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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7

     나와 아스타시아의 행복한 결혼에 있어, 방해되는 요소는 두 가지.

     하나는 무능왕이라는 존재 그 자체.

     이 자는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을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고, 변수를 너무나도 많이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와 동시에 내 가족, 우리 가문에 크나큰 피해를 주는 존재였다.

     과거의 적.

     나와 아스타시아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지브롤터와 악연을 쌓아왔고, 심지어는 두 번 정도 되감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적이었다.

     살아있다면 우리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상대.

     

     하지만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그런 욕심을 버리고 현재를 살아가기를 충실했다면?

     역사에 이런 식으로 적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그냥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섰더라면?

     카르멘 왕비까지 지브롤터로 가버리면 왕권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걱정이 되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충성병자들을 다루는 모습으로 보아, 마음만 먹으면 ‘노스트럼의 군왕’으로서는 나름 충분한 모습을 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과거의 적은 죽었다.

     내가, 그리고 악연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직접 검을 휘둘렀다.

     나머지는 이제 ‘미래의 적’뿐.

     “좋은 점심이군.”

     황제의 응접실에 초대받아 올라가자마자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황제를 맞이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유리잔을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은 비어있다.

     

     “축하하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사망을 위하여.”

     “위하여.”

     나는 내 몫의 잔을 들었다.

     이미 잔은 병 안에 가득 찰 정도로 안에 와인이 들어있었다.

     알싸한 포도 향이 올라온다.

     발효된 포도 특유의 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안에 무언가를 솔솔 뿌려놓은 듯한 특유의 그 향이 코를 자극한다.

     “어떤 이들은 와인에 백은을 뿌려 마시기도 하지. 혹은 포도를 키울 때 아예 포도밭에다가 백은을 뿌리기도 해. 동물의 사체가 작물의 영양분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처럼, 뼛가루 또한 마찬가지지.”

     황제는 빈 잔의 아래를 잡고 계속 흔들었다.

     “어른이 된 기념으로 한 번, 마셔보겠나?”

     “아니요.”

     나는 거절했다.

     “계속 달콤한 것만 찾다 보면 결국에는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에.”

     “누가 쓴맛을 좋아한다고.”

     “이번 생은 쓴맛에 길들여져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단 걸 먹으면 때로는 물리는 느낌이 있더군요.”

     나는 와인이 든 잔을 내려놓았다.

     그 대신 옆에 놓여있는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그거 아십니까? 제 몸에는 백은이 섞인 술 대신, 솜누스 꽃잎이 깃들어 있습니다.”

     “솜누스…. 정말이지, 싫은 물건이야.”

     황제가 잔에 가득 찬 솜누스 차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은 흡혈귀의 뼛가루를 잘 섞기만 하면 그 어떤 꿈보다도 행복한 꿈으로 초대하는 주제에, 정작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노스트럼의 그 위ㅡ대하신 골드드래곤의 안배라니.”

     “현실의 어려움에서 잠시 인간이 꿈을 꾸면서 행복을 즐기기를 바라는 물건일 뿐이죠.”

     솜누스 꽃은 꿈과 환각을 조작해 사람을 행복에 빠뜨리는 물질이 있다.

     흡혈귀의 뼛가루는 이 솜누스 꽃의 작용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백은 자체는 인간을 순간적으로 흡혈귀처럼 강력한 육체의 힘을 가지게 만드는 건 맞지만, 꿈속으로의 진입과 환상을 즐기게 만드는 건 솜누스 꽃이 가진 자체적인 힘이다.

     “단지 그걸 우리는 태양과 자연의 흙이 아닌…황금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 자라게 만들어, 꿈에서 깨어나는 ‘망각’의 효과를 일으키지 않게 조정했을 뿐.”

     그게 ‘지하’라는, 햇빛 없이 자란 솜누스 꽃은 약간 경우가 달라질 뿐.

     “그동안 백은을 통해 많은 꿈을 접했습니다.”

     “그 꿈을 통해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나?”

     “아쉽게도.”

     “그런가.”

     황제가 옅게 웃는다.

     “자네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제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였고, 사실상 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제거해줬으니 황제로서는 뭐든지 해줄 수 있겠지.”

     “그렇겠죠.”

     “그대는, 무엇을 원하나?”

     “죽어주시겠습니까?”

     나의 질문에 황제의 미소가 짙어진다.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뭐든지 해달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죽어달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의 죽음이라….”

     황제가 잔을 내려놓으며,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응접실을 걷기 시작한다.

     “죽어줄 수 있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나의 뒤를 이어받아 테르시안 제국의 황제가 되고, 아스타시아와 낳은 아이가 좋은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보다도 더 뛰어난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야.”

     황제가 문밖으로 나가려고 한 순간, 몸을 돌린다.

     “그런데 그렇게 할 자신 있나?”

     “…….”

     “아스타시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계속 불안감에 빠진 채, 언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본심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는 게 평생 가능할까?”

     “불가능하겠죠.”

     결코,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당신은 언젠가는 알아차릴 테니까.”

     “고작?”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황제는 은근히 자녀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답변은 어땠을까.

     나름 잘 얼버무렸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마도 황제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은 알고 있지. 자네가 자식을 낳기를 꺼린다고 해도, 아스타시아가 아이를 원한다면 자네는 기꺼이 아스타시아를 위해 아이를 선물할 것이야.”

     황제의 말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었다.

     “둘 다 아이를 원하지 않을 리가 없지. 한 사람이 한사코 반대한다면 그건 아스타시아일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아스타시아는 황제를 두려워하고 있어. 황제의 방식을, 황제의 삶을, 그리고 자신이 겪은 수많은 죽음을.”

     아스타시아는 겪었다.

     수많은 ‘아스타시아’ 후보 중에서, 자신이 유일한 아스타시아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모든 과정을.

     황손녀가 되어 황궁의 정원을 뛰어놀기 위해, 그 정원의 거름이 되었던 수많은 이름없는 백발의 소녀들을.

     “아스타시아는 두려워하지. 자기가 낳은 아들이나 딸이 그런 꼴이 될까봐.”

     “틀렸습니다.”

     “틀렸다?”

     “사랑하는 남자의 자식이 아버지를 잘못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될까봐 걱정하는 게 더 크거든요.”

     “…흐하하!”

     황제가 배를 잡으며 웃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이 지브롤터의 자식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한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가?”

     “제 생각이 아니라, 아스타시아의 생각인 겁니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게 아니라, 본인에게서 그렇게 들은 거라면 그런 거겠지.”

     황제가 비웃듯이 입꼬리를 비틀며 내 앞에 섰다.

     “그렇다면 나는 그 대답에 대하여 어떻게 답해주면 좋을까.”

     황제가 묻는다.

     “둘의 자식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보다 무능하고,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보다 통솔력이 부족하고, 누아르 지오 노스트럼보다 더 사납고, 레타르 지오 노스트럼보다 더 잔학하며,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에게 있어서는 이름조차 기억할 필요 없이 버려버린 수많은 폐기 번호만도 못한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그레이와 아스타시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황태손으로 삼아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그런가.”

     황제가 낮게 웃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지.”

     “…….”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이 자리에서 공언한다. 두 사람의 자식은 그 능력이 설령 일천하다고 하더라도, 그레이와 아스타시아라는 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자기 능력을 입증한바. 그 아이를 잡아먹지도 않을 것이며, 혹독한 교육을 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서로를 죽고 죽이는 어린 시절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강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을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

     “…….”

     “이 말을 듣고 싶고, 이런 미래가 그려지기를 바라는가?”

     “예.”

     “예?”

     “바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원이라거나, 희망이라거나.

     그런 기대는 사람의 자유다.

     “마치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제 아버지를 밀어내고, 샤를로트 렘부르 군터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죠.”

     “…….”

     “망상은 자유입니다.”

     “망상은, 자유라.”

     황제가 피식 웃으며 내 허리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만들어 내는 오러 블레이드라거나, 내 목을 치기 위해 그 칼을 겨누는 것 또한?”

     “그리고, 그걸 베어내는 것까지.”

     “그렇군. 하지만 묻겠네.”

     황제가 너무나도 여유롭게 뒷짐까지 지며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인다.

     “자네는 그레이 지브롤터가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을 죽인다는 상상이 가능한가?”

     “…….”

     “관념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목을 벤다? 심장을 찌른다? 아니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인 것처럼 반으로 갈라버린다?”

     “…….”

     “그렇게 죽인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부활하는 것조차 걱정하여 이곳 제국의 끝까지 석관에 넣어와서는 기어이 백은으로 비석으로 만들어 버린 자네가, 낙관적으로라도 황제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언제나, 상상만 할 뿐입니다.”

     황제의 말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능한 자식이 자신의 대를 잇는다. 합스베르크 황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죠.”

     “그러하지.”

     “설령 그레이 지브롤터와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의 자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자신의 완성은 그레이의 몫이지만, 그레이의 완성은 누가 하겠는가.”

     “…….”

     “후후후.”

     순간적으로 황제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젊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기에, 절로 짜증이 일어났다.

     “젠장. 회귀고 나발이고, 일찍부터 가까이 지내지 말 걸 그랬습니다.”

     “이제와서?”

     “포기하게. 아니….”

     황제가 사라지며, 내 뒤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은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아.”

     나의 옆에 다가온 그 남자는, 나와 똑 닮아있었다.

     “몇 번이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10년 동안 생각해 봐도 결론은 변하지 않지.”

     피를 뒤집어쓴 변경백, 매국노가 말한다.

     “오히려 이번 생을 통해 더욱더 알게 된 것까지 더한다면, 너는 결코 벗어날 수 없어. 합스베르크라는 인간으로부터.”

     “…….”

     “아스타시아가 만일 네 발목을 붙잡는 모습을 보인다면, 합스베르크는 가장 먼저 아스타시아를 죽일 인간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를 망가뜨린 존재로서.”

     매국노 그레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심은 변하지 않았겠지?”

     “아아.”

     언제나 그랬지만.

     “합스베르크 황제를 죽인다.”

     그 결심은 아스타시아가 살해당했던 그날로부터, 단 한 순간도 나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내 신념이니까.

     “그렇다면, 잔을 들어라.”

     매국노 그레이가 직접 내게 잔을 건넨다.

     백은이 섞인 달콤한 와인이 아닌, 유리잔 가득 채워진 쓰디쓴 솜누스 차를 건넸다.

     “행복한 꿈이었나?”

     “…아니.”

     나는 잔을 들었다.

     “행복해질 거라는 망상에 불과했지.”

     나는 그대로, 솜누스 차를 들이켰다.

     “명심해. 네 행복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는 것을.”

     세상에 붉은 폭풍이 몰아치며, 매국노 그레이가 나를 향해 정중한 제국식 예법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 행복은….”

     “아스타시아.”

     나는 완전히 비워버린 잔을 앞으로 뻗었다.

     “아스타시아가 현실에 있는데, 내가 여기에 머무를 이유는 없지.”

     쨍그랑.

     * * *

     “…….”

     눈을 뜬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 자기 전에 봤던 천장.

     “정신이 드나?”

     “…….”

     내 옆.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팔짱을 낀 채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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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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