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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8

       

       

       

       

       

       308화. 침묵 ( 1 )

       

       

       

       

       

       균열 너머로 몸을 던지기 무섭게 보이는 것은 이전보다 제법 화려해진 색을 자랑하는 바다였다.

       부분적으로 까만색이 보이긴 했지만, 절반 정도의 비율을 차지한 화려한 색채가 인상적인 곳.

       

       그다음으로 보이는 건, 모래사장에 서 있는 작은 크기의 케넬름과 그 앞에 서 있는 괴상한 회색 생명체.

       

       “으음?”

       

       케넬름의 크기가 피규어 수준으로 작다. 아니면 내가 커진 건가? 회색 생명체도 굉장히 작았다.

       손으로 내려치면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263/???>

       

       케넬름의 머리 위로 숫자가 보였다. 이게 뭔가 싶어 살짝 눈을 비볐다가, 급하게 오느라 색안경을 그대로 작동시킨 채였다는 걸 떠올렸다.

       

       《ㅡㅡㅡ!!》

       

       회색 찰흙 같은 생명체가 나를 향해 작게 포효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봤더니, 머리 위로 믿을 수 없는 수치가 나타났다.

       

       《0》

       

       “…0?”

       

       지금까지 색안경을 통해 이것저것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

       

       대상이 무엇이라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0이라는 숫자는 나올 수 없다. 하다못해 개미도 1에서 2의 숫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숫자가 작았으면 작았지, 0은 돌멩이에서나 나오는 수치다.

       

       《…ㅡㅡㅡ!》

       

       생각지도 못한 숫자를, 정말 의외의 대상에게서 발견해 잠시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저건 도대체 뭐지? 살아있는 진흙 괴물인가? 무생물? 아니면 악마의 일종?

       

       그사이 진흙 모양의 회색 괴물은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등 뒤의 균열로 몸을 던졌다.

       

       “자, 잠깐!”

       

       균열로 사라지는 괴물의 뒤를 잡으려 나도 모르게 균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흙 생명체가 몸을 던진 균열은 나에게는 조금 작은 크기였지만, 한 손 정도는 넣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꽈악-

       

       “으겍…”

       

       균열에 손을 넣기 무섭게 강한 압박감이 손을 조여온다. 병원에서 혈압을 재는 이상한 기계에 팔을 넣었을 때와 흡사한 기분.

       강한 압력에 손을 움직일 수 없다. 좁은 틈에 팔을 억지로 쑤셔 넣은 듯하다.

       

       결국 나는 균열에서 손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손을 빼자 균열은 스르륵 움직이며 스스로 사라졌다. 결국 완전히 놓쳐버린 회색 진흙 괴물.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숫자가 완전히 0이 나온 건 녀석이 유일했는데.

       당황한 마음에 놓쳐버렸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다. 어렸을 적 나무에 붙어있는 엄청 장수풍뎅이를 놓쳤을 때와도 비슷했다.

       내가 조금 더 잽싸게 움직였다면 놓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하, 하아… 흐아…”

       

       피규어 크기의 케넬름이 외마디 탄식을 지르며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기에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괜찮아?》

       

       쩌렁쩌렁한 성량에 케넬름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이렇게 목소리가 크게 나올 줄 몰랐기에 몇 차례 헛기침하며 아아ㅡ 적당한 목소리를 찾아갔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큰 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뭘. 별것도 아니었는데. 방금 그 회색 진흙 괴물 때문에 그렇게 알람을 보낸 거야?》

       

       조심스럽게 살펴본 케넬름은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좀 커진 나의 눈에는 회색 진흙 괴물이 액체 슬라임 정도로 보였지만, 케넬름의 입장에서는 집채만 한 괴물이었을 것이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다음에야 진정한 케넬름이 내 손 위에 우뚝 서서 나를 마주 봤다.

       손에 정교한 피규어를 들고 있는 기분이다. 살아 움직이는 아주 예쁜 피규어.

       

       “……제가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케넬름이 굳은 눈으로 나를 올려봤다. 딱딱하고 심각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굉장히 진지한 얘기를 할 거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긴다.

       

       《어, 으음. 말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 케넬름이 몇 번인가 크게 숨을 마시며 호흡을 고르더니.

       

       “후우… 위대한 분이시여, 이건 당신의 이전에 있던 다섯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

       

       “그대께서는, ‘나’라는 개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케넬름이 천천히 입을 열어, 나 이전에 있던.

       그리고 내가 어렴풋하게 형상으로 봤던 다섯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그것’은 본능의 외침에 따라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쉴 틈이 없다. 맹렬하게 몸을 움직여 원래 있던 곳으로 향한다. 

       

       《ㅡㅡ…》

       

       간신히 도착한 둥지에 몸을 눕혔더니 그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둥지에 도착한 ‘그것’은 방금 있었던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지긋지긋한 벽을 넘어서 도착한 괴상한 공간,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몸과 달콤한 듯 아닌 듯 미묘한 향을 풍기던 존재.

       

       그리고, 그리고ㅡ

       거대한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괴물.

       

       보는 순간 온몸이 쩌릿하게 저리며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충격이 덮쳐왔다.

       

       거대한, 그리고 압도적인ㅡ

       달콤한 향기.

       

       ‘그것’은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거인은 강하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지금의 자신이 맞서려고 한다면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후일을 기약하며 지금은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방금 마주친 거대한 존재를 기억하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먹던 모든 것은 그 거인에 비하면 쓰레기에 불과했다.

       

       강렬하게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 틀림없다.

       그 거인은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존재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살점을 자랑할 것이다.

       

       더욱더 강해져야 했다.

       거인을 먹기 위해서.

       

       지금 당장은 무리였지만, 언젠가라면 반드시 먹을 수 있다.

       

       ‘그것’의 존재를 이루는 가장 본질은 배고픔이었고, 그 위에 쌓인 것은 식탐이었기에.

       존재 이유는 먹고 또 먹는 것뿐.

       

       으적으적.

       

       그렇기에 먹이를 씹어먹으며 덩치와 힘을 키웠다. 다행히도 먹을 것은 충분했고, 할 수 있는 일은 먹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차원과 차원의 틈에 위치한 어딘가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는 계속해서 자신의 몸과 힘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극 느꼈다.

       

       이걸로는 부족해.

       

       이 쓰레기 같은 먹이로는 강해지는 것에 한계가 있다. 더 양질의, 풍부한 먹이가 필요하다.

       

       판단하고 생각한다.

       오로지 식탐에서 비롯된 본능으로 몸을 움직인다.

       

       차원의 틈은 지도 없는 쥐구멍과도 같은 곳. 차원 사이 틈으로 ‘그것’은 능숙하게 자신의 몸을 구겨 넣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먹이. 새로운 먹이가 필요하다.

       

       저번의 그 거인은ㅡ 아직 무리다.

       덩치를 더 키워야 한다.

       

       텅-!

       

       문득 도착한 벽을 두들기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 너머, 벽의 너머로 달콤한 먹이의 내음이 가득하다.

       

       뚜드드득-!

       

       얇은 벽을 손쉽게 찢어버린 ‘그것’은, 천천히 벽 너머의 공간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따가운 햇빛이 비쳐온다.

       

       “으, 으아아!! 괴, 괴물! 괴물이ㅡ”

       

       으적.

       

       아아.

       맛있는 것들이 사방에 가득하구나.

       

       

       

       ***

       

       

       

       “어이, 여기 수통 놓고 간 녀석 누구야?”

       

       “항마부랑 성수 받아가! 각자 2개씩이다!”

       

       “10분 뒤에 북문 앞으로 집결이다! 북문 앞으로!”

       

       악마의 활동이 뜸해지며 아주 잠깐의 평화를 즐겼던 만신전.

       

       그간의 짧은 여유는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성기사와 사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대륙의 곳곳에서 광폭해진 마수의 준동이 난리인 까닭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불길한 흑색의 구슬.

       

       이스칼의 발견을 시작으로, 온 사방에서 흑색 구슬을 삼킨 마수와 짐승으로 인한 피해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피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치안의 공백마저 발생시킬 정도.

       

       신성 로마니안 제국마저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안을 유지해야 했으니, 변방 약소 왕국의 경우에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출발한다!”

       

       만신전에서 온 대륙으로 출발하는 원정대가 떠나갔다. 마수로 인한 피해는 만신전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만신전은 제법 여력이 있으니 구제 활동의 일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검은 구슬을 삼킨 마수는 그 덩치가 4, 5배는 우습게 커졌으며 놀랍도록 교활해졌다. 덕분에 토벌은 난항을 겪기 일쑤.

       

       그러던 와중,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단장님! 여기 사람의 피가 있습니다!”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실종 사건.

       

       피해자가 사라진 장소에는 사방으로 흩뿌려진 핏자국만이 존재했고, 범인은 단 하나의 흔적만을 남겼다.

       

       “…도중에 갑자기 발자국이 사라졌어. 하늘로 날아간 것처럼.”

       

       “그러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마수의 종류인가?”

       

       “아니야. 하늘로 날려면 마지막 발자국이 조금 더 깊게 남는데,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고… 애초에 이걸 발자국이라고 볼 수 있나?”

       

       실종자의 흔적을 추적하던 사냥꾼 출신의 사도가 난색을 보였다.

       

       사건 현장에 남은 무언가의 흔적.

       땅에는 마치 무거운 자루를 질질 끈 자국이 길게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마치 하늘로 솟은 것처럼 말이다.

       

       “이건… 내 능력 밖의 일이군.”

       

       이런 흔적은 실종 사건이 발생한 모든 곳에서 공통으로 발견됐다. 모두 한 녀석의 손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범위도 얼마나 광범위한지, 북쪽 마수의 산맥 끝자락부터 대륙의 남쪽 끝 호루트 해곡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대륙의 전체를 아우르는 실종 사건이었다.

       

       범인의 뒤꽁무니도 보지 못하고 헤매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폭주하는 마수는 점점 늘었고, 그에 비례해서 원인 모를 실종 사건도 늘었다.

       

       쾅!

       

       “우선 이 빌어먹을 구슬의 원인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전투 인원들의 피로가 심각합니다! 벌써 비전투 손실 인원이 발생하고 있다고요!”

       

       “요번 주에 집계된 실종 사건만 벌써 50건에 다다랐습니다. 요즘 악마가 뜸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필히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접근하는 것이ㅡ”

       

       덕분에 만신전에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폭주하는 마수를 토벌하고, 부상자의 구제 활동과 무료 급식소를 운영했으며, 악마의 건으로 의심되는 실종 사건도 전담 부대를 꾸려 운용했다.

       

       대륙은 점점 혼란에 휩싸였다. 준동하는 마수와 계속되는 실종 사건.

       

       민심이 뒤숭숭하였으니, 길거리의 아이들도 칼쪼가리를 차고 다녔다.

       

       그럴수록 민중은 더욱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ㅡ 우리를 보살피소서.

       

       허나, 하늘 높이 떠오른 눈동자의 별자리는 가만히 빛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두 번 몰아치는 폭풍같은 후원…!! 그야말로 폭풍후원…!! 그야말로 폭풍후원…!! 아앗…!! 노벨이가 또 좆소 행동을…!! 이번에야말로 떡볶이 3개월 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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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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