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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9

    잿빛 머리카락의 소녀, 잿빛 소녀는 언제나 행복했다.

    소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행복하다고.

    아침을 따뜻하게 만드는 토스트의 향기와 창문에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아파트 주변을 가득 채운 가로수의 푸른색과 특유의 나무 냄새가 느껴졌다.

    푸른 나무의 길 끝에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학교가 보였다.

    “어서 나와서, 밥 먹으렴. 학교 가야지!”

    소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소녀는 “네, 갈게요!”라고 대답하고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느끼기에 언제나 행복한 가족이었다.

    언제나 사랑을 주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

    히히.

    소녀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와서, 작게 웃었다.

    소녀는 한 손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물병을 들고 자신의 물컵에 물을 따르는 순간, 갑자기 물이 붉게 변하더니 피처럼 걸쭉해졌다.

    “!!!”

    깜짝 놀란 소녀는 컵을 놓치고 쏟아버렸는데, 흘린 것은 맑은 물이었다.

    “괜찮아?”

    하나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보는 가족들.

    소녀는 마치 눈에 비쳤던 이상한 광경을 지우려는 것처럼 눈을 비빈 뒤, 떨어진 물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물.

    평범한 물이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한 광경을 봐서 그런지, 조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식사를 마치고, 학교를 향해 가는 등교길.

    잿빛 소녀는 정갈하게 꾸며진 인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도 미니 사신이 없네.’

    사실 부모님이 송파구로 이사한다고 들었을 때, 가장 기뻐했던 이유 중 하나는 미니 사신 때문이었다.

    미니 사신이 가장 많이 돌아다닌다는 송파구!

    물론 소녀의 부모님은 조금 다른 이유로 굉장히 기뻐했었다.

    ‘가장 안전하다는 송파구에서 신축에 한강 변 아파트라니.’

    원래 굉장히 비싼 집인데,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다.

    소녀는 부모님과 달리 그저 미니 사신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미니 사신이 많다는 송파구로 이사했지만, 정작 미니 사신을 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이상하게도 잿빛 소녀의 주변에는 미니 사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전혀 보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아파트 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미니 사신들이 뚜방뚜방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아파트 단지에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조금 슬펐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나에겐 노란 사신이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아지트. 

    나만의 미니 사신 친구.

    히히, 오늘도 학교가 끝나면 만나러 갈 생각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세희 연구소 안뜰.

    나는 강철탑 감시를 그만두고, 세희 연구소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강철탑 앞에서 뒹굴뒹굴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없고 음산한 숲속에서 계속 있다 보니, 짜증이 마구마구 돋아나서 버틸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 오브젝트로 태어난 뒤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 서울숲에서 지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화풀이로 강철탑 깨물기.

    회색 사신 드롭킥 날리기.

    ‘뀩’으로 부스러트리기.

    파괴를 촉진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그래서 ‘강철탑 당번’으로 선택된 시무룩한 황금 사신 둘을 남겨두고, 나는 세희 연구소로 돌아와 버렸다.

    히히.

    분명 같은 햇살일 텐데, 서울숲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태양 빛을 받으며 뒹굴뒹굴.

    태양 빛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켜듯이 팔다리를 쭈우우우욱 늘리고 있었더니, 안뜰에 마련된 TV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하고, 집값이 비싼 지역으로 꼽히는 송파구에 독특한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이 아파트는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되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 아파트의 과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아파트의 허가를 내준 공무원이나 관계자들 사이에서 잦은 사고사가 있었고, 이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불가사의한 사고사는 건설사 사장부터 시작해서 말단 임원까지 계속됐을 정도라서, 제대로 된 분양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한때 강력한 오브젝트의 소행으로 여겨졌고 조사 결과 연관 없다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길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부로 넘어간 아파트는 과거의 모습을 벗고, 공익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취약 계층에게….]

    최근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니 사신들도 가끔 기웃거리던 것 같던데, 요즘은 그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가 없네.

    뭔가 수상한 아파트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도중, 미니 사신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생!’

    ‘막내가 왔어!’

    시선을 돌려서 확인해 보니, 우주 정거장에서 봤던 여자와 초록 사신이 안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흠.

    갑자기 세희 연구소 안뜰에 미니어처처럼 작은 동물들이 돌아다니길래 뭔가 했더니, 초록 사신이 만들어 낸 동물들이었나 보네.

    사실 나는 안뜰에 오자마자, 그 신기한 미니 동물들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미니 토끼를 보는 순간 떠오른 ‘기발한 간식’을 실현하려고 했는데, 미니 사신들의 강렬한 반대로 안타깝게도 실현할 수 없었다.

    그 기발한 간식은 엄지손톱만 한 토끼를 한 아름 잡아서 만드는 꼬치구이였다.

    힝.

    한 꼬치에 미니 토끼 5마리씩 꽂혀있는 통 토끼 꼬치, 먹고 싶었는데….

    하지만 미니 사신들이 나를 해로운 오브젝트를 보는 표정으로 쳐다봐서 차마 시도할 수 없었다.

    하얀 아귀 꼬치랑 뭔가 다른 걸까.

    고통 여부랑 부활 여부 정도만 다른데 말이야.

    이제 초록 사신은 미니 사신들의 부탁을 듣고 손톱만 한 코끼리와 하마, 코뿔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록 사신은 하나뿐이라 그런지, 동물 창조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티라노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히히.

    제임스의 황금-메카-티라노 아머랑 초록 사신이 만든 디테일한 티라노의 조합!

    생각만 해도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심장은 없지만!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마시멜로 평원과 사탕 산맥의 사이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골짜기.

    미니 사신들에게 ‘하얀 아귀의 절규’라고 불리는 그곳에 붉은 사신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금발 소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붉은 사신들을 이끄는 조금 작은 붉은 사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가장 해맑게 뛰어다니는 붉은 사신은 다른 붉은 사신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 작아져 버린 상태였다.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비슷한 크기였고, 조금 지나니 살짝 작은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더욱 벌어져 버렸다.

    최초의 붉은 사신은 언제나 자기가 제일 언니라고 좋아했지만, 노는 모습을 보면 정반대로 보였다.

    엄청 귀여움받는 막내가 언니들을 휘두르고, 언니들은 웃으면서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혁명!’

    ‘혁명!’

    붉은 사신이 ‘혁명!’이라고 외치면 자매들이 같이 외쳐주고.

    뀨힝힝.

    붉은 사신이 하얀 아귀를 구워 먹으면 같이 구워 먹는 언니들 같았다.

    아마 ‘우리’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런 거겠지.

    부모님도 모두 살아있었고 할아버지도 이상해지기 전의, 행복한 시절의 우리들.

    금발 소녀는 고개를 돌려, 검은 요원에게 달라붙은 붉은 사신 자매들을 털어내며 그렇게 살짝 웃었다.

    이게 ‘우리’들의 해피 엔딩이라고.

    그 순간, 작은 붉은 사신이 하늘에 떠올라서 의지를 뿜어내었다.

    ‘원정!’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브젝트들이 많은 서울숲으로 원정하러 가자는 이야기였다.

    ‘….’

    해피 엔딩 맞겠지?

    ***

    현재 송파구에서 완공된 아파트 단지 중, 가장 화려한 아파트 단지.

    잿빛 소녀는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살짝 빠져서 노란 사신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섞여 우글우글.

    그러던 중, 약간 겁에 질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 사신이야.”

    “왠지 무서워.”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인도에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볼라드 위로 황금 사신이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황금 사신은 그저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상해.’

    황금 사신은 인간에게 해맑게 웃어준다고 들었는데, 이제까지 봤던 황금 사신들은 모두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위험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역시 인터넷은 믿을 게 못 되네.

    황금 사신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소녀에게는 ‘노란 사신’이 있다는 점이었다.

    ‘황금 사신과 달리 웃어주고, 놀아주는 나만의 친구.’

    오늘도 친구를 볼 생각에 잿빛 소녀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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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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