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07

       에테르의 몸이 수 미터를 날아갔다.

       

       상반신을 접으며 순간적인 충격을 흡수했다. 데굴데굴 구르던 에테르는 장딴지에 힘을 주어 자세를 잡았다. 모래가 발목까지 잠겼다.

       

       “퉤.”

       

       침 사이로 붉은 핏물이 섞여 나왔다.

       

       기계의 몸이니 늑골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을 터. 압력으로 인해 폐가 짓눌리며 고여 있던 것이 빠져나온 것이리라.

       

       무릎을 낮추고, 관절에 힘을 보탠다. 그리고, 그대로 반동을 살려 몸을 내쏘았다. 가녀린 소녀의 신형에서 대포알에 버금가는 운동량이 더해졌다.

       

       길라흐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부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위로 죽음의 궤적이 그려진다. 캘리퍼스가 사선을 그리며 공기를 갈라냈다.

       

       두 사천은 이리처럼 서로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당신 명줄도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닥쳐.”

       

       발을 돌리고 다시 한번 스태프를 휘두른다.

       

       카앙!

       

       날카로운 움직임이 우레와도 같은 폭음을 만들어낸다.

       

       “흐흐흐.”

       “…….”

       

       같은 사천이라지만 전투력 차이는 명백했다.

       

       길라흐는 여유로웠고, 에테르는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선생님!”

       

       그때 레니냐가 스태프를 내던졌다.

       

       갈고리의 중간 부분에 낫이 걸렸다. 도리깨질에 쓸려가는 것처럼 스태프가 길라흐의 팔을 끌어간다.

       

       볼트를 조인 것처럼 단단하게 옭매인 낫. 풀어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벌레 주제에 방해하기는!”

       

       길라흐는 역으로 사슬의 홈 사이에 갈고리를 걸고 빠르게 끌어당겼다. 어어, 하는 사이에 레니냐의 몸이 앞으로 나자빠진다.

       

       “막되먹은 년! 내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

       

       은빛 갈고리의 궤적이 레니냐의 머리통을 향한다. 반대쪽 갈고리로 귓구멍을 꿰어버릴 생각이었다.

       

       “한눈팔면 안 되지.”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후우웅!

       

       캘리퍼스의 뒤쪽 날이 짓쳐 들어온다.

       

       이어서 허공을 가르는 연격이 쇄도한다. 길라흐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몸을 날렸다.

       

       ‘이 새끼가….’

       

       피하긴 하였으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똑같았다. 에테르와 레니냐는 길라흐를 번갈아 가며 괴롭혔다. 

       

       레니냐를 잡을까 싶으면 에테르가 들어오고, 에테르와 맞붙을까 싶으면 레니냐가 인터셉트를 넣는다.

       

       ‘젠장. 고작 두 명인데 왜 이러지?’

       

       길라흐는 일당백도 가능한 야전사령관. 제아무리 사천이 한 명 끼어 있다지만 두 사람을 상대로 고전하는 건 말이 안 됐다.

       

       ‘물론 이쪽은 마법을 쓰진 않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성가시군요.’

       

       수치로 표현하자면 이러했다. 길라흐의 전투력이 1000이라면 에테르는 900 정도. 거기에 저 레니냐라는 소녀는 통상 1에서 2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레니냐는 100이 근소하게 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수십 년은 구른 베테랑이나 보일 법한 움직임을 내는 것이 학생답지 않았다.

       

       심지어 낫의 무게가 가면 갈수록 무거워졌다. 처음 맞붙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레니냐를 상대하기가 한결 까다로워지고 있다.

       

       “크윽!”

       

       그러다가 처음으로 유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에테르도 아닌, 저 붉은 머리 계집애한테.

       

       길라흐는 어안이 벙벙했다. 곧바로 ‘초승’을 사용해서 육신을 치유했지만 자존심에 난 상처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흙탕물 속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가야겠군요.’

       

       “탐색전은 끝이다, 머저리들아!”

       

       길라흐는 전신에 마력을 집중했다.

       

       [전설급 고유마도 ─ 교월(皎月)]

       

       그의 몸 주변에 은은한 달빛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교월(皎月)이란 맑고 밝은 달을 뜻한다. 동시에, 교월(巧月)은 음력 7월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라흐의 갈고리는 은은한 여름밤의 달을 상징한다. 그것이 삭이든, 망이든, 하현이든 상현이든.

       

       상관없다. 한 달은 보기보다 기니까. 모든 형상을 품을 수 있다.

       

       [하현(下弦)]

       

       왼쪽 갈고리를 치켜든다. 갈고리에 서늘한 달빛이 감돈다.

       

       번쩍, 하는 순간. 레니냐의 어깨에 날이 틀어박혔다.

       

       “윽…!”

       

       레니냐가 옅게 신음했다. 에테르가 까무러치게 놀라며 길라흐의 뒤통수를 맹렬히 후려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초승달이 한 번 뜬 이상, 어지간한 것으로는 길라흐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테르의 공격은 무시한 채 뻣뻣해진 레니냐의 반대쪽 어깨에 나머지 갈고리를 꽂아 넣었다.

       

       “장난은 끝입니다.”

       

       길라흐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리 읊조렸다.

       

       다음 순간, 레니냐의 양팔이 두부 잘리듯이 썰렸다.

       

       “아아아악─!!”

       

       쇄골 중간부터 시작해서 겨드랑이 선까지 쭉 내리그었다. 레니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두 팔이 뚝, 하고 떨어진다. 그리고 몇 초. 절단면에서 뒤늦은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가…!”

       “워워, 화내시면 안 되죠.”

       

       그래, 저 얼굴이다.

       

       에테르의 저 뒤틀린 얼굴을 보고 싶었다.

       

       “소중한 애였나 보죠? 그래요… 그 대가리 시퍼런 계집애처럼.”

       “너 이 새끼….”

       “단념하고 그만 보내주시길. 제 하현에 한 번 맞으면 현대 의술로도 못 고치니까요. 으하하하!”

       

       그린 궤적을 반드시 잘라내는 기술. 길라흐의 마법이란 곧 압도적인 물리였다.

       

       양팔이 잘린 레니냐는 모래 위를 뒹굴며 울부짖었다. 백사장이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길라흐의 입매도 기괴하게 뒤틀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거든요. 재미있는 걸 보여드리죠.”

       

       길라흐의 시선이 파르르 떨고 있는 공계마도사들을 향했다. 그들은 마법진을 보호하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처리하는 게 나을 터.

       

       길라흐는 모래사장을 박차고 나아갔다.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머지않아 마도사들의 사지가 하나씩 썰려 나갔다. 모래사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덴 1분이면 충분했다.

       

       “아악…!”

       

       비전투직인 에테르가 이를 눈으로 좇을 수는 없었다. 아니, 대응하더라도 전부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모든 아군이 쓰러지고 1대 1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마법을 사용한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절 여기까지 몰아넣은 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학생. 흐흐흐!”

       

       값싼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에테르는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궤적이었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피하기 쉬웠다.

       

       길라흐는 캘리퍼스를 유유히 흘려냈다. 그러고는 에테르의 복부에 갈고리의 첨단을 찔러 넣었다.

       

       “카, 학…!”

       

       토막 난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온다. 뚝, 뚝. 선홍빛 혈액이 갈고리 표면을 타고 흐른다.

       

       길라흐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최상급 전계마도 ─ 일섬(一閃)]

       

       시전자의 급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상대는 일정 확률로 즉사시키고,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상대는 전체 중 4할에 달하는 생명력을 앗아가는 전격 마법.

       

       여기에 전기적인 척력이 작용하여, 맞은 사람은 멀리 튕겨 나가는 마법.

       

       일섬에 직격으로 맞은 에테르는 낙엽처럼 날아가 쇠공처럼 떨어졌다.

       

       “이거, 날이 잘 길들었군요. 기름칠 감사합니다. 흐하하하!”

       “개, 자, 식….”

       

       숨결이 끊어진다. 사고도 군데군데 잘린 듯하다.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믹스 커피에 담근 비스킷처럼 장기와 핏물이 흘러내린다. 이 상태로 널브러진다면 죽음이었다.

       

       혼미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는다.

       

       에테르는 검지에 낀 반지를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포말의 반지’ 효과]

       

       [▶ 흡탈]

       [착용자가 공격할 시 – 공격 데미지에 비례하는 생명력을 회복함.]

       [착용자가 공격받을 시 – 피해 데미지에 비례하는 생명력을 아군에게 양도할 수 있음.]

       

       잔불처럼 뭉근해진 의식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길라흐를 노려본다.

       

       “자, 그럼 작별입니다. 흐흐흐흐….”

       

       그래. 작별이다.

       

       길라흐의 불온한 웃음 뒤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아이비 프로젝트의 임시 총책임자가 된 아카샤는 모든 과정을 동료와 함께 손수 작업했다.

       

       초전도체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연료 펠릿을 금제 홀라움에 장전했다.

       

       그 주위에 플레어와 백야를 보강한 고성능 레이저 286개를 만들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1억 8천만 개가 넘는 각 회로의 순환을 점검한다.

       

       언니… 아니. 또 다른 자신이 남긴 블루프린트를 보며 흑주 스크롤을 완성하는 것이 아카샤의 사명이었으니까.

       

       “틀린 곳은 없나요?”

       “모든 회로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마소 반응 안정성 검사도 끝냈습니다!”

       

       모든 검사까지 마쳤다. ‘이상 없음’ 보고를 받은 아카샤의 얼굴에 꽃이 만개한다.

       

       닷새보다 조금 더 걸렸을까?

       

       무조건 작동하긴 할 것이다. 아카샤는 에테르를 믿었다. 그녀는 천재니까. 자신은 그녀의 분신이니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 남은 일은 완성된 물건을 에테르가 부른 좌표로 옮기는 것뿐.

       

       “로즈마리!”

       

       우리의 블루베리 양도 순간이동을 위해 쓰일 공간진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정령의 도움을 받는 로즈마리는 반경 수천 킬로미터를 탐색할 수 있다. 아렌스 대륙은 물론이고, 멀리 내다본다면 정령계까지 가능하다.

       

       작업을 마친 로즈마리는 고개를 들었다.

       

       “이쪽의 준비도 완벽하네요.”

       

       좌표를 실수한다? 천재 중의 천재인 로즈마리에게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버멜을 포함한 수많은 인력이 로즈마리를 도와주고 있다.

       

       “완성된 걸 이쪽 개화부에 올려놓으세요! 가능한 한 빨리 전송해야 하니까!”

       

       흑주 스크롤은 길이만 5미터에 이르는 대형 스크롤이었다. 최상급 마도를 담은 스크롤이 보통 50cm 정도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길이였다.

       

       스무 명의 정예 마도사들이 마법진의 각 꼭짓점에 둘러앉았다. 수백만 시버트에 달하는 마력을 이곳에 쏟아부어야 한다.

       

       스코프를 둘러보던 로즈마리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빨리! 빨리! 빨리이이─!!”

       

       에테르 쪽의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길라흐가 진심을 내기 시작하니 언니로선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저 병기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도 마력초를 물고 마법진 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는 버멜 또한 마찬가지였다.

       

       “젠장….”

       

       마왕을 쓰러뜨릴 때까지 협력하자는 약속이 있었다. 버멜은 최선을 다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의 시선이 왼쪽 검지에 끼인 ‘창공의 반지’를 향했다.

       

       스코프 너머의 에테르는 죽어가고 있었다. 길라흐에게 전격을 맞고는, 힘없이 늘어진 채로.

       

       그녀가 죽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또, 자신은 어떻게 변할까.

       

       그것이 두려웠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지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버멜은 체내의 마력을 전부 짜내서 마법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