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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

       

         

         

         

        나이드리안은 자신의 방에서 여러 서적들과 종이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제도에 뒤늦게 도착한 엘프 사절단 덕에 에팔테르가에서 급히 귀환한 그녀는 한동안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마왕 토벌 여정을 하면서 이전보다는 못했지만 틈틈이 식물의 생육과 종에 대하여 연구하던 그녀였다.

         

        원로원은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못마땅해 했지만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었기에 딱히 드러내놓고 뭐라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이드리안이 제 할 일을 똑바로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노크와 함께 살며시 들어온 원로는 방안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이런 헛짓거리나 하고 있는 게냐.”

         

        “원로님….”

         

        “종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에 한가로이 공부나 하고 있어?”

         

        “아닙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종족을 위해서….”

         

         

        항변하려던 나이드리안은 원로가 혀를 탁 차자 위축되어 버렸다.

         

         

        “종족을 위한다 함은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서 마족과 마왕을 토벌하고 종족의 부흥을 위해 힘쓰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야.”

         

        “마족과 마왕 토벌은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제 연구가 완성만 되면 저희 엘프들은 다시….”

         

        “완수했다? 완수했다고?”

         

         

        원로는 책상을 쾅 치며 흥분했다.

         

        늘 여유를 갖고 미소 짓는 존재가 엘프이건만 최근 들어 그들은 쉽게 짜증내고 재촉했다.

         

         

        “마왕이 토벌되었음에도 마족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에팔테르가를 잊었느냐? 거리 한복판에서 보란듯이 사람을 죽였다지? 너 역시 직접 토벌대로 파견나가 본 사실이잖느냐?”

         

        “…맞습니다.”

         

        “쯧, 이럴 시간이 있다면 황태녀와 방패기사에게 가서 우리 엘프와의 계약을 이행하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어야지!”

         

        “저도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로님께서도 아시잖아요. 계약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면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이런 단순한 녀석을 보았나!”

         

         

        불호령이 떨어지자 소심한 나이드리안은 잔뜩 굳었다.

         

        저절로 시선이 바닥을 향하고 억울하지만 열지 못하는 입을 오므렸다.

         

         

        “이건 정치다. 친구와 하는 소꿉장난이 아니란 말이다. 약간의 명분, 억지와 그걸 받쳐주는 힘으로 관철시켜야 한다.”

         

         

        원로는 한숨을 쉬었다.

         

        종족을 대표하는 궁수로서 더할나위 없는 실력자지만 성정이 심약하여 그 외에는 모두 수준미달이었다.

         

        순진하고 경솔한 면모가 있어 어릴 적부터 엄히 가르쳤지만 끝까지 소심함을 고치지 못하고 눈치나 보는 얄팍함만 늘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성질이 풀릴 때까지 타박하고 싶었지만 나이드리안은 엘프가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채찍만으로는 인재를 굴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원로는 성질을 죽이며 나긋하게 위로했다.

         

         

        “네 고생이 크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엘프의 존망이 네게 걸려 있기에 이리 부담을 줄 수 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다오.”

         

        “아닙니다. 제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나이드리안은 크게 놀랐다.

         

        방금 그 말은 짐꾼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것이었다.

         

        어느샌가, 어쩌면 그녀는 애초에 짐꾼과 다를 바 없는 상황과 위치에 놓여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까 억지를 뒷받침해줄 힘이 필요하고 그걸 사용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원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엘프의 숲이 또 면적이 줄었다. 처음에 비하면 반이 넘는 면적이…!”

         

        “그럴수가… 작년까지만 해도 천년에 걸쳐서야 3할이 사라졌었어요. 1년만에 어떻게…?”

         

        “그것 보아라. 네가 아무리 식물에 대해 연구하였다 해도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만 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엘프들의 힘은 수와 터전에서 나온단다. 그런데 그 힘의 터전이 줄어들고 있어. 그나마 지금의 힘이라도 있을 때 맞서고 쟁취해야 한다!”

         

         

        원로는 확신을 가지고 나이드리안에게 강조했다.

         

         

        “우리 원로원을 비롯한 사절단도 같이 압박을 주고 있다. 용사 파티의 일원인 네가 종족의 첨병이 되어 활약해줘야만 해낼 수 있어.”

         

        “…알겠어요. 저도 포기하지 않고 종족의 염원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원로가 흐뭇해 한 덕분에 나이드리안은 비로소 눈치보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심한 이들이 으레 그러듯, 그녀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엘프 숲이 줄어드는 이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다시 늘리기 위한 연구는 할 수 있어.’

         

         

        연구도 성과가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나무 종자들을 개발한 지 오래였고 그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강화 연구만 남았다.

         

        이 모든 게 2년 전부터 자신에게 연구 비용을 대준 투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청난 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딱 그 정도의 투자였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건 최근에 그 투자자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비용을 대주기가 힘들다는 소식을 받은 것.

         

        마침 마왕 토벌 직전에 받았기 때문에 나이드리안도 제대로 신경쓰기 힘들었다.

         

        연구가 막바지까지 왔다지만 추가 투자가 없는 건 뼈아팠다.

         

        용사 파티원 개개인에게 전폭적인 지원금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왕 토벌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정비에 아낌없이 써서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만 더하면…!’

         

         

        혹시라도 투자자가 자금 사정을 회복해서 다시 도와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제 정말 곧이니까.

         

        똑똑

         

         

        “계십니까! 세계 우편부에서 왔습니다! 하이엘프 나이드리안님에게 편지요!”

         

         

        거짓말처럼 그를 떠올리니 파발이 왔다.

         

        언제 어디서든 유통의 특권을 가진 세계 우편부의 방문에 나이드리안은 화색을 띄며 문을 열었다.

         

         

        “나이드리안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여기 편지구요, 수령했다는 서명 부탁드려요!”

         

        “네, 네!”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환해졌다.

         

        반대로 원로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우편 배달부를 보내고 자리로 돌아온 나이드리안에게 원로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남자라도 생긴 게냐?”

         

        “네에? 제가요?”

         

        “…아니면 되었다.”

         

         

        자신에게 대놓고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원로도 머쓱하게 추궁을 그만뒀다.

         

        소심한 나이드리안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아닌 게 확실했다.

         

        싱글벙글 편지를 뜯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다급한 노크가 그녀를 방해했다.

         

         

        “네, 들어오세요.”

         

        “나이드리안님! 라인폴드 경의 긴급호출입니다!”

         

        “갑자기요?”

         

        “지난번 에팔테르가에 이어 발터크루아에도 마족이 나타났다는 전갈입니다! 거기에 에팔테르가 토벌대였던 성녀님과 티그리아님 두 분도 마용사 파티 일원이라는 마족과 접촉 후 제도로 후퇴하셨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이겠죠?!”

         

        “그리고 용사 루시에나 에스텔님의 행방도 알아내셨다고 합니다!”

         

        “…!”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원로님!”

         

        “당장 회의에 가거라, 나도 사절단으로 돌아가 이 소식을 알리겠다.”

         

        “네!”

         

         

        그렇게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책상 위의 편지였다.

         

        나이드리안의 유일한 위안거리이자 꿈이 담긴 편지.

         

        그 편지봉투에는 다음과 같이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혔있다.

         

         

        [발신인: 투자자 이씨]

         

         

         

        —

         

         

         

         

        “여~어.”

         

         

        푸른 피부의 백발 사이드 테일이 회색 칼단발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늦었네요, 창잡이.”

         

        “걸어왔거든.”

         

        “우리의 계획은 속도가 생명인 거 몰라요?”

         

        “엄청 장기 플랜이잖아~. 단계도 많고, 늦지만 않으면 되지~.”

         

        “하아.”

         

         

        환술사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창잡이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궁금한 건 있었다.

         

         

        “있지, 린은 어땠어?”

         

        “말해 무엇 하나요? 린은 린 그대로였어요. 올곧고 상냥하고.”

         

        “후아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환술사의 입을 통해 듣는 건데도 창잡이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린답게 온갖 아픔을 품고서도 웃고 있었죠.”

         

        “흐아아….”

         

         

        둘 다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창잡이가 발끈했다.

         

         

        “원래대로라면 린은 우리 동료가 되었어야 했는데!”

         

        “네에, 그 말대로에요. 그랬다면 제가 그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고 보듬어 줬을텐데.”

         

        “헤에? 이상하네? 그 역할은 내가 해야하는 거 아닌가?”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죠?”

         

        “간단한 이치잖아?”

         

         

        창잡이는 창을 꼬나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 옆에는 지금 용사가 있잖아? 그렇다면 린이 우리 동료일 때는 용사의 대척점인 내가 곁에 있어줘야지?”

         

        “네, 간단한 이치네요.”

         

         

        환술사도 동의했다.

         

         

        “그럼 이 세계선에서는 제가 용사의 라이벌로 뽑혔으니 제가 린 곁에 있는 게 당연하겠군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당신의 논리를 따른 겁니다만?”

         

        “…한 판 뜰래?”

         

        “얼마든지요.”

         

         

        자세를 잡고 흉폭한 기세를 내뿜던 창잡이는 이내 흥이 식어버렸다.

         

        환술사도 손을 내저으며 또 한숨을 쉬었다.

         

         

        “만약 린이 우리 동료였다면 이런 모습에 슬퍼하겠지.”

         

        “그렇죠. 린 앞에서는 자중하는 연습을 해야겠네요.”

         

         

        묘하게 린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는 두 사람이었다.

         

        자리에 주저앉아서 창을 손질하던 창잡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린, 즈라문 군도로 갔어?”

         

        “네. 맞아요.”

         

        “역시 린은 다 알고 있구나.”

         

        “그야 린이니까요.”

         

        “멋지다. 상냥하고 인내심도 깊은데 모르는 게 없네.”

         

         

        숫돌을 꺼내 창날을 간다.

         

        성녀, 마법사와의 전투에서는 일부러 날을 뭉툭하게 만들어서 싸웠었다.

         

        다음 번에 만나면 깔끔하게 꼬챙이형에 처해야지.

         

        창잡이는 린을 상처 입힌 두 사람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 근데 즈라문 군도면 그 녀석이 있잖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에요. 그녀가 즈라문 군도에 가있는 건 원래 계획에 있던 거에요.”

         

        “아니아니 내 말은, 그 녀석 린 안 좋아하잖아?”

         

         

        그러자 환술사는 세 번째 한숨을 쉬었다.

         

         

        “하아, 당신은 정말 자기 자신 밖에 모르네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녀도 린을 좋아해요.”

         

        “엥? 진짜로?”

         

        “네.”

         

        “근데 왜 태도가 그래?”

         

         

        환술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 진성 츤데레거든요.”

         

         

        창잡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 얼굴이랑 그 몸으로 츤데레?”

         

        “네.”

         

        “안어울린다.”

         

        “안어울리죠.”

         

         

        다시 창날을 가는데 집중하는 창잡이.

         

        그러나 또 잠시 후에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럼 걔도 연적이네?!”

         

        “하아아아~.”

         

         

        환술사의 한숨은 더욱 더 깊어졌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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