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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4

       빼앗은 섬마다 석산이 피었다.

       

       “여, 여긴 알케티아…. 458대대는 전멸이다. 반복한다. 458 대대는 전멸…… 커헉!”

       

       길라흐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도련선을 차례로 수복했다.

       

       그때마다 정령마도사가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누군가는 사지가 잘렸고, 또 누군가는 머리가 날아갔다. 살아있을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한 자들도 한무더기였다.

       

       “씹는 맛도 없는 버러지들이로군요.”

       

       은발의 엘프, 길라흐는 혀를 차며 갈고리를 짓쳐 세웠다.

       

       “으, 윽….”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계열의 광택을 내는 갈고리 사이로 핏물이 뚝뚝 흐른다.

       

       쑤욱!

       

       갈고리를 아래로 빼내자 통신병의 명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알케티아 섬의 마지막 생존자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인간과 엘프를 제거하면 남은 건 정령뿐이다.

       

       계약자를 잃은 정령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들었으나, 한낱 쥐가 독사를 이길 수는 없는 법.

       

       모두 길라흐의 갈고리에 꿰뚫리고 말았다. 

       

       “재미가 없단 말이죠.”

       

       옥구슬처럼 줄줄이 꿰인 영체들은 제 주인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 전장이 사라지고 나면, 군기는 그가 타고 온 전함과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길라흐는 이 작업을 벌써 며칠씩이나 반복했다.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부관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비 섬에 상천이 있다고요?”

       “틀림없습니다. 그곳에서 무언가 수상한 것을 연구하고 있다는 정보가…….”

       “그런 중요한 정보가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길라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그곳으로 이동합시다!”

       “하지만 마왕님께선 수도를 우선하여 함락시키라고….”

       “멍청하긴요! 배신자는 항상 제거 대상 0순위인 거 모릅니까?”

       

       수도 공격보다 에테르의 목을 가져가는 것이 우선이다.

       

       설령 메르헤름을 함락하지 못하더라도, 그녀를 주군 앞에 데려다 놓기만 한다면 꾸중보다는 칭찬을 들을 테니까.

       

       “애초에 수도를 공격하라 명하신 것도 그 배신자 년을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몇 가지 계산도 깔려있었다.

       

       마왕님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고, 상천이 위험한 걸 연구하는 걸 막으며, 겸사겸사 꼴도 보기 싫었던 년을 혼쭐낼 수도 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마 군 간부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지는 않겠지요?”

       “그, 그렇군요. 숙지했습니다.”

       “……뭐, 좋습니다. 당장 방향을 바꾸세요.”

       

       그렇게 부관이 바깥으로 헐레벌떡 나간 뒤.

       

       “으흐흐흐.”

       

       길라흐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기다려라, 에테르.

       

       네년은 반드시 이 몸이 매장해 줄 테니까 말이야.

       

       

       **

       

       

       “안 좋은 소식입니다.”

       

       나는 제국과 엘프국, 양국 정부 인사들을 불러놓고는 짤막한 회의를 열었다.

       

       “길라흐가 수도에서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빠르게 남하하고 있습니다. 목적지는 여기, 아이비 섬이고요.”

       

       예상대로 돌아오는 반응은 영 좋지 못했다.

       

       레너윌 공작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짚었고, 경호실장인 카리나 씨는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처럼 파르르 떨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죠?”

       “뭘 어쩌긴 어쩌겠습니까. 싸워야죠.”

       “하지만 병력이 부족해요. 주력군은 수도 해안선을 방어하는 데 전부 투입됐고….”

       

       병력 부족이라. 참으로 뼈아픈 문제였다.

       

       이게 다 내가 만든 원자폭탄이 초래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원폭이 떨어진 곳은 육지뿐만이 아니었다. 마왕은 길라흐에게도 재량을 주었다.

       

       그리고 그 미친 새끼는 자율권을 받자마자 남부 해안 요충지에 무호흡 딜링을 시전했고.

       

       “주인… 장관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클라이스가 손을 슬쩍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흑주 완성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흑주의 완성이라.

       

       “일주일 정도면 시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고온 초전도체가 완성되었으니 남은 건 이론에 맞추어 스크롤을 조립하는 것뿐이었다.

       

       그 과정은 넉넉히 잡아서 일주일 걸린다. 조금 속도를 내면 닷새 정도에 끝낼 수도 있겠고.

       

       “호천의 군대가 올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았죠?”

       “지금 속도로 계산하면 나흘 내로 도착할 듯합니다.”

       

       결국 하루 정도 더 버텨야 한다는 건데.

       

       “…….”

       

       생각을 마치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흑주 개발의 전권을 아카샤에게 넘기겠습니다.”

       “잠깐, 뭐?”

       “카샤,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어. 청사진은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공정을 총괄해.”

       

       어쨌거나 흑주는 거대과학이다.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지.

       

       아니, 할 수야 있지만 여럿이서 하면 더 일찍 끝난다.

       

       고독하게 연구했던 과거라면 몰라. 지금은 훌륭한 인재를 수십 수백 명이고 부릴 수 있는 신뢰와 권력이 있다.

       

       그리고 아카샤는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틀림없이 잘 만들어 주리라.

       

       “그러면 너는 뭐 하려고?”

       “나는 레니냐를 데리고 잠깐 이 대륙을 벗어날 거다.”

       “뭐?”

       “다들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수도를 공격하던 마왕군이 진로를 이런 좁디좁은 섬으로 바꾸었는지를.”

       

       답은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었다.

       

       “다 저를 잡기 위함입니다.”

       

       흑주 개발을 방해하려고 하든, 단순히 길라흐가 배신자인 내 면상을 보러 오는 것이든.

       

       결국 상천 에테르를 경계해서 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길라흐가 도착하는 즉시, 레니냐를 포함한 소수 인력만을 데리고 잠시 남쪽 대양으로 가 있겠습니다. 무전으로 좌표를 부를 테니 로즈마리를 통해 진을 배치해 주시길 바랍니다.”

       “…과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버멜. 공간이동진의 제작은 네가 맡아서 해.”

       

       버멜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시선이 슬쩍 위를 향했다.

       

       버멜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치녀가 한 명.

       

       바람의 정령왕인 에어리얼이었다.

       

       버멜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양인데. 저 정령왕이 도와줄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버멜, 잠깐만 이리로 와 봐.”

       “……?”

       

       나는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각을 하나 꺼냈다.

       

       육면체로 된 각을 열자 그곳에는 반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사파이어처럼 푸른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에메랄드빛이었다.

       

       각각 ‘포말의 반지’와 ‘창공의 반지’라고 불리는 물건.

       

       예술제 때 부상으로 받은 네 개의 반지 중 로테와 프레이에게 하나씩 주고 남은 나머지 두 개였다.

       

       그중 창공의 반지를 꺼내 버멜에게 내밀었다.

       

       “받아. 전에 이런 거 원한다고 했지?”

       “어? 응.”

       

       창공의 반지에는 정령의 가호를 지속시키는 힘과 정령마도의 위력을 배가해 주는 증폭 회로가 달려있다고 한다.

       

       과거 데리고 다니던 정령이 없었을 적이라면 줘 봤자 쓸모가 없었겠지만, 에어리얼이 딱 붙어 다니는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그때 못 주었네. 지금 생각난 김에 받으라고.”

       

       버멜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반지를 가져갔다.

       

       “…….”

       “뭐 해? 안 끼우고.”

       

       머뭇거리던 걸 일갈하자마자 마지못해 왼손 검지에 반지를 끼우는 버멜. 

       

       “하아….”

       “후우.”

       “아.”

       

       갑자기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마치 세상만사 아쉬운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양국 인사들.

       

       [뿌우….]

       

       심지어 저 치녀… 에어리얼도 볼을 빵빵하게 불리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왜 이래.

       

       

       **

       

       

       작전은 전부 세워 두었다.

       

       그때까지 아주 조금이지만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레니냐에게 전투마도의 응용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기로 결심했다.

       

       “으학…!”

       

       로즈마리를 망치질 몇 번에 때려눕힌 것과는 별개로, 레니냐는 내 앞에서 그다지 맥을 추질 못했다.

       

       “괜찮니?”

       

       “그럭저럭, 이요….”

       

       레니냐의 손을 잡아끌어서 일으켜 세웠다.

       

       힘 조절을 하긴 했는데, 캘리퍼스 날에 긁힌 팔뚝을 보니 마음이 난도질당한 듯 아려왔다.

       

       “잠깐 휴식.”

       “후우…. 살았다.”

       

       거의 다섯 시간 넘게 수련했으니 지칠 법도 하다.

       

       파김치처럼 벤치에 눌어붙은 레니냐. 나도 조금이지만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휴식이 관건이다. 길라흐와 대치할 체력은 남겨 두어야 한다.

       

       “…알았다.”

       

       쉬는 동안 레니냐가 어떻게 로즈마리를 이길 수 있었는지 고민했고, 머지않아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로즈마리를 이긴 실력이라면 나와 수십 합은 겨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레니냐는 그 정도 실력은 아니었다.

       

       딱 아카데미 학부생 중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실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런 그녀가 절멸급 마수를 상대로 한시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면.

       

       [여신님께서 무언가 장치를 해 두신 걸 거예요.]

       

       앨리스의 말이 맞다.

       

       마왕이라는 악성 버그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게 바로 그 여신이다. 나나 아카샤라는 트로이 목마가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다른 장치를 더 심어 두었겠지.

       

       그 장치 중 하나가 레니냐인 셈이고.

       

       “충분히 쉬었지? 다시 스태프 들렴.”

       “아앗….”

       “아앗은 무슨 아앗이야? 제대로 못 하면 진다. 죽을 각오로 임해.”

       “이제 2학년인 학부생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거 아니에요?”

       “로즈마리를 이겼으면서 많이 바라긴 뭘.”

       

       그 뒤로 나와 레니냐는 틈날 때마다 수련을 반복했다.

       

       첫날에는 기초적인 수준만 할 줄 알던 녀석이 이틀째에는 내 스태프를 받아치기에 이르렀고, 사흘이 되어서는 여유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으학!”

       “다시.”

       “꺄악!”

       “다시, 자세 잡고.”

       “으야악!”

       “이번 건 괜찮네. 다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레니냐의 실력은 쥐꼬리만큼 상승했다.

       

       당연하다. 고작 사흘 수련했는데 전투 실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오히려 레니냐에게 가르친 것은 마음가짐이었다.

       

       사천이나 되는 마수를 대할 수 있는, 편한 마음가짐 말이다.

       

       “후우, 후우.”

       

       덕분에 지는 건 똑같더라도 여유를 가지게 된 레니냐였다. 

       

       그 증거로 3일 전에 비하면 안색이 몇 배는 좋아졌다.

       

       “오늘로 나흘째구나.”

       “그러게요.”

       

       그리고 발전이 있으면 평가도 찾아오는 법.

       

       쾅, 쾅, 콰앙!

       

       섬 주변이 화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놈이 왔구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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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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