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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6

       도망자의 길은 좁으면 좁을수록 스릴이 넘치는 법이다.

       

       그리고 그만큼 추격자의 눈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랬기에 나는 일부러 길라흐가 파둔 함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상대로 길라흐는 나와 내 일행을 보자마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제, 당분간 내 역할은 하나다.

       

       “제 손으로 애미 애비 묻은 고아 놈아! 어디 나도 한번 묻어 봐라!”

       

       저 녀석이 끝까지 나를 따라오도록 유인하는 것.

       

       만에 하나 이상한 점을 눈치챈다? 그러면 힘들어진다. 나보다 아이비 섬을 우선해서 공격하면 흑주고 나발이고 부질없어진다.

       

       “왜, 지치냐? 이것도 못 따라오냐? 네가 그러고도 사천이냐?”

       “저, 저, 저 씨발년이……!”

       

       유치한 도발이었지만 그만큼 싸게 먹힌다.

       

       저 분수도 모르는 멍청이에겐 지금의 내가 소담하게 차려진 밥상처럼 보이겠지.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일 것이다.

       

       하지만 모르고 있다. 지금 파리지옥의 아가리로 들어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피식 웃으며 손에 낀 반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후우우웅!

       

       “장관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아, 그래?”

       

       공계마도사에게 김밥 한 줄을 받아 입에 털어넣었다.

       

       이른바 맨투맨 공중 급유다.

       

       “저년이─!!”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잘 들리진 않는다. 바람 소리가 워낙 커서.

       

       앨리스에게 마력을 공급받아 날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한 빨리 목표 지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게 한 시간에 시속 300 킬로미터씩. 하루에 걸친 이동 끝에 대륙의 끝자락까지 왔다.

       

       “저쪽이면 충분할까요?”

       “그래. 저기가 좋겠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육지다. 기껏해야 축구장 크기만한 섬이지만. 

       

       공계마도사들이 먼저 랜딩을 시도했다. 나는 같이 온 레니냐를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선생님…!”

       “떨어진다. 빨리 준비해!”

       

       섬에 발을 디디고 나서도 여유를 가질 시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앨리스에게 받은 마력을 레니냐와 나누었다.

       

       

       **

       

       

       에테르 일행은 대양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아무렇게나 삐쭉 솟아오른 모래사장이었다. 땅 너비는 마왕령에 있는 별채 크기 정도였다.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곳.

       

       옳다구나 싶었다.

       

       길라흐는 가볍게 백사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모래가 움푹 파이며 인공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여기가 당신들 묫자린가요?”

       “천만에.”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을 텐데요. 그 표정들을 보아하니.”

       

       공계마도사들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했고, 또 누군가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전형적인 마력 고갈 증상이었다.

       

       게다가 육상생물이 장시간 하늘 위에서 이동했으니. 제아무리 훈련 받은 마도사라도 해도 멀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몰살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음?”

       

       이제 보니 금안족이 한 명 더 있었다.

       

       무르익은 장미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기분 나쁜 인상의 소녀였다.

       

       마름모로 파여 가슴골이 드러난 천박한 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일리야드 아카데미 재학생인 게 분명했다.

       

       “뭡니까? 그 미천한 년은.”

       

       자세가 고결하지도 않고, 몰골이 단아하지도 않다.

       

       얼굴이나 몸매는 봐줄 만했지만, 그래봤자 금안족 중에서 디폴드 값인 수준.

       

       딱 보더라도 하이엘프는 아니었다.

       

       “동족한테 미천한 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저와 같은 혈통이 아니라면 볼 일도 없지요. 아, 그리고 엘프라고 해도 대부분 천박한 건 매한가지랍니다. 후하하하!”

       

       길라흐는 갈고리로 대체된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단언컨대 절 제외한 하이엘프는 모조리 멍청해 빠졌습니다. 이런 인재를 몰라보고 내쳤으니 말이죠!”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엘프.

       

       나머지는 이름만 가져다 쓰는 아종에 불과하다. 길라흐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야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비참한 말로를 겪었기에.

       

       “살아남은 자가 고결하고 우등한 법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모르십니까?”

       “알지. 적자생존.”

       “당신들은 여기서 죽습니다. 그러니 열등할 것입니다. 반대로 저는 마왕님의 깃발 아래 부귀영화를 누리며 무병장수하겠죠. 이것이 드높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생각하기에 꽤 눈물겨운 연설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지만, 뭐 어떠한가. 전 상천의 얼굴을 보는 건 여기가 마지막인데.

       

       그러니 이건 최소한의 예의였다. 원자탄을 만들어서, 마왕님의 길에 있는 장애물을 치워준 것에 대한 예의.

       

       “아무튼, 잡설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순간.

       

       파악─!!

       

       길라흐는 쏜살같은 속도로 지면을 박차고 나아갔다.

       

       그의 신형이 기괴하게 뒤틀린다. 나비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팔을 휘적거리며 현란한 죽음의 궤적을 그려낸다.

       

       한 쌍의 은빛 갈고리가 에테르의 목에 사선을 그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카앙!!

       

       “……!”

       

       오른쪽 팔에서 저항감이 느껴진다. 뒤이어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쇳소리.

       

       “……에테르 선생님은 털끝 하나도 못 건드립니다.”

       

       태양을 담은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

       

       길라흐는 순간 당황했으나 연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캉! 캉! 카앙!

       

       “제가 말했잖아요. 선생님은 못 건드린다고.”

       “이, 이 년이…! 저리 안 비켜?”

       

       암적색 머리칼의 소녀는 길라흐의 공격을 전부 쳐냈다.

       

       한 합을 받아낼 때마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물 흐르듯이 받아내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감히, 감히…!”

       

       내 공격을 쳐내?

       

       “네년, 뭐하는 년이렷다?”

       “……레니냐.”

       

       레니냐.

       

       레니냐라.

       

       “이름 한번 등신 같이 지었군요!”

       “제 외삼촌이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줄래요?”

       

       길라흐는 수은이 경동맥을 타고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레니냐라는 년, 왜인진 모르겠지만 에테르 이상으로 짜증 난다.

       

       에테르가 불쾌해서 밟아 죽이고 싶은 풀벌레 정도라면, 이 녀석은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드는 바퀴벌레나 진배없다.

       

       안 되겠다. 표적을 잠시 바꾸는 수밖에.

       

       에테르보다, 레니냐를 먼저.

       

       이성을 잃고 정신없이 갈고리를 휘두른다.

       

       그러나 요란한 소리가 날 때마다 후련하기는커녕 이마에 주름만 늘어날 뿐이었다.

       

       “기껏해야 20년 살았을 썅년이─!! 내가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마치 세계 복싱 챔피언이 갓난아이의 손짓 한 번에 가로막힌 것처럼.

       

       굴욕적인 감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수를 알아라!!”

       

       카앙!

       

       “꺄아악……!”

       

       혼신을 담은 일격에 레니냐는 나동그라졌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기교 따위는 무의미했다.

       

       “장관님, 설치 끝났습니다!”

       “침식되지 않도록 지키고 있으세요. 저 똘마니는 저와 레니냐가 상대할 테니까.” 

       

       때마침 에테르가 스태프를 꺼내고 들어왔다.

       

       순간, 길라흐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방금, 어떻게 한 거죠?”

       “뭘.”

       “마력초 없이 어떻게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낼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길라흐는 순수 완력만으로 레니냐를 상대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마력초를 물 이유도 없었다.

       

       반면에, 에테르는?

       

       스태프를 수납하고 다닌다. 그 때문에 본격적으로 마도를 전개하려면 마력초를 물어야 했다.

       

       “아, 이거 말이야?”

       

       에테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스태프를 휘둘렀다.

       

       “안 알려준다.”

       “……잠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나니 어떤 원리인지 알 것 같았다.

       

       희미한 냄새가 난다.

       

       정령의 냄새가.

       

       “당신…… 정령과 계약했군요.”

       “어라. 들켰네.”

       

       혀를 쯧, 하고 차는 에테르.

       

       어째서인지 별로 곤혹스러워 하지 않는 낌새였다.

       

       쓰러진 레니냐를 일으켜 세운 에테르는 자연스레 머리 위로 정령의 본체를 띄웠다.

       

       양손에 쇠사슬과 후크 형태의 갈고리를 쥔 백발금안의 소녀가 길라흐를 노려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수인 길라흐가 그 웅얼거림을 들을 수는 없었다.

       

       “흐, 흐흐.”

       

       아무래도 좋았다.

       

       정령이다.

       

       다른 정령도 아니고, 마왕님께서 오래전 멸족시켰다는 전계정령.

       

       임금님께 진상하는 13첩 반상보다도 더욱더 탐스러운 식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성질머리 급한 길라흐가 이를 참을 리 만무했다.

       

       “흐흐흐흐…! 좋아요, 아주 좋아…!”

       “레니냐, 정신 들어? 들었으면 일어나. 저 새끼 온다.”

       

       다시 한번 길라흐의 육신이 쇄도한다.

       

       촤악─!!

       

       귀신을 덧씌운 듯 기기묘묘한 투로가 그려진다. 갈고리를 부채처럼 휘두르며 전진하는 길라흐는 백사장의 태풍과도 같았다.

       

       그리고 에테르는 그것을 한 합에 받아냈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둘 다 한 번에 나가떨어지면 손맛이 없다. 그래도 마왕님이 사천으로 끌어들인 존재인데, 기본적인 무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

       

       한껏 고양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입에 마력초를 물었다.

       

       지금부터 대화는 무의미했다.

       

       “……!!”

       

       길라흐는 한쪽 갈고리를 에테르의 캘리퍼스 날 사이에 걸고 비틀었다. 자연스레 에테르의 손목에 부하가 걸린다.

       

       이대로 당한다면 상천이 아니었다.

       

       휘리릭! 에테르의 신체가 하늘로 튀어올랐다. 에테르는 받침점을 길게 잡아서 힘을 쪼갰다. 몸도 두 바퀴 가까이 돌아갔다.

       

       대신에 길라흐의 뒤를 선점했다. 이 위치라면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에테르는 체중을 실었다. 빠득! 하고 캘리퍼스의 날이 길라흐의 어깨를 파고든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내려찍기였다.

       

       “이년이…!”

       

       길라흐는 씹던 마력초를 뱉었다. 마침 신체에 마력이 돌았다. 곧바로 고유마도를 전개한다.

       

       전설급 고유마도, 교월. 

       

       그중에서 ‘ 초승’을 그린다. 

       

       기울어진 초승달이 신체를 치유한다. 캘리퍼스 날에 찢어졌던 어깨가 단숨에 회복된다.

       

       뻐억!

       

       길라흐는 곧바로 에테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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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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