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04

        

         무슨 자랑 같은 건 아니지만, 일단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개인에게 연락을 넣는 난이도는 꽤 높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예전에 하베스트 플래닛에 처음 들어왔을 때 광고 폭격에 당한 이래, 기본적으로 휴대폰이나 다름없는 사이버웨어의 수신 설정과 보안을 어마어마하게 배타적으로 마개조해 놨기에. 정말 친한 일부만 아는 개인 번호나 접선 회선이 아니라면 신호조차 받지 않는다.

         

         워낙 전파 공격을 즐겨 쓴 전적이 있기도 하고… 굳이 도시 공용 네트워크나 무료 전파 등을 타고 해괴한 바이러스나 데이터가 들어오는 꼴을 봐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따라서 초면인 사람이 정 내게 컨택하고 싶다면, 간추려서 몇 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겠으니.

         

         하나, 멀리 돌아갈 것 없이 그냥 내 사이버웨어 보안 시스템이나 온라인 아이디 중 하나를 해킹하여 연락처를 알아내던가.

         둘, 멀리서 내 통신 임플란트의 고유 번호를 원격 스캔하고 직통으로 전화를 하던지.

         마지막으로 셋, 외형을 토대로 전문 용병임을 유추한 다음 인상착의를 토대로 빠르게 블랙 마켓이나 해커 업계에 수소문해서 ‘아이보리’ 명의로 열어놓은 의뢰 접수용 창구를 찾는 것이다.

         

         어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짧은 시간 안에 용케도 세 번째 아이디어에 도달했다고 이 인간들을 칭찬해야 하려나?

         

         무능력과는 거리가 먼 회사원이랄까, 수준급 발상과 실행력을 보유한 인재들이다.

         

         아니면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메가코프 수준은 아니라도 어엿한 기업이다 보니 이런 걸 전담하는 처리 부서나 뒷세계 커넥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하아…… 쯧.”

         “괜찮아?”

         

         “일하는 중이니까 참아야지. 원래는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실수지만… 선글라스 때문에 정면 쪽에서는 안 보일 테니까.”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 눈을 굴려서 근원지를 확인하니 어머나 이게 웬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언니께서 표정 관리도 안 한 채로 상당히 싫은 기색을 내비치고 계셨다.

         

         혹시 그녀의 사이버웨어에도 비슷한 의뢰가 들어갔나? 영 얼굴이 안 좋다. 헬레나의 진심 경멸은 꽤나 귀한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에서 찔리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서 직장과 추억과 생활 기반을 몽땅 갈아엎고 아예 인생을 새 출발한 사람한테 그딴 권유를 함부로 했다면 겁나 빡칠만도 하지. 음.

         

         거절당했을 때 반감을 살 게 무서웠는지 약삭빠르게 익명으로 보낸 점은 또 철두철미하나… 난 기분이 나쁘면 역추적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여차하면 의뢰 알선 시스템을 악용하는 이상한 놈들이 있다는 걸 빌미삼아 레오나르에게 의뢰자들이 누구인지 까발려달라고 부탁해버릴지도?

         

         [ 현재 수행 중이신 의뢰 계약에 면책 조항이 있으시다면 적극적으로 맞춰드릴 의향이 있음을 기억…. ]

         [ 의뢰비는 두 배로 보상, 위약금 대납 및 도피처까지 제공해드릴 테니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부디…. ]

         

         ‘아, 쪼옴!!’

         

         그나저나 아무리 수신 받은 당사자만 볼 수 있는 메시지라 해도 닦달이 엄청 심할뿐더러 과하게 노골적이다.

         

         어째 엿봤던 기업 숫자보다도 이간질하는 제안이 훨씬 더 많이 온 것 같은데.

         

         협조한다면 그것대로 좋고, 만약 지조 있는 용병이라 미움을 산다면 남들도 똑같이 밉상으로 만들려고 다계정이라도 돌렸나 싶다. 영악한 인간들.

         

         그래서 그런지 손에 들어온… 정확히는 우리 일행한테 다가오기도 전 일차적으로 드로이드 선에서 가로막혔기에, 제로로부터 건네받은 옛날 감성나는 종이 명함이 반갑기는커녕 하나같이 불결한 것처럼 느껴졌다.

         

         왜 뇌물 같이 명백히 더러운 물건이라 인지한 게 있다면 손끝으로 만지는 것조차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경호원 아가씨들, 명함도 충분히 봤겠다 이중에 수준이 딸려서 쳐내야 할 정도로 못난 인간이 없다는 건 확인하지 않았나? 슬슬 드로이드를 물리고 비켜 주시게. 미스터 알프레드에게도 전혀 나쁜 얘기가 아닐 터이니.”

         

         “곤란합니다. 저흰 사람을 가려 받으라 당부 받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담 중에 방해가 들어오지 않도록 신경 써서 지키는 것뿐이니까요.”

         

         “나 참, 답답하게 꽉 막힌 소리를 하기는…! 여기 모인 이들 중 지켜야 할 사회적 위신과 체면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무도 이런 장소에서 안전에 해를 끼치거나 소란을 피울 마음은 없으니 길을 터도 괜찮다는 뜻이네. 게다가 자네들은 어차피 원래 요크셔 캐피탈 소속 떡대들도 아니지 않나?”

         

         “그게 본분을 소홀히 할 이유가 된다면 어느 누가 제대로 일하겠습니까? 급하신 건 이해하나 일단 물러나시죠.”

         

         당사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게 길을 비켜달라는 눈치를 팍팍 주었지만 헬레나는 요지부동.

         

         정말 빈약하기 그지없는 논리로 보디가드에게 비켜달라는 건 고민할 가치도 없는 궤변이라는 듯, 추근대는 남자의 말을 딱 잘라낸 채로 버티고 섰다.

         

         정공법과 편법을 동시에 발휘하는 건 물론 효율적이겠지만. 뒤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계신 알프레드 씨의 주목을 끌려고 급하게 먼저 나서신 분이 점잖은 척하셔도?

         

         어떻게 딱 한마디만 보태 볼까. 크흐흠.

         

         “…부장님이니 이사님이니 하는 높은 분들이 체면도 내팽개치고 두서없이 한꺼번에 몰려오셨으니 우리도 최대한 교통 정리를 하고자 노력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익!? 새파랗게 어린 년이 좋을 대로 맹랑한 소리를 하기는…… 헉!!”

         

         – 최소 안전 거리를 유지해주시지 않으면 격한 작동에 휘말려 타박상, 골절 등의 상해를 입으실 수 있습니다. 유념해주시길. –

         

         덥썩, 그리고 휙!

         

         명함을 한 번에 몰아받은 탓에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가는, 헬레나의 언사에 안면이 약간 시뻘게진 어느 기업의 간부 씨의 성질을 살짝 긁어주자 흥분한 남자가 앞으로 튀어나오다 제로에게 멱살을 붙잡혔다.

         

         아쉽게도 드로이드는 사유물 취급.

         

         조금 부딪혔다고 폭력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인만큼, 내동댕이치는 게 아니라 정장 앞섬을 최대한 말아 쥐어 몸 전체를 들어올렸다가 원래 자리에 내려놓는 걸로 타협했거늘.

         

         출력 사용을 서슴치 않는 모습만으로도 별로 타인의 접근에 자비롭지 않은 행동 로직을 가진 경호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그는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옷매무새를 다듬지도 않고 황급히 물러났다.

         

         헌데 그 과정에서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나았을 욕을 굳이 중얼거린 건 왜일까 정말.

         

         책상머리에서 물리적 충돌과는 거리가 먼 사무일만 하다가 몸에 닿는 진짜 위협을 겪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놀란 걸 다 진정하지 못했나?

         

         ……아니, 일반인은 그게 당연하겠네. 성공한 직장인이라고 무조건 폭력이 익숙한 건 일반화의 오류겠지. 암.

         

         “씨발…! 용병들은 대부분 근로 의욕이 별로라더니! 뭔 놈의 독이 이렇게 바짝 올랐어!”

         

         “죄송하지만, 저희는 행사나 겉치레용 의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피를 안 보면 운이 정말 좋았다 여기죠. 삿대질을 하며 달려들던 시점에서 몇 군데 부러지셨어도 전혀 억울할 게 없으셨어야 할 텐데요. 그게 아니면….”

         

         좌측 발을 반걸음 앞으로.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언제든지 발도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는다.

         

         오른손은 칼 손잡이 부근을 휘감듯 세련되게, 왼쪽 검지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비스듬히 잡아내려 자연스럽게 형형한 안광이 깃든 눈동자를 드러냈고.

         

         등은 여전히 꼿꼿이. 하지만 전신에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치솟자, 그에 따라 타이트하게 맞춘 정장이 피부에 달라붙어 드러날 듯 말 듯하던 곡선을 부각하니.

         

         여러 요인이 합쳐져 위압적이면서도… 동시에 헬레나 특유의 절제된 야성미를 뽐내는 그런 근질근질한 자태가 완성되었다.

         

         ““…….””

         

         심약한 사람들은 뻣뻣하게 굳었고 나름 배짱이 있어 보이는 인간도 긴장한 자기네 쪽 보디가드의 태도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는 막상 받은 게 이런 얌전한 경호 임무라면 멋지게 싸우는 모습을 못 보여줄 것 같다며 실망했었지만, 내게는 이것만 해도 낭만 그 자체인 미녀 검객의 카리스마를 직관하는 셈이라 존나 충분하다. 응.

         

         외모 콩깍지가 아예 없더라도 가슴이 두근두근한데, 여러가지 종류의 친애가 뒤섞인 헬레나가 상대라면….

         난 그냥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배가 부르다니까요?

         

         홀에서 이런 대치가 발발한 꼴을 보면 경매장 보안 팀이 득달같이 달려올까 봐 원인 불명의 통신 장애와 감시 화면 덧씌우기를 몰래 저지르면서도 정신없이 구경했다 하면 설명이 좀 되겠나?

         

         캬, 맛있다.

         아이, 편하고 안심된다.

         

         이게 무력 시위를 통해 우위를 점한 참맛인가? 그냥 제로와 헬레나가 이끌어주는 조별 과제에 자료 조사 담당으로 무임 승차한 안락감이 느껴진다.

         

         물론 제공하는 데이터가 양질이라는 작은 자부심은 있지만, 뭐 아무튼.

         

         사람 험하게 다루려 들고, 평소에도 어디 가서 잘난 척 좀 하고 살 것 같은 중견 임원들이 단체로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꽤 재밌었다. 적당히 즐길 만큼 즐겼다.

         

         …근데 정말 재미는 있어도 이래서야 피차 감정만 상하지 정작 본 문제는 아무 진전이 없는 것 같은뎁쇼.

         

         ‘격한 반응’을 하는 놈들을 찾아달라 하셨지만 사실상 이들이 전부 의심 인물 아니야? 당초에 우리 의뢰인에게 시비를 걸었던 누군가를 여기서 특정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예상외로 그냥 전부 한 번에 몰려왔잖아.

         

         뭐,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실 거에요 이거? 홀에 있는 손님 전부가 우릴 구경거리 삼아서 떠들고 있는 건 나도 여론 통제가 어려운데. 알프레드 씨!

         

         “끄으응….”

         

         “…미스터 알프레드. 저에게 멋진 조각상을 소개해준다는 건 무슨 핑계였나요? 제가 좋은 인연이 계속되길 바랬을지언정, 영문도 모른 채 남의 사정에 휘말리게 되는 걸 웃어넘길 정도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드린다 한 기억은 없는데 말이에요.”

         

         “어허허허! 잠깐, 아뇨!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담!! 제가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다 보니 그저 전문가의 냉정한 평가와 고견을 구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순수하게!”

         

         기묘한 상황에 당황하기는 했어도 그 또한 금융권에서 장기 근무한 베테랑.

         

         올 때만해도 엄청난 시비에 휘말리거나 협박에 계속 시달릴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자리의 주도권을 쥐어 모두가 자기 결정만 기다리게 되었으니 기쁜 오산을 이용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당장 아무나 골라잡아서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기에 졸지에 이용당한 걸 모를 정도로 둔한 것 같지도 않은 화난 에멜다 여사님은 또 어쩐대.

         

         “노인네가 자신감이 넘쳐서 당연히 알고 있다 여겼지만. 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만약 본 경매로 가면 공업사는 때려죽여도 현금으로 펀드놈들은 못 이겨. 타이거에 임시 컨소시엄(Consortium; 공동 협력체) 얘기라도 찔러 봐. 지금 미리!”

         

         반면 초장 기세가 애기 손목 비틀듯이 꺾인 채, 다 망했다는 것처럼 침체되어 있던 부장님들의 분위기는. 영문모를 소리를 자기들끼리 막 중얼거리면서 슬금슬금 되살아나고 있었다.

         

         진짜 대놓고 저런 식으로 크게 떠들은 건 아니고 정말 소곤소곤 귓속말과 개인간 일대일 통화로 입술만 달싹이다시피 중얼거린 내용이지만.

         

         이쪽은 마음만 먹으면 드로이드 한 부대와 진동 감지 센서를 통해 음향을 재구성해서 엿들을 수도 있어서… 좀 미안하게 됐습니다. 네.

         

         억울하면 더 신중한 방식으로 작게 떠드셨어야죠. 눈빛으로만 얘기한다던가.

         

         하여간 그래, 부리나케 달려온 기업세와 우리. 어디서 결정적으로 엇갈리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여기에 이제 파산한 어느 기업인의 애장품. 그걸 냉큼 받아온 한 사채업자와 중간에 낀 미술품 애호가 사모님. 그리고 눈이 벌개진 특정 분야의 전문 기업들과 사모 펀드 무리.

         

         교과서적인 뭔가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미묘하게 거슬려서.

         어차피 놀려먹는 거 말고는 내가 더 나설만한 일도 없어 보이겠다 어긋나는 정보의 파편들이나 머리속에서 느긋하게 끼워 맞출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동산에서 묫자리를 더럽게 잘못 알아봤는지는 몰라도. 관련된 여러가지 죄들을 덮어써주려는 것 마냥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나타나셨다는 첩보가 때마침 들어왔다.

         

         – …아샤님, 웨이터로 변장한 거동수상자가 웰컴 드링크 플레이트를 들고 11시 방향으로부터 접근하고 있습니다. 놈이 액션을 취하기 전에 미리 제압하길 원하십니까? –

         

         “어라, 내가 경매장 직원 명단도 겸사겸사 추출했었던가? 그걸 어떻게 바로 알아?”

         

         – 내부 탈의실에서 갈아입은 게 아닌, 바깥 주차장에 세워진 밴에서 환복한 뒤에 하차하여 들어오는 걸 드론과 실내 카메라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

         

         맞다. 아까 구축한 감시망은 제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오히려 내가 넷 정키처럼 허공을 계속 보고 있을 수 없기에 소홀히 하는 만큼 열심히 가지고 놀아 달라고 라인을 구축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하나인 나 대신 일대 전체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몰래 숨어들어 여기까지 온 사람이 딱 있었다고?

         

         와, 전형적인 좀도둑이네 그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생각보다 별일 없는 것 같다고 심심해서 언니 구경하느라 바쁜 동생.
    그리고 알아서 존나 쎄게 매 맞으러 들어오는 웬 멍청이가.

    또 지각을 했지만… 오늘도 읽어주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시간 내서 남겨주시는 추천과 댓글 모두 큰 힘이 됩니다. 기뻐욧!

    Glacia샤샤 님의 3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최근 컨디션이 안 좋아서 분량이 좀 죄송스럽지만…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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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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