 경위로 우리 경매장 친구들이 싹수없는 이중 명부를 작성했는지 죽치고 앉아서 알아볼 시간도, 이것들이 무슨 얘기를 나눌 때까지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내막이 정말 궁금하기는 한데 난 슬슬 다시 돌아가봐야 하는 몸인지라… 명색이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는 도중이니까 퇴실하는 타이밍에 맞춰 앞은 지키고 있어야지.

         

         그러니 이 이상은 우리의 의뢰인께서 바라신다면 따로 계속하는 걸로 하자.

         

         우선 찾던 명단 자체는 일반 참석자와 VIP 참석자 두 종류 다 다운로드 받는데 성공했겠다. 돌아가는 길에 시간대별로 휘발된 플래시 데이터들이나 좀 쉬엄쉬엄 복원하다 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으려나?

         

         흐으음…… 잘 모르겠다. 아님 말지 뭐.

         

         “프핫…!!”

         

         흐릿한 초점을 바로잡고자 머리를 부르르 떤다.

         

         가상 공간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아크로바틱한 잠수였다면, 돌아오는 건 물이 가득 찬 세면대에서 얼굴을 빼고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는 느낌이랄까.

         

         자료 유출(Data breach) 공작이 쉽다는 게 아니라 침투 작업에 비교하면 빠져나오는 게 더 저항이 적다고.

         

         뭐, 이것도 다 개인 경험에 기반해서 말하는 소감 같은 거라 내가 특수해서 그렇다 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만.

         

         – 합산 4.42초간의 다이브 종료. 들어오는 데이터 전송률과 속도 모두 안정적이며, 가설된 임시 라인 또한 견고하다 판단됩니다. 세부내역을 점검하지 않는 이상 저들은 그저 외부에서 누군가 실수로 이쪽 포트에 접속을 시도하다가 취소했다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래, 그 정도면 됐어. 겨우 얘들한테 덜미가 잡힌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놀랄 준비가 되어있기는 한데.”

         

         배전반 뚜껑을 원래대로 고이 돌려놓고 잠그는 제로를 구경하며, 샵에서 세팅한 게 무색하게 삐친 앞머리와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서 되돌렸다.

         

         능력을 쓸 때마다 발생하는 이놈의 정전기는 죄악이다 죄악. 스타일링을 망치는 주범 같으니라고.

         

         하여간 아침에 일어난 모양으로 되돌아가려는 머리는 미뤄두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능력의 진가는 은밀 작전보다는 대규모 공세에서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하나… 제로의 평가처럼 이건 또 나름의 재미가 확실히 있다.

         

         잠입 액션이나 퍼즐 풀이 등을 완벽하게 수행한 특유의 만족감?

         들키지만 않으면 그에 따른 부차적 갈등이나 충돌도 존재하지 않는다니, 역시 옛말에는 틀린 게 없다니까.

         

         “…좋아. 아주 잘 작동하네.”

         

         하도 얼기설기 이어 붙여 놓은 장치들이 많아서 사이버웨어의 외부기기 목록이 말도 안 되는 번호까지 확장되긴 했는데, 그래도 눈을 깜빡이자 정상적으로 시야 전환이 이루어지는 걸 확인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미스 헬레나께서 일부 직원들이 좀 과하게 친절한 것 같다며 외부에는 별이상이 없나 확인차 물어보셨습니다만. 어떻게, 요청하신 감시 체계가 잘 구축되었다 바로 전해드릴까요? –

         

         “어…… 혹시, 건물 내 원하는 곳은 대부분 다 엿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놨다 하면 내 정신머리를 걱정하려나? 그냥 언니가 부탁한 숙제를 굉장히 열심히 했구나~ 하고 적당히 납득하겠지…?”

         

         그냥 울타리는 아니고 드로이드의 키보다 높은 펜스(Fence)라고 해야 맞나?

         

         아무튼 그 너머로 시간에 딱 맞춰서 온 일반 손님인지, 아니면 ‘급한 연락’을 취한 다음에 방문을 결정한 VIP들인지는 몰라도 검은색 밴과 세단, 고급 택시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한 와중.

         

         분명 올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대체 언제 나온 건지, 건물 뒤에 옹기종기 모여서 흡연 타임을 가지는 건 시대불문 만국공통의 유구한 전통이라는 것처럼 포진한 인간들의 눈을 피해 제로와 소곤소곤 떠들면서 돌아가는데까지 성공했다.

         

         감히 꽤 괜찮은 수확이라 할 수 있는 전리품과 함께 말이다.

         

         

         

         “끄으응…….”

         

         알프레드 씨의 다듬어진 콧수염이 불만스럽게, 의뭉스럽게 좌우로 씰룩인다.

         

         물론 불만의 방향성은 내 솜씨에 대한 건 아니고, 그저 사이버웨어로 전송해드린 손님 리스트를 실시간으로 살피며 나온 반응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걸 빼 온 내 정성에 감동하신 게 아닐까?

         

         그리고 헬레나는… 똑같이 전송해줬으니 본인 사이버웨어 화면으로 보면 될 텐데, 왠지 굳이 나보고 설명해달라며 옆에 달라붙어서 머리와 드러난 귓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나도 조금은 멋 낸 부분이 망가졌다는 자각이 있어서 겁나 신경 쓰이니까, 자꾸 더듬어서 강조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저기 하베스트 플래닛 쪽이면 몰라도 여기 수도 쪽 기업들은 난 잘 모르니까, 얌전히 우리 동생의 식견에 의지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 나한테 그래 봤자 나도 그냥 보이는 대로 요약해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는 게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얘기인고 하면. 처음부터 참석을 예고했던 고객들은 그냥 다 유명한 부자거나 최근 명성을 높이는 신흥 자산가인데 반해, 나중에 부랴부랴 이름을 올린 것들은 대부분이 기업이나 벌처 펀드 소속 인물들이었다는 뜻이었으니.

         

         사이온 엘레먼트 랩, 금강 정비 공업사, 미츠바시蜜蜂 테크놀로지 등등에서 찾아온 부장이나 사외 이사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어딘지는 몰라도 아마 이들이 관심을 보인 중소, 중견 기업세 측 인물들이라 보면 되겠고.

         

         화이트 타이거 매니지먼트, 에보니 어드바이저즈, 뉴 밀레니엄 펀드…. 대충 이름만 들어도 헤지 펀드 냄새가 풀풀 곳에서는 시니어 어쏘시에이트…? VP? MD?? 묘한 직급으로 표기된 인원들이 줄줄이 찾아왔다고 되어있었다.

         

         관심이 폭발하는 건 둘째 치고 여기서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나마 이 무더기로 찾아온 무리 중에서도 5대 메가코프 관계자는 딱히 안 보인다는 거?

         

         하기야 내가 이상하게 엮일 사건이 많았던 탓에 일시적으로 난리였지, 가전 제품과 관련된 기업 숫자만 세도 수만에 달하는 게 밀집된 거대 도시인데.

         구태여 문젯거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아닌 이상, 일상 생활에서 메가코프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외로 더 상관할 일이 생기는 것 자체가 드문 게 정상이다.

         

         더군다나 이번 건은 나 때문에 촉발된 게 아니라 이 능글맞은 할아버지가 얻은 골동품이라는 게 핵심 쟁점인 게 반쯤 확실시되었으니, 거 이제는 좀 비밀을 알려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알프레드 씨, 뭔가 감추고 있으신 게 있다면 경호 업무에 지장이 생깁니다만.”

         “악의가 있으신 게 아니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것도 곤란한데요.”

         

         적당히 골라서 읽어준 손님들의 라인업만 해도 두 자릿수를 우습게 넘어가는 시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헬레나는 계약 파기를 염두에 둔 것처럼 날 감싸 안고 정색.

         

         아무리 속고 속이는 게 일상인 동네여도 그렇지, 기껏 잘 부탁한다는 투로 의뢰를 해놓고 이런 식으로 뭘 은폐하는 건 달갑지 않다는 감정을 담아 나까지 추궁을 시작하자 노인은 기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시치미 뗀다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닐세! 내가 가진 직함이라 해봐야 신용대출 캐피탈을 빼면 파라다이스와 얘기하려고 비슷한 사장들끼리 모여서 만든 금융인 조합장 딱지밖에 없다네! 이런 쪽 망나니들이랑은 애당초 명함조차 주고받질 않았다고!”

         

         – …미스터 알프레드의 얼굴 표정 분석을 바탕으로 해당 발언의 신뢰성이라도 평가할까요? –

         

         “글쎄, 말마따나 거짓말을 하시는 것 같진 않긴 해.”

         

         억울하다. 답답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미녀의 차가운 눈초리가 늙은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아느냐. 좀 봐 달라.

         

         노련하게 구실을 가져다 붙이는 솜씨도 좋으시지. 그가 별의별 자기 변호를 일삼던 와중에… 아주 짧은 순간, 멀리서부터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

         

         움찔한 건 나 혼자만.

         제로는 조용히 탐지 장치들의 출력을 높였고, 헬레나는 눈치 못 챈 척 능숙하게 매고 있는 끈을 당기는 걸로 칼집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상대의 의도가 묘하다.

         나나 헬레나, 군집한 제로는 과장없이 거의 시선 강탈 삼신기에 가까운 존재감을 보유하고 있다 생각하는데 상대는 그런 우리는 살짝만 살피고 곧장 경호 대상인 알프레드 씨에게 눈을 고정했다.

         

         사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알프레드 씨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오, 그보다 초점의 z축을 두 단계는 낮춰서 옆구리와 손 근처를 힐긋거리는데.

         

         그래봐야 거기엔 노인의 개인 소지품인 상자와 지팡이밖에 없었….

         

         ………잠깐만, 엥? 상자?? 뜬금없이 웬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계신 거지?

         

         아까 감정실에 들어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버릇처럼 빙글빙글 돌리는 지팡이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고 계시지 않았나?

         

         “저기, 그건 어디서 나셨어요?”

         

         그래서 나는 정말 어디까지나.

         과연 서비스가 좋다더니 여기 경매장에서 제공하는 기념품이나 사은품이라도 받으셨나… 하는 순수한 의문을 잠시나마 가지고 질문을 드렸다.

         

         물론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고.

         

         “어디서 나긴. 방금 막 금고에서 꺼내지 않았는감? 비록 자리에 없었어도 아가씨라면 그쯤은 눈썰미로 알아챌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주최 측에 안 맡기고 가지고 계시냐고요.

         

         보통, 경매라는 게 내놓아야 할 상품을 출품자가 직접 들고 다니다가 마술 쇼 마냥 제출합니까? 예??

         

         물욕 템을 그렇게 다 보이게 들고 있으면 진짜 없던 난장판도 생기겠네요 이 할아버지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린왕자 메타 On.

    죄송합니다. 병원 방문이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려서 마무리하고 업로드하는 게 늦었습니다.
    벌써 코로나 후유증으로 기침을 2달 반 정도 달고 살다가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안 나서 내원했는데, 이제는 천식이나 만성폐질환 환자가 들고 다니는 그 흡입기를 처방해주시네요.

    …완전 영화에서 나오는 중환자나 도핑 아이템 쓰는 거너가 된 기분이라 두근두근하다고 말씀드리면 존나 철없어 보이겠죠? 네, 마음속으로만 생각해두겠습니다. 히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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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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