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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

       *

        

        

        “우리 자기소개 한번씩 해볼까요? 저는 예브게니. 예브게니 노비코프 카람진. 카람진 공작가의 아들 몸을 차지한 김유진입니다!”

        

        

        유진은 동아리방 화이트보드 앞에서 한글로 제 이름을 적으며 말했다.

        

        겁에 질린 기사학부 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나른한 표정의 엘프, 그리고 여전히 보고만 있어도 오금이 저리는 살인-산타클로스 형님 앞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 제목은 [북부대공가의 망나니 검술 천재]였고, 지금은 신학부에 입학해서 사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 상태창도 보이고요. 여기 상태창 보이시는 분?”

        

        

        손을 번쩍 들고 가벼운 공감대 형성을 위해 한 마디 던져봤지만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아무도 없나?

        

        혹시 상태창이란 게 되게 특별한 건가…? 유진은 떨떠름하게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음. 으음…. 또 궁금한 거 있으신 분?”

        “엔딩.”

        “…네?”

        “네가 본 소설의 엔딩과 설정, 스토리라인을 설명해보도록.”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거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보통 장기 연재되는 소설은 셋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한다.

        

        하나, 정상적인 완결.

        둘, 연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금.

        

        유진이 읽은 소설은 연금화가 골수까지 진행된 소설이었다. 무려 천 화가 넘는 초 장기연재의.

        

        출퇴근 할 때 가볍게 머리 비우고 보기 좋은, 턱턱 막히는 구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데다 별 내용도 없는 종류의.

        

        그러니까, 엔딩이랄 게 없다. 그냥 아카데미에 가서 히든피스를 수집하고 나쁜 마법사 가문과 싸우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흑막이 알고보면 ~~였댄다. 라는 문장을 100화 단위로 반복하며 수명을 늘려 나가는….

        

        아마 작가도 완결을 이젠 상상도 못 하는 것 같은 그런 소설.

        

        

        “음….”

        

        

        이반은 유진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모르는 내용, 그리고 모르는 소설이다.

        

        애초에 이반은, 그러니까 김선우는 소설에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에겐 소설을 고르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는 뜻이다. 메인 포털 첫 페이지에 화려하게 올라가 있는 BL향 첨가 노맨스 장기연재 연금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자존심도 있었다.

        

        

        “다음.”

        

        

        이반이 고개를 돌리자 오스왈드가 머뭇거리며 일어섰다.

        

        

        “오스왈드 이스트벨펜. 이스트벨펜 자작가의 차남입니다. 아버지는 현직 추밀의원이시고, 칼리온 소속 엘프죠. 보시다시피. 그리고 한국 이름은 박재영이었습니다. 보던 소설은 그, 음…. 음.”

        

        

        오스왈드는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말했다.

        

        

        “악역 영애가 집착하는 천재 마법사… 였고요.”

        “오우. 로맨스!”

        “닥… 입 다무십시오.”

        

        

        유진의 추임새에 오스왈드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30화도 안 읽었습니다! 내용도 별로고, 딱 그 정도 되니까 피폐도 끝나있고, 그 다음부턴 억지 고구마만 퍼먹였다고요!”

        “오우 전문가.”

        “닥ㅊ… 입! 다물! 어요!”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저 한국에서 서른하나, 빙의 4년차!”

        “…한국에선 스물일곱, 빙의는 4년차입니다.”

        “이쪽은 빼도 박도 못하고 동생이네! 형이라고 편하게 불러 볼래?”

        “와, 저기 이반 씨? 나 이 새끼랑 같이 일 못하겠어요.”

        

        

        이쪽은 엔딩도 모르고 내용도 모른다라.

        

        이반은 떠들고 있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히익!!”

        

        

        아까부터 움츠러들어 있던 유리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유리… 프란크에요. 한국에선 이유리… 였고요. 일러스트레이터였습니다.”

        “와! 사회인!”

        “그, 그으… 나이는 스물아홉… 이었고… 빙의 4년차… 부모는 없습니다.”

        “헉! 패드립 면역…!”

        “저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유진은 ‘또래’ 빙의자들의 속출에 텐션이 잔뜩 올라간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전근대 이세계에서 고향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자체에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유리는 여전히 움츠러들어 있었다.

        

        

        “제, 제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게 아니라, 이 몸의 부모가 없다는 뜻이었어요… 유리 프란크라고 불립니다….”

        “원작은?”

        “힉!”

        

        

        유리는 이반의 말에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모두가 그녀의 입에 집중한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야, 수수께끼야? 내가 맞춰볼게! 어디보자. 아카데미물, 후피집, 그럼 이건 ts물…! 그런 흐름인데! 사, 사실 한국에선 남자였다거나…!”

        “아니에요!!”

        “아니면 여기서 갑자기 인방물… 아, 의외로 정통 판타지일 수도…!”

        “그, 그게 그러니까….”

        “닥쳐봐라, 유진. 자, 유리 프란크 양. 내가 진정이 되는 주문을 걸어주지.”

        

        

        오스왈드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렸다. 그는 마인드 소서리, 그러니까 정신계 주문 학파 전공자였다.

        

        즉, [용맹 부여]나 [지혜 인도] 같은 버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

        

        보라색 신비로운 마나가 물결치기 시작하자 유리가 기겁하며 발작하듯 뒤로 뛰어 올랐다.

        

        

        “최, 최면!! 싫어어엇!!”

        “…뭣?!”

        “그, 그걸 걸고 뭘 하려고! 다, 다 알고 있지? 당신들 다 알고 있는 거잖아! 이 강간마들아!!”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겠군. 이반 씨, 이거 어쩝니까?”

        

        

        이반은 잠시 고민했다.

        

        원작을 밝히기 머뭇거리고, 자신의 평범한 외모에도 수상할 정도로 겁을 먹고 있다.

        

        겉보기엔 평범하게 잘생긴 귀족 청년, 유진이나 부드러운 눈웃음을 항상 짓고 있는 선한 인상의 오스왈드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반은 갑작스레 떠오른 어떤 ‘사상’에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페미니스트…?!’

        

        

        가까스로 30년 전 지구의 단어를 떠올린 이반이 충격을 받고 있을 때, 유리는 눈을 꼭 감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일러스트 작업… 도중에 끌려왔, 왔어요! 워, 워, 원작은 능… 능….”

        “아하! 정답! 능욕물!”

        “으아아아아!!”

        

        

        유리는 얼굴을 감싸며 주저 앉았다. 집에 가고 싶어, 다들 싫어, 무서워….

        

        금태양, 최면 실눈캐, 수상할 정도로 강한 정원사가 있는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 따윈 해본 적도 없었다….

        

        유리가 훌쩍거리고 있을 때, 이반이 문득 중얼거렸다.

        

        

        “모두 4년차로군.”

        “아, 이 형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무려 30년차십니다.”

        “저분 올해 연배가…?”

        “몸 나이로 서른넷이십니다!”

        “오… 저런.”

        

        

        오스왈드는 이반의 수염을 바라보며 침통하게 탄식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반이 가끔 광인 같은 짓을 저질러도 이해해 줘야겠다 생각하며 오스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다 같은 시기쯤에 떨어졌네요! 4년 전에 뭐가 있었을까. 음….”

        “마왕이 죽었지.”

        

        

        이반은 심각한 눈으로 이들을 훑었다.

        

        

        “용사가 마왕을 죽인 것이 4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 둘 모두 빙의자였지.”

        “어….”

        “이 세상엔 ‘이야기’가 없다.”

        

        

        여긴 현실이니까.

        

        이반은 가까스로 이 문장을 긍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이야기’는 있지. 각자의 이야기들이…. 너희 모두가 각자 보고 왔던 ‘원작’처럼. 정통용사물을 보다 넘어왔을 막시밀리앙은 ‘용사’가 되었다. 마왕도 마찬가지였겠지.”

        “어, 그럼….”

        “북부대공 망나니 검술천재.”

        

        

        이반은 유진에게 손짓하고 이내 오스왈드에게 손끝을 돌렸다.

        

        

        “악역영애가 집착하는 천재 마법사.”

        “후….”

        

        

        오스왈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능욕물….”

        “흐으아아아아….!!”

        

        

        유리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너희 모두 원작과 유사한 배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 공작가의 망나니, 귀족 여식이 짝사랑하는 마법사, 그리고 이름 모를 능욕물….”

        “그, 그만 강조해요…!”

        “그래. 하지만 이후의 남은 이야기는 다르다.”

        

        

        이반의 눈이 깊어졌다.

        

        

        “전대 빙의자들을 알고 있던 한 여자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있다.”

        

        

       -네 이야기를 살고 네 이야기를 끝내. 그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운명이나 세상이 정하는 것 따위가 아니야. 그건 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야.

        

       -각자의 이야기 끝엔 각자의 결말이 있고, 그 결말로 이어지는 방향성이 반드시 정해진 운명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운명은 없다. 지구나 여기나, 삶은 레일이 정해진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야.”

        

        

       -운명이 네 이야기를 끝낼 때 까지 기다리지 마라. 제자야. 네 손으로 네 책장을 넘겨라. 끝까지.

        

        이반은 엔리케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30년을 이 세상에서 보내고, 용사 파티를 만나고, 다시 너희를 보며 세운 가설이 있다.”

        

        

        이반은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운명이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운명은 사람의 과거에, 사람의 ‘시작’에 개입한다고 여긴다.”

        

        

        세상이 마왕과 용사를 바랐기에 마왕의 역할과 용사의 역할로 이들을 빙의시켰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여기에, 마왕이 죽은 직후 나타난 세 명의 다른 빙의자가 있다.

        

        각자 전혀 다른 이야기를 통해 빙의했지만, 놀랍게도 원작과 유사한 ‘시작점’을 가진 채로.

        

        그리고 이들 모두는 이곳, 성 얀스크 대학에 모였다. 엄청난 우연일까? 아니, 이건 어떤 ‘설계’다. 그럴 것이다.

        

        즉, 세상이 바라는 이야기의 경향성이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카데미물이다.”

        “역시! 캬!”

        “그리고 우리는 ‘공인’된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이반은 유진에게 손짓했다.

        

        

        “저 녀석에겐 ‘상태창’이 있다. 퀘스트라는 형태로 이야기의 방향을 제시하지. 현 상황을 반영해 유동적으로 변경되는 종류의.”

        “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이반은 화이트보드에 큼직한 글자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가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우리 모두가 도달할 엔딩이 무엇일지.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뭉친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파악하고, 세상의 흐름을 분석하고, 우리의 ‘엔딩’을 위해 나아간다.”

        “오오오…!”

        “아 잠깐.”

        

        

        유진이 오오, 하고 소리지를 때 오스왈드가 손을 들었다.

        

        

        “이반 씨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듣지 못했습니다.”

        “아, 맞네! 나도 모르거든. 형님 이야기는 뭐였어요?”

        “…모른다.”

        “엥?”

        

        

        이반은 진중한 눈으로 그들 전부를 훑고선 담담히 이야기했다.

        

        

        “빙의하기 위해 서른 편이 넘는 작품에 악플을 달았거든.”

        “오… 오우.”

        “저런….”

        

        

        광인.

        

        세 사람의 머릿속에 이반의 이름 아래로 붉은 밑줄이 세 개 그어졌다.

        

        

       *

        

        

        그날 밤, 이들 전원은 성 얀스크 대학의 가장 높은 첨탑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대한애국단, 출발!”

        “귀향자 파티라니까.”

        “그냥 이름 안 붙였으면 좋겠어요.”

        

        

        이반은 내심 ‘봉사 동아리’라는 이름을 짓고 있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밤과휴식 님, flying fish 님, 우실아 님, 전범준_102 님, 저속잔루 님, 빛바랜마틴 님 후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소설 스페셜 땡쓰 투 Council 님…!! 매화 오탈자 검수 진심으로, 정말 정말 엄청 감사드립니다!!!

    *

    이 며칠 댓글 확인을 못했더니 500개 넘게 쌓여서 당황했어요.. 하나하나 읽어드려야 하는데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덧글로 납쁜말 하구 삭제하고 사라지시는 분…! 아주, 아주 나빠요!! 그거 작가한테만 보인다는 걸 알고 쓰시는 거죠!!

    답글이라도 달아드리고 싶은데 삭제해서 전해드리지 못한 말…!

    일기장에 쓰고 있습니다!! 빨간팬으로 쓰고 있어요! (이건 전통적인 동북아 저주 주술임…)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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