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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4

       

       

       

       밤. 

       

       기울어진 달을 몇 번이고 가렸다가 드러내게끔 하던 구름은, 한 두 방울씩 물을 떨어트리더니 곧 구슬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그런 힘없는 달 아래로 멀리 나무가 벗겨진 산들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넓은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시가지의, 격자로 구획된 도로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구슬비 속에서 반짝인다.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근대적인 빌딩이 가득한 드넓은 시내 한복판에, 고풍스러운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빌딩이 비를 맞으며 우뚝 서 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유의 대화(大和)호텔. 

       

       좀더 가까이 다가가, 그곳 5층의 최상층,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을 들여다보면 그 안으로 전등불이 켜진 화려한 실내가 보인다. 

       

       실내의 문이 열리고, 긴 흑발의 소녀가 들어온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들어온 소녀는, 시마즈 공작가 당주의 외동딸이자 엽사조합 시마즈구미 경성분조의 분조장, 시마즈 렌까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명을 받아 만주에 온지도 벌써 며칠 째. 렌까는 문을 잠그고, 지친 발걸음으로 실내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후아— 지쳤어……』 

       

       침대에 엎어진 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렌까는, 마치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쳤어! 까뜨린느…… 자니?』

       

       아니,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 오호홋! 교양있는 인형인 제가 벌써 잘리가 없사와요! 저의 소중한 친구, 렌까 사마를 기다리고 있었사와요!』]

       

       마치 스피커로 재생되는 듯 이질적인 느낌이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침대의 머리맡, 금발벽안의 서양소녀 외향을 한 셀룰로이드 인형 까뜨린느였다.  

       

       그리고 렌까는 자신이 상상하던 그대로의 까뜨린느의 영혼이 기적적으로 인형에 깃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사실 그 안에 든 것은 조선인 소녀 방숙자의 영혼. 

       

       백철연 때문에 ‘조선이 해방되는 모습을 보아야 성불할 수 있다’는 주박에 걸린 방숙자는, 렌까의 애착인형 ‘까뜨린느’에 갇힌 이후로, 교양있는 영애 느낌의 가상의 인물 ‘까뜨린느’를 연기하며 렌까의 말을 받아줘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렌까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것은, 네이티브 충청도 조선인 소녀인 방숙자로써는 꽤나 고역이었다. 

       

       ‘환장하겄네. 지가 힘들다고 난티 워쩌라는겨……’

       

       까뜨린느-방숙자도 알고 있었지만, 렌까가 지쳤다며 엄살을 피운 것 치고 힘들게 움직인 것은 거의 없었다. 마수와 싸운 것도 아니고 전쟁터를 누빈 것도 아니다.

       

       사실, 이곳에서 렌까의 일정 대부분은 사실은 대개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들이었다. 

       

       각지에서 뭔가를 진행하기 위해 시마즈구미 수장의 권한이 필요한 일들에, 렌까가 대리로서 권한을 위임받아 결재업무를 맡은 것이다.

       

       그런 사람이 힘들다는데 뭐라고 말을 받아줘야 하는 것일까. 까뜨린느-방숙자는 고민하다가 교양있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렌까 사마는 힘내는 것이와요! 세계평화를 위해 도장을 찍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인 것이와요!』]

       『……까뜨린느!』 

       

       렌까는 침대 위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까뜨린느를 보는 렌까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방숙자는 속으로 질겁했지만, 렌까는 이내 다시 한숨을 내쉬고 까뜨린느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까지 그런 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단순히 도장 찍는 태엽인형 역할을 하러 온 게 아니야.』

       

       렌까는 생각했다. 

       

       ‘아버님은 나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신 거야.’

       

       당주는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무엇을 승인하고 무엇을 반려하고 또 어떻게 지시할지에 대해, 기본적으로 지침을 내려주면서도 렌까에게 재량껏 판단하고 결정하라고 전적으로 맡긴 것이다.

       

       지나와의 전쟁에 시마즈구미 엽사 병력을 얼마나 보낼지, 군부대에는 어느정도 규모로 협력할지, 무기 제조사와는 어느정도의 규모로 계약을 체결할지, 계약 갱신은 어떻게 할지, 새로 발견된 마문의 개발권과 소유권은 어떻게 할지……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는 대부분 아버님이 일러주신 대로 승인하기는 했지만.』

       

       렌까는 말을 이었다. 

       

       『나도 알아. 애초에 아버님이 나에게 이번의 만주 출장을 맡기신 이유는, 시마즈구미와 대동아공영회에서의 내 입지를 키워주고, 나의 시야를 넓히라는 목적으로 보내신 거야.』 

       

       아무튼 이렇게 렌까의 일정이 대부분은 크게 고민 없이 도장 찍는 일이라고는 해도, 마냥 손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봉천, 대련, 여순, 길림, 창춘, 돈화, 치치하루, 하이라루……

       

       그런 수많은 도시들 각각의 시마즈구미 출장사무소, 공략중이거나 개발중인 마문, 시마즈구미와 협력중인 군부대, 다른 엽사조합들, 무기제조공장, 협화회, 관동군사령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만주항공…… 

       

       이렇게 드넓은 만주 곳곳에 흩어진 여러 시설과 단체를 방문하려면 내지와 조선 몇 번을 횡단할만한 거리를 종횡무진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모래먼지 속에서 차를 타고, 몇 번씩 덜컹거리는 열차를 갈아타며 오가는 것은 보기보다 몸이 힘든 일. 

       

       게다가 정신적인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하루종일 시마즈구미 신경분조 사람들과 동행해야 했는데, 렌까는 그들 앞에서 결코 지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었다. 

       

       ‘나는 아버님을 대신해서 온 사람이야. 시마즈 가문으로서의 위엄을 보이지 않으면.’

       

       물론 그건 경성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렌까는 이곳에서는 더욱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뭔가 공기가 달라.’

       

       처음 조선에 와서 부산의 땅을 밟았을 때에도 공기가 다르다라는 것을 느꼈지만, 이곳은 한층 더 대륙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대기로써의 공기 뿐만 아니다. 분위기로써의 공기도 다르다. 아직은 평화로운 조선과는 달리, 확연한 전쟁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는 만주.

       

       시마즈구미 신경분조의 엽사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본인들이었지만, 내지나 조선의 그들보다 더 거칠고 야만적인 풍모가 느껴졌다. 

       

       엽사들 뿐만 아니라 양복쟁이들도 마찬가지. 그들 모두가 이곳의 대륙적이고 거친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런 거칠고 사내들 앞에서 계속 위엄을 보이느라, 렌까의 정신적인 피로도는 상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쳤어. 까뜨린느……』

       

       렌까는 까뜨린느를 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구슬비가 내리는 신경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렌까는 입을 열었다. 

       

       『빨리 경성으로 돌아가고 싶어.』

       

       처음 내지에서 경성으로 올 때만 해도 머나먼 이국으로 유배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정말로 머나먼 이국에 와보니 이제는 경성이 고향같다. 

       

       경성 남산의 화식(和式) 저택. 그 안에,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진 안락한 개인실.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에는, 집에만 있어도 다까히로나 오스에가 편의를 봐주기에 전혀 불편할 것이 없다. 

       

       그렇게 집에 있는 것도 좋지만, 기분전환 겸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을 때에는 어딜 가든 자동차를 타면 금방이고, 경성의 혼마찌나 고가네마찌에 가면 내지의 도시를 거니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반면, 이곳은 모든 것이 멀고 거칠고 낯설다.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에서는 더더욱 멀리 떨어진 머나먼 이향(異郷)에서의 밤은 길었다. 

       

       『경성으로 돌아갈래.』

       

       어서 경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렌까는 생각했다. 돌아가면, 반드시 하루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푹 쉬리라.

       

       우선은 자신의 전용 욕탕에 몸을 푹 담글 것이다. 내지나 조선의 깨끗한 물과 달리, 이곳의 석회질 가득한 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있는, 불란서에서 직수입한 침대 위에서 까뜨린느와 함께 뒹굴거리면서 쉬다가, 그리고 뭘 할까. 

       

       ‘시라바야시 상을 불러야지.’ 

       

       부르면,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와 줄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털어놓을 것이다. 물론 과장도 많이 섞어서.

        

       『지나인들은 손톱을 허리까지 기른답니다! 무섭지요?』

       

       그러면 그는, 관심 없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다가도 사실은 성실하게 듣고 있어서,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놀라서, 「뭐? 아니, 그럴리가 있겠냐.」하고 되묻겠지.  렌까는, 그런 백철연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기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아아.』

       

       그를 생각하면 마치 스스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된다. 그를 생각하면, 자신을 평생 억압해온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소중하게 여겨지는 기분이 든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인 것이겠지, 까뜨린느.』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구름 위에 뜬 것 같은 기분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그는 대동아공영회를 배신할까. 렌까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는 듯 했다. 

       

       「저기 있는 조선인 놈은, 대동아공영회를 무너트릴 생각만 하는 놈입니다.」

       

       「놈은 대동아공영회에 고개를 숙인 것처럼 하고, 사실은 내부에서 방해할 생각만 하는 놈이죠.」

       

       「증거도 있습니다. 놈이 종이에 써둔 것을 제가 다 봤지요.」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이며, 자신의 속셈을 써둔 종이를 말입니다……」 

       

       벌써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악질의 불량학생이 내뱉은 말이지만, 여전히 렌까의 귓가에 박힌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물론, 백철연의 해명대로, 백철연이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이 배반한다는 생각을 일본어로 노트에 적어놓거나 하지는 않았으리라. 

       

       백철연은 대동아공영회에 입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이렇게 얘기했었다. 서양 열강에 지배당하는 것보다는 일본과 함께하는 것이 낫다고.

       

       ‘그것이 맞지요, 시라바야시 상. 조선은, 일본과 영원토록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백철연이 가진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여전히 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본을 선택한 것이다. 

       

       ‘왜냐면, 일본이 이기지 못한다면 조선 역시 결국 서구세력의 식민지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으니까요.’

       

       ‘타인보단 우리(他人より身內)’라는 말처럼, 먼 서양보다는 조선과 동류(同類)인 가까운 일본과 함께하는 것이,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는 데에도 유리하다는 것을, 백철연은 깨달았을 것이다. 

       

       백철연은 영리하고 빈틈없는 사내다. 이런 상황에서 대동아공영회를 배신할 이유도 없고, 하물며 배신하겠다는 생각을 노트에 적어놓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그가 배신할지 걱정하는 것은 그저 쓸모없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리라.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 한켠이 불안한 것은……

       

       『다만 생각의 지나침(思い過し)일까, 여자의 직감(女の勘)이라는 것 때문일까.』 

       

       렌까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모르겠어, 까뜨린느!』 

       

       다시 침대에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까뜨린느. 아무래도 나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오호홋! 사, 사랑에 빠진 소녀는 원래 바보가 되는 것이와요!』] 

       『그런 걸까……?』

       [『그, 그렇답니다!』]

       

       ‘바보가 아니라 옘병 미친년이겠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어린 나이에 죽은 방숙자였지만, 적어도 배신하면 죽이고 죽겠다느니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일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내일 일정만 끝나면,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번 만주 출장의 마지막 일정으로써, 내일은 하루빈에 간다. 시마즈구미의 업무였던 지금까지의 일정과는 달리 이번은 관동군과 대동아공영회까지 관련된 일정이었다. 

       

       『관동군 방역급수부의 약제반에서 만들어낸 신약…… 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아.』

       

       그것의 효과를 시찰하고, 전쟁에 투입되는 시마즈구미 엽사들에게 지급하는 건에 대한 승인을 결재하는 일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강화제 같은 것일까.』

       

       뭐가 되었든, 가서 한번 슥 구경하고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 전혀 어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는 일이다. 

       

       렌까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일은 너도 함께 가자, 까뜨린느. 하루빈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특급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갈테니까.』 

       

       물론, 승인하지 않고 반려하거나 유예한다면 그에 대한 이유나 대책도 제시해야 하기에 만주에서의 일정이 더 길어지겠지만…… 

       

       렌까는 자신의 옆에 까뜨린느를 눕히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뭐…… 아마 그럴 필요는 없겠지, 까뜨린느.』 

       

       렌까는 잠들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만 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이, 일정대로 경성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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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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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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