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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

       클라이스 하스펠트 공작과,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 두 사람의 관계는 의도치 않게 악연으로 번졌다.

         

       계약대로라면 클라이스는 클리온에게 금화 3만 장을 받고서 에테르를 팔아넘겨야 했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에테르의 틸레트 합격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황자에게 팔려가기 싫었던 제 조수가 아카데미 정문을 부수고 입학하는 바람에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다.

         

       초유의 사태였다. 황자는 클라이스가 자신을 욕보이기 위해 계약을 파기했다고 믿고 있었다. 분명한 오해였지만, 황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결국 클라이스는 노예와 금화 모두를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에테르만이라도 다시 자기 수중으로 돌려놓는 것.

         

       예전처럼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로 되돌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입시에서 2등을 한 실력이라면 실기에서 약세를 보이는 금안족일지라도 졸업은 문제없을 테니까. 황자는 그 점까진 모르는 듯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 클라이스는 다른 학부생에게 하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에테르를 대하기로 했다. 그나마 앙금을 풀고 협력을 구하면 대학원생으로 다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클라이스가 에테르를 부려먹은 시간은 3년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4년이 걸린다. 그간 인식에 변화 정도는 줄 수 있을 터였다.

         

       “기초화계마도는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과목이에요. 그러니 절 도와줄 조교 한 명이 필요해요. 누구 자원해 줄 사람 없나요?”

         

       명분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클라이스는 바로 앞에 앉은 에테르를 내려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사실 압박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것이, 에테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생각한 것과는 달리 클라이스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요. 에테르 양이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소녀의 입이 열리기 전까지는.

         

       “싫습니다.”

         

       그 말을 들은 클라이스는 자신의 계산이 빗나갔음을 알아챘다.

         

       에둘러서 말한 것도 아니고, 직접 화법이다.

         

       역시 앙금이 남아있다. 잘 구슬리려면 조금 더 타이트한 조건을 내세워야 한다.

         

       클라이스는 일전의 대화로부터 클리온이 에테르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에테르가 클리온의 의중에 끌려다닌다면 그의 말이 사실이 될 것이다.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면, 플레어라도 마무리하고 끝내야 해요.’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클리온을 막아야 했다. 클라이스는 더 이상 황자에게 자신의 결백을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우선 첫 번째 미끼부터 풀기로 했다.

         

       “조교는 임시반장과는 달리 한 학기 동안 맡는 직책이에요. 당연히 보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다른 학생이 흥미를 보였다.

         

       “얼마만큼인가요?”

         

       일단 낮은 값을 불러보자.

         

       “달마다 동화 5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 말에 반의 대부분은 혀를 찼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아카데미 입학생의 대부분은 귀족이었다. 동화 다섯 닢 정도는 부모 손을 빌리면 껌값마냥 빌릴 수 있었다.

         

       슬슬 값을 올려서 부를 차례였다.

         

       “좋아요. 그럼 은화 한 닢에서 세 닢 사이로 조정해보도록 할게요. 교보재를 날라주거나 실습을 도와주는 역할 정도만 해 주면 돼요. 뭣하면 학교에 문의해서 계약서를 써 드릴 수도 있어요.”

         

       학생과 선생 사이에서 계약서까지 쓴다니, 얼마나 신뢰가 가지 못하는 관계면 이런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러나 이 발언은 다른 학생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화계마도에 대해 배운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건 스크롤을 사용하여 이론을 실습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령의 축복을 받았건 상관하지 않아요. 오히려 실기보다는 필기에 뛰어난 학생이 조교로 있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전 필기를 만점 받고 들어온 에테르 양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 학생끼리도 서로가 누군지 잘 모르는 학기 초다. 반 아이들이 그런 걸 따지기에는 시기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다른 학생들 입장에서는 누가 돼도 딱히 상관없었다. 귀찮은 일을 자신이 떠맡지만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따라서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력초 없으면 간단한 마법 하나 못 쓰는 금안족에게 조교를 맡긴다는 게 말이 됩니까?”

         

       클리온 제2황자. 어떻게든 에테르를 아카데미에서 퇴출시키려고 움직이려는 그였다.

         

       속내야 뻔하지.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그때였다. 클라이스와 클리온을 번갈아 보던 에테르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학급 친구들이 모두 동의하지 않으면 전 조교 일을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업은 어디까지나 다 같이 받는 것이니까요. 불만이 있는 수업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죠.”

         

       그 말에 클리온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보십시오. 금안족도 제 주제를 압니다. 하스펠트 선생님께서 학생 전체의 의사를 고려하지도 않으시고 멋대로 조교 임명을, 그것도 은화라는 액수를 들여서까지 특정 학생을 매수하려는 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안 된다. 이대로라면 저 황자의 뜻대로 흘러간다. 플레어 개발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에테르를 자신의 발치 아래에 두어야만 했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황자는 한 술을 더 떴다.

         

       “누구라도 좋다! 저 금안족 대신 하스펠트 선생님의 조교를 맡겠다고 하는 아이가 있으면 내가 매달 금화 다섯 장씩을 급여로 주겠다!”

         

       파격적이었다. 동화나 은화라면 몰라, 금화 다섯 장은 귀족이라고는 해도 혹할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괜찮은 것 같기도?”

         

       곳곳에서 자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대로 황자의 페이스에 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에테르 양, 금화 여덟 장은 어떤가요? 당신이 수락만 하면 당장 임명하겠어요.”

         

       클라이스 또한 에테르에게 붓는 금액을 높였다. 연구자금이야 늘 부족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작인데 그만한 금액도 없을까.

         

       플레어. 플레어만 완성한다면 다시 나라에서 지원을 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면 된다.

         

       “열 장! 저 금안족 대신 조교를 하면 금화 열 장을 내리겠다!”

       “에테르 양, 조금 더 늘릴게요. 금화 열두 장은 어떤가요?”

       “하, 진절머리가 나는군. 좋다. 열다섯 장!”

         

       이대로 가다간 평행선을 달릴 게 분명했다. 급기야 클리온은 클라이스에게 직접 딜을 걸기에 이르렀다.

         

       “좋습니다, 하스펠트 선생님. 제가 당신 지갑 사정은 잘 알고 있지요. 매달 금화 백 장씩 주머니에 넣어드릴 테니 다른 아이를 지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백 장? 그 말에 클라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3만 장도 아니고, 고작 백 장이다. 서민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돈을 가지고 노는 풀이 달랐다.

         

       처음 에테르의 몸값을 불렀을 때와는 달리, 이미 (주)에테르의 시가는 1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예전처럼 금화를 만 장 단위로 주지 않는 이상 만족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에요.’

         

       에테르의 입학은 현실이었다. 처음엔 인정하기 싫었지만, 클라이스는 제 조수가 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 또한 나름 괜찮게 된 일이라고 정신승리하기에 이르렀다.

         

       ─ 잘 생각해봐, 클라이스. 에테르가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전투마도사가 되면 너와 같이 연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마수를 막는 군인이 될 수도 있어. 두 배로 좋은 일인데 왜 굳이 노예로만 두려는 거야?

         

       정확히는, 동료교수에게 한 달 동안 설득을 위시한 세뇌를 끊임없이 받아서 그런 거였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나.

         

       지난번이 매도하기에 딱 좋은 고점이었다면…….

         

       ‘지금이 저점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금화 20장.”

         

       에테르를 바라보는 클라이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마치 급등이 예상되는 주식을 매수하려는 사람의 낯빛과도 같았다.

         

       **

         

       진짜 지랄한다.

         

       하스펠트 교수와 제2황자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걸 이용해서 어떻게든 싸움을 붙이려고 했는데…. 그 방향이 조금 병신같은 쪽으로 흘러버렸다.

         

       “금화 열 장을 내리겠다!”

       “조금 더 늘릴게요. 열두 장은 어떤가요?”

       “진절머리가 나는군. 좋다. 열다섯 장!”

         

       [경매는 경매장에서 하세요, 제발.]

         

       덕분에 날 포함한 학생들의 표정만 멍청해졌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로테조차도 이게 뭔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당연하다. 이건 나와 하스펠트, 그리고 필리우트 황자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알고 있어야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이거 전혀 안 끝날 것 같은데요. 이러다가 수업시간 다 지나가겠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자고로 시간은 금처럼 써야 한다. 내가 어느 한쪽에 완전히 붙지 않는 이상, 이 짓거리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황자냐, 하스펠트 교수냐.

         

       둘 다 싫은데.

         

       자, 생각해보자. 얼마 전까지 날 황자에게 내다팔려고 했던 하스펠트 교수가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교수와 황자는 딜을 했다가 내 행동으로 인해 모든 게 파토난 상태였다. 아카데미 입학은 내가 했으나, 황자 성격이라면 그 책임을 하스펠트 교수에게 물었을 것이다.

         

       어쨌든 교수 입장에서는 나와 돈을 전부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거네요. 돈을 못 받으니까 당신이라도 어떻게든 아래에 묶어두려는 술책이 분명합니다.]

         

       교수가 학부생에게 잘 보이다가 대학원 가서 돌변하는 건 만국 공통이지.

         

       간단히 말해서 유화책이다. 채찍이 안 되니 당근을 주는 모양새다. 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진작 이해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스펠트 교수님, 당신에게 다달이 금화 백 장을 드릴 테니까 대신 다른 아이를 지목하시는 게 어떤지요?”

         

       황자의 제안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적어도 금화 3만 장에 비하면 그렇다. 한 달에 겨우 금화 백 장? 귀족 사이에서는 심심하면 오가는 값이 그만한 양이다.

         

       황자가 하스펠트의 급여를 저렇게 불렀다는 건 다른 의도가 깔려있기도 하다. 그만큼 하스펠트라는 사람의 가치를 낮게 본다는 것이었으니까.

         

       반면에 하스펠트 입장에서는 못해도 나와 같은 아카데미에 4년을 더 있을 수 있으니 여유로운 편이다. 그동안 가면을 쓰고 나에게 잘해주려고 하겠지.

         

       아마 날 잘 구슬리려다가 대학원 3트를 시켜버릴 게 분명하다. 당연하지만 그땐 눈치채고 튀어야 한다.

         

       “진도도 나가야 하니 이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어요. 에테르 학생, 선택권은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전 금화 25장을 드리도록 하죠.”

         

       암, 아무렴요. 슬슬 답을 드려야죠. 교수님 성깔 급하신 건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아니까요.

         

       마침 좋은 계획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둘 다 엿먹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하스펠트 교수의 촉구에, 나는 입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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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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