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02

    밀림 속에 덩그러니 남은 제어실.

    그 안에서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콘솔에 달린 <긴급 폐쇄>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유압 실린더의 소리가 뿜어져 나오며 문이 닫히는 순간, 제어실의 문을 긁는 벨로시랩터의 발톱 소리가 들려왔다.

    긴급 폐쇄가 1초만 늦었어도, 저 랩터들이 제어실 내부로 들어올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어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흑.”

    이제 여자는 이 거대한 강철 덩어리 안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언제나 상냥했던 약혼자도, 여러 가지를 알려주던 선배도 모두 저 괴물들에게 죽어버렸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그런 걸까, 제어실 안은 전보다 훨씬 서늘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녀는 이 상황을 애써 긍정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공룡은 절대로 오브젝트 격벽을 뚫을 수 없어.”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밖에는 험악한 공룡들이 있는 데다가, 특급 오브젝트 ‘녹색 달’의 영역이라도 말이다.

    “여기서 버티면 분명 구조가 올 거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어실을 둘러보았다.

    컴퓨터와 모니터, 각종 기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제어실에 마련된 비상 오브젝트 발전기의 남은 작동 기한은 약 3개월.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지쳐있었다.

    여자는 바닥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라도 이 끔찍한 현실을 잊고 싶었다.

    그렇게 얕은 잠에 빠져들었던 여자는 갑작스러운 비상 경고음에 눈을 떴다.

    삐이익! 삐이익!

    여자는 잠기운을 서둘러서 몰아내고, 제어실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CCTV 화면들은 제어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랩터들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몇 CCTV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였다.

    “!”

    여자는 CCTV 화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면에 비친 랩터는 어딘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마치 뼈와 살이 녹아내려서, 뒤틀린 채로 굳어버린 것 같은 형상이었다.

    게다가 그 뒤틀린 랩터들이 제어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외부 감시 카메라를 물어뜯어서 파괴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짐승에 불과한 랩터들이 감시 카메라의 기능을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제어실을 환하게 비춰주던 모니터가 차례차례 어둠 속에 잠겨나갔다.

    하아. 하아.

    여자는 안전한 격벽 내부에서 보호받고 있었지만, 이유 모를 공포에 잠식되어 점점 숨소리가 가빠졌다.

    결국 모든 감시 카메라의 화면이 꺼져버렸다.

    마치 한순간에 장님이 된 것 같았다.

    랩터들의 울음소리.

    외벽을 발톱으로 사정없이 긁는 소리.

    보이지 않지만, 랩터의 존재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희미하게 제어실 내부를 밝혀주고 있던 천장 조명등이 불안하게 깜박거렸다.

    “설마 전선이?”

    여자가 깜짝 놀라서, 제어실 콘솔을 확인하는 순간.

    제어실 화면에 붉은빛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비상 발전기 오프라인>

    녹색 달에 의해 뒤틀리면서 부서진 외벽 틈새로 전선이 노출되었던 걸까, 제어실과 발전기를 연결해 주던 전선이 끊어져 버렸다.

    최소한의 시스템 유지를 위해 비상 배터리를 사용하기 시작한 제어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추위도 같이 내려앉았다.

    어둠, 공포, 추위.

    여자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곧 구조가 올 테니, 괜찮을 거야.

    코끼리가 밟아도 멀쩡한 외벽이니까, 괜찮을 거야.

    외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지만, 여자는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추위와 공포에 몸을 웅크리고 얼마나 버텼을까, 어느새 랩터가 모두 사라진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귀가 먹먹한 적막 속에서, 여자의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고요 속에서 붉게 점멸하는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삐익!

    흐릿한 잠결 속에서 여자는 제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거지? 

    설마 다른 생존자가 제어실에 도착한 걸까?

    여자가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자, 열린 제어실 문 너머로 어딘지 애매모호한 실루엣이 보였다.

    인간도 아니고, 공룡도 아닌, 그 무언가.

    ‘홍채 인식 보안 문을 어떻게 연 거지?’

    여자의 뇌리에는 당연한 의문이 잠시 떠올랐지만, 그 실루엣의 중간에는 억지로 접합한 것처럼 보이는 선배의 머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

    우주 정거장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정글.

    나는 그곳에서 괘씸한 고기를 마구마구 내려치고 있었다.

    퍽. 퍽. 퍽.

    내 키에 두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검은 사신 대검으로, 퍽퍽.

    검은 사신들을 뭉쳐서 만든 갑옷의 근력 보조를 받으며, 퍽퍽.

    부족한 운동 신경 때문인지, 날카로운 검날로 베어내기보다는 넓은 검 면으로 고기를 내리치고 있었다.

    ‘이런 건 티라노가 아니야!’

    내가 내리치고 있는 것은 정글에서 조우한 첫 공룡.

    티라노사우루스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티라노는 내가 싫어하는 티라노였다.

    두툼한 입술이 달리고 깃털이 돋아난 데다가 뱃살이 볼록한 티라노는 그야말로 죄악의 증거였다.

    티라노의 몸에서 희미하게 인간의 피 냄새가 나서 그런지, 미니 사신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쌩겨써!’

    그저 못생긴 티라노를 보며 히히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티라노가 완전히 다진 고기가 되어버리자, 나는 그제서야 몸에 힘을 빼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렇게 바닥에 누워보니, 정말로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진짜 행성이 되어버렸네.’

    분명 밖에서 볼 때는 우주 정거장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거장을 잠식한 녹색 달이 점점 크게 보였다.

    그리고 그 녹색 달이 정거장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크게 보이는 순간, 녹색 달은 우거진 정글을 가진 행성처럼 변해버렸다.

    ‘행성 규모 공간 침식은 처음 보네.’

    그렇게 하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미니 사신들이 모여있는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엄마!’

    그리고 황금 사신 하나가 나를 향해 빠른 걸음걸이로 달려왔다.

    ‘모자!’

    시선을 돌려서 확인해 보자, 행복해 보이는 황금 사신이 보였다.

    조그마한 공룡이 황금 사신의 얼굴을 물고 있었다.

    작은 도마뱀만 한 공룡의 날카로운 이빨이 흉흉해 보였지만, 물리 면역인 황금 사신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저 신기한 모자를 얻었다며, 히히 웃을 뿐이었다.

    다른 황금 사신들도 새로운 모자가 부러웠는지, 꽤 많은 수의 작은 공룡들이 황금 사신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였다.

    작은 공룡들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흘리며, 황금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리고 황금 사신의 머리를 꽉 물지 않아서, 모자가 되지 못하는 미니 공룡들은 모두 살처분되었다.

    ‘황금 사신들은 인간에게 명백히 해로운 동물들에게는 가차 없구나.’

    내가 공룡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황금 사신이 미니 공룡 모자를 쓰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검은 사신 갑옷을 갖춰 입고, 거대한 대검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의지를 뿜어냈다.

    ‘못생긴 티라노의 멸절!’

    ‘멸절!’

    그러자 미니 사신들도 해맑게 웃으며 의지를 뿜었다.

    투방투방.

    뚜방뚜방. 뚜방뚜방.

    그리고 나와 미니 사신들은 공룡이 가득한 밀림을 향해 걸어 나갔다.

    ***

    거대화한 괴생명체, 밍밍이의 품속에서 여자는 따뜻하게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작아진 밍밍이를 품에 안고 밍밍이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정글을 거닐었다.

    ‘밍밍이는 도대체 어디로 인도하는 걸까?’

    밍밍이에게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조금 답답한 기분이었다.

    “밍!”

    가끔 밍밍이가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자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그런 생각을 애써 밀어내 버렸다.

    ‘그나저나 밍밍이는 오브젝트일까? 그냥 동물일까?’

    여자가 생각할 때, 밍밍이의 오브젝트 여부는 꽤 중요했다.

    밍밍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갈림길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육성으로 ‘밍밍아!’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만약 오브젝트라면 큰일이 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애써 참고 있었다.

    사실 눈에서 황금색 빛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오브젝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완전히 난장판이 된 제어실이 보였다.

    새하얀 외벽에는 말라붙은 핏물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흐릿하게 남은 혈향이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품속에 있던 밍밍이가 갑자기 거대화하더니 막아섰다.

    “밍!”

    그러자 제어실에 정신이 팔린 여자의 눈에도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정글의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생긴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공룡과 인간을 아무렇게나 합쳐서 마구잡이로 주물러놓은 것처럼 생겼다.

    그 끔찍한 형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그것의 머리통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히 돋아난 입 속에는 어딘지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 튀어나와 있었다.

    제임스 우주 정거장 제어실에서 근무하는 동료의 얼굴이었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어서 와. 오랜만이네.”

    “어서 와. 오랜만이네.”

    그 머리통에서는 그 동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음화 보기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