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08

       얼마나 기절해 있었을까?

       

       “으윽.”

       

       레니냐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어깨 부분에서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분명히 팔이 날아갔었는데…….’

       

       어째서인지 잘렸던 양팔이 멀쩡히 복구되어 있었다. 징징 울리는 느낌은 남아있었지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되신 거지?’

       

       레니냐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널브러져 있던 낫과 망치를 줍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에테르는 길라흐에게 전격을 맞고 뻗어있었다. 배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린 것이, 보통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신이 가진 정령 참 맛있게 생겼군요. 가지고 놀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흐흐흐.”

       

       길라흐는 갈고리를 털며 에테르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막아야 한다.

       

       레니냐는 사슬 달린 낫을 던져서 길라흐의 목을 휘감았다.

       

       “뭐, 뭐냐…!”

       

       전진하려던 길라흐의 몸이 뒤로 당겨진다. 레니냐는 반대쪽 팔을 최대한 뒤로 내빼었다. 회전 운동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빠악!

       

       금빛 오함마가 길라흐의 안면에 작렬한다. 길라흐는 컥, 하는 신음을 흘리며 땅으로 내리꽂혔다. 척추와 경추가 뒤틀리며 그의 허리가 활대처럼 휘었다.

       

       [▶ 해방의 사슬 : ‘분노’ 상태에서 권세가에 대한 이동력을 0으로 만듦.]

       

       촤라락!

       

       레니냐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사슬을 휘감았다. 길라흐의 몸이 옴쭉 못하도록 단단히 결박된다.

       

       “이, 이 미천한 년이! 사지를 잘랐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끝이 아니야.”

       

       금칠이 된 혁명의 낫이 사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끄아아악…!!”

       

       레니냐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길라흐는 되도 않는 개똥철학을 늘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인생 멘토나 다름없는 선생님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다.

       

       “백번 죽어도 모자랄 놈아.”

       

       레니냐의 안광에 스산한 빛이 어린다.

       

       [▶ 혁명(革命) : ‘분노’ 상태에서 권세가에 대한 물리 데미지 +40000%. 단, 즉사는 불가능.]

       

       쾅, 쾅, 쾅!

       

       우선 세 번, 레니냐는 길라흐를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첫 번째에서 오똑한 코가 부러지고, 두 번째에서 이빨 몇 개가 나가떨어졌다. 마지막 세 번째에서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지며 벌겋게 충혈되었다.

       

       “이 썅년아아!!”

       

       길라흐는 ‘초승달’을 사용하여 안면을 회복했다. 부러진 부분이 마법 한 번에 고쳐지며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연달아 망치를 내려찍는다. 그럴 때마다 길라흐의 몸통이 활어처럼 퍼덕거렸다.

       

       “씨발, 그만! 아파! 대체 왜! 아프다고! 그마안…!”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하더라도 고통은 잔상이 되어 남는다. 남을 고문하는 걸 싫어하는 레니냐였지만, 이 녀석만큼은 조금만 더 고통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얼굴을 후렸다.

       

       그렇게 2백 대 가까이 얻어맞은 길라흐는 밥 위에 얹어진 생선살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

       

       맞다, 선생님.

       

       레니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에테르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숨을 씨근대며 레니냐의 부축을 받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에테르의 입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한 적색이었다.

       

       에테르는 앨리스의 도움을 받아 배에 난 구멍을 메웠다. ‘포말의 반지’ 효과 덕분에 레니냐나 다른 사람은 따로 처치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마법진이 그려진 곳까지 다가갔다. 그곳에는 기다란 스크롤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거다.”

       

       에테르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에테르는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에게 전했다.

       

       “모두 잘 들으십쇼. 우리는 이 마법진을 타고 아이비 섬으로 돌아갑니다. 가는 즉시, 호천의 잔당을 소탕할 준비를 하십시오. 저는 잠깐 쉬고 있을 테니까…….”

       

       모두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는 비척거리며 길라흐가 대자로 뻗은 곳까지 걸어갔다. 길라흐는 사슬에 묶인 채 기절해 있다가, 그녀가 다가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한번, 초승달로 신체를 회복한 상태의 길라흐.

       

       “무의미한 발악을 하는구나.”

       “네 이년…!”

       

       길라흐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열등한 년! 쓸데없이 잔머리만 좋아서는! 당장 풀어라! 당장 풀라고!”

       “미안하지만 그건 쉽게 못 풀거든. 내 사랑스러운 제자의 화가 가라앉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야.”

       

       현재 레니냐가 길라흐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묶어둘 수는 있었다. 에테르가 레니냐를 데려온 이유였다.

       

       촤악! 장장 5m짜리 스크롤을 부채처럼 펼쳤다. 회로에 18시버트의 마력을 흘려 넣고는 길라흐의 배 위에 툭 던져두었다.

       

       그 곁에 쪼그리고 앉는 에테르. 마도사들이 공간이동진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남는다. 

       

       “후우.”

       

       마력초를 물고 뿌연 연기를 내뱉는다.

       

       두 사천의 시선이 맞닿는다.

       

       “조금 있으면 카우렐리아의 여름도 끝나가는군.”

       

       빠득, 하고 기라흐는 이를 갈았다. 그의 눈동자가 에테르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에테르가 말을 이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지. 적당히 선선하고, 또 포근한 기운도 있고. 쌀쌀맞아서 감기에 걸리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가을이 좋아. 적어도 이런 쨍쨍한 날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문학을 경시하던 길라흐는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보다는 이 결박을 풀고 눈앞의 상천을 꿰뚫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에테르는 연기를 마저 뱉어낸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 이 이상으로 딱히 할 말이 없군. 유감이다.”

       

       그녀가 뒤를 돌았다.

       

       순간, 길라흐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내 말 안 들려? 풀라고! 당장! 야, 이 썅년아! 어딜 가느냐!!”

       

       허리춤에 놓인 널따란 스크롤이 신경 쓰였다. 뭔가, 폭발할 것 같은 그런 느낌.

       

       길라흐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자, 잠깐! 우리 협상을 합시다! 거기 서란 말입니다! 저를 풀어주신다면, 그 뭐, 뭐냐……! 마왕님께 잘 얘기해서 다시 연줄을……!”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에테르에게 사정한다.

       

       그런다고 상천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야! 이봐요! 잠깐만……!!”

       

       어쩐지 허리 부분이 뜨끈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곧 뜨드미지근함은 따듯함으로, 따듯함은 뜨거움으로 변해갔다.

       

       길라흐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작별이다, 길라흐.”

       

       머지않아 에테르 일행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저, 저 씨발 천한 년이─!!!”

       

       그것이 호천의 유언이 되었다.

       

       

       **

       

       

       하늘 위로 장성(長星)이 피어올랐다.

       

       초전도체로 인해 저항이 0이 된 환경 속에서, 각 회로의 전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초기 격발 에너지가 백사장 주변의 바닷물을 빠르게 증발시켰다. 바닷물은 염분과 증류수로 나뉘었으며, 증류수는 다시 기화했다.

       

       전기분해가 된 물은 수소와 산소로 치환된다. 수소는 연료요, 산소는 촉매였다.

       

       뽀얀 증기의 바다 위로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마치 빅뱅 후 처음 3분을 재현한 듯한 광경이었다.

       

       수소 분자는 쪼개질 만큼 쪼개졌다. 막대한 온도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플라스마가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핵융합이 시작된 것이다.

       

       한계는 없었다. 바닷물이 곧 흑주(黑晝)의 질료였다.

       

       구름은 가면 갈수록 세를 불려 나갔다. 최소 수십에서 수백 킬로미터. 순수하게 밀집된 질소가 절연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융합 반응은 이어졌다.

       

       심지어 그 질소도 상당수는 광양자를 맞고 쪼개졌다.

       

       방출하는 에너지는 1천만 전자볼트. 감마선 대역이었다.

       

       “──!!!”

       

       4천 km 가까이 떨어진 아이비 섬이 통째로 흔들렸다. 세찬 파도가 테트라포드를 전부 쓸어갔다.

       

       창문도 일제히 깨져나갔다. 건물의 흔들림은 엘프국의 수도와 제국의 수도를 넘어 엘랑카야 산맥까지 전해졌다.

       

       “장관님! 장관님!”

       

       에테르 일행은 공간이동진을 타고 돌아오자마자 하나둘씩 넘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장관님, 무사하셨습니까?”

       “괜찮으니까 현황부터 보고하세요!”

       

       경호실장인 카리나가 깨진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태, 태양이……!”

       

       

       **

       

       

       “……태양이, 사라졌다.”

       

       서부 전선.

       

       요르문간드는 플루토늄을 만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디검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기구한 일이로구나.”

       “비가 오려는 걸까요?”

       

       고개를 내젓는 요르문간드.

       

       그녀가 땅을 짚으며 탄식했다.

       

       “지면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이건, 멀리서 무언가가 터진 거야.”

       

       고룡인 요르문간드는 예전에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화산이 폭발한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늘이 검게 변한다.

       

       하지만.

       

       “…화산은 아니다. 쇄설물이 내리지 않아.”

       

       화산재라면 땅에 떨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눈앞의 하늘은 검게 변하기만 했을 뿐, 입자 대부분이 성층권으로 날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대기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내려오기도 했지만, 미량에 불과했다.

       

       요르문간드는 땅을 박차고 상공 10km까지 날아올랐다. 그곳에서 입자를 확인하고 냄새를 맡았다.

       

       “이건….”

       

       수소, 헬륨, 그리고.

       

       “리튬 맛이 나는군.”

       

       가벼운 원소들의 맛이다.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요르문간드는 얼굴을 굳힌 채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아기 새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츨링들에게 고했다.

       

       “상천이 처음 만들었던 건 흑주가 아니었다. 검은 낮이라, 그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노라.”

       

       에테르가 자신의 고유마도를 완성했다. 이로써 전쟁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신다는 말입니까?”

       

       민천 휘하의 마수들은 하나같이 뭐 씹은 표정이었다. 이러다가 전쟁에서 지면 금안과 수인은 깡그리 몰살될 게 분명했다.

       

       어떤 드래곤은 상천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천을 무찔러야 리바이어던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간언했다.

       

       어떤 수인은 거꾸로 상천에게 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승산은 없으니 마왕군을 버려야 한다는 논지였다.

       

       사실 요르문간드의 군대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민천을 중심으로 뭉친 1번 집단군은 대개 인간과 엘프에게 박해받았던 이들이었다.

       

       따뜻하게 먹고 잘 곳이 없어서 군에 입대한 자들. 차별을 뒤엎고, 금안과 수인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왕과 뜻을 같이한 자들.

       

       “적당한 때를 찾아 귀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군주와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느니 고명한 용족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부하들은 요르문간드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을 내렸다. 이게 다 상천이 만든 발명품의 위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항복해야 합니다.”

       “고룡이시여, 맞서 싸워야 합니다!”

       

       드래곤은 신뢰를 중요시한다. 나머지 수인은 안위를 중요시한다.

       

       “……여기서 무를 수는 없는 법.”

       

       그리고, 그녀는 드래곤이었다.

       

       요르문간드는 병부를 치켜들며 외쳤다.

       

       “전군, 예정대로 공세를 진행한다. 9월에 접어드는 즉시 수도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모두 죽을 각오로 임하라!!”

       

       민천은 의리를 지키고자 그런 결단을 내렸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도 점점 완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랑과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먼저 전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피디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부분은 차기작 기획과 외전 연재 일정이었죠.

    우선 외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외전은 30편 분량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연재 예정일인 5~6월이 바쁜 관계로 일일연재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심하면 격일연재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본편은 저번 작가후기에서도 말씀드렸듯이 330화 부근에서 완결날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죠. 짧게만 말씀드리자면, 장르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아무튼, 본 작품은 외전까지 360화 완결을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편으로 계산하면 1년이겠죠? 짧으면서도 오랜 기간 글을 써왔다는 게 느껴집니다.

    생각해 보면 정리해야 할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밀린 후원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외전 트리트먼트도 짜야 하는군요. 이번 달과 다음 달은 여러모로 바쁜 나날들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후원 감사는 이번 달 말일에 공지를 올려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선 독자 여러분의 너른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아이비 올림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