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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

       

       

       

       

       

       

       “쿠오오—!!”

       

       촤륵!

       촤르륵!

       

       쇠사슬의 길이 탓에 애꿎은 허공에다 송곳니를 휘두르는 와일드 빅보어.

       

       “씨발! 지금이야!!”

       “우선 저 새끼부터 잡고 보죠!!”

       

       죽음이 뒤쫓아올 때는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도망치던 이들이 죽음의 발이 묶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협동심을 발휘한다.

       위기를 만들 때엔 그 누구보다 죽이 잘 맞으나 위기가 닥쳤을 때엔 그 누구보다 오합지졸이 되는 그들.

       참으로 약삭빠르며 교활한 종자들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거대 몬스터라고 해도, 쇠사슬에 발이 묶이면 원거리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사족보행의 단거리 공격 몬스터라면 날뛰는 과녁판 신세를 면할 수 없는 노릇.

       게다가 귀족가 도련님들에겐 기본 소양과 같은 것이 궁술이었고, 이미 본선에서 그 궁술을 검증받았던 이들이라, 세 개의 활시위가 쏘아대는 화살은 와일드 빅보어의 급소에 족족 꽂히기 시작했다.

       

       “쿠오오–!!”

       

       촤르륵!

       

       그에 맞서 더 강렬히 저항하는 와일드 빅보어.

       하지만 굵직한 쇠사슬을 끊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며 크게 휘청인다.

       확실히 놈들의 화살받이가 되었다면 나 역시 생존을 장담키 힘들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속사였다.

       

       거대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는 광경.

       물론 묶어 놓고 패는 일방적인 공격임에도, 난생 처음 목도하는, 늘 소설 속 활자로 상상해내야 했던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는 것은 무언갈 들끓게 만든다.

       관전하는 것과 직접 전투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중세 판타지물의 모험을 동경했던 사내의 투지와 열망을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던 것이다.

       

       과연.

       

       도전해 볼 만한, 죽음도 불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보였다.

       특히 엘든 라펠리온이란 캐릭터가 전투광 설정이었던 만큼, 제대로 배운다면 꽤 고위 등급의 몬스터도 사냥해 볼 수 있을 터.

       

       그리고.

       

       ‘그렇게 잡은 몬스터를 바로 요리해 먹으면 진짜 맛있겠지?’

       

       역시.

       

       아빠, 난 X나 쎈 모험가가 될 거에요.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 기둥에 등을 기댔다.

       아그작.

       과일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화살 세례에 점차 힘을 잃으며 쓰러져가는 와일드 빅보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젯밤 봉인해둔 고백 쪽지가 진짜 살인예고장이었을 줄이야.’

       

       물론 후회캐 4인방 중에 가장 뛰어난 피지컬과 남다른 신체 능력의 소유자인 엘든 라펠리온이 직진 돌격형 몬스터, 게다가 거대 쇠사슬로 인해 이동 속도와 거리에 제약이 생긴 몬스터에게 당할 리 없을 듯 했지만, 운이 나빴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도망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중상을 면치 못 했을 테니까.

       코끼리 2마리 분량의 육중한 몸집 탓에 발굽에 짓눌리기만 해도 갈빗대가 살살 녹아들었을 테니까.

       

       자신이 당했던 공포가 어떠한지 가르쳐주고, 그것으로써 지난 날, 한 여인을 죽도록 괴롭혔던 것을 기억하길 바라며, 그 끝에 있을 대면식을 통해 후회와 참회를 극대화시키려는 것을 이해하지만서도, 방법이 과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최종 평가전이 시작되기 전에 기권한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로.

       혼약대전 규율에 기권에 대한 조항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로, 르미앙 윈터펠의 방법은 다소 과한 듯싶었다.

       

       물론 쇠사슬이란 걸 통해 몬스터의 전투력을 반감시켜 안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원해서 악질 캐릭터에 빙의한 것도 아닌, 영문도 모른 채 빙의를 ‘당한’ 내겐 오히려 르미앙과 그들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한 방식이었다.

       가진 지위와 명분, 그것을 빌미로 원하는 것을 이룩하고 갈취하려는 방식.

       원작에서는 이 복수의 핵심이 선도와 계몽이라 했던 거 같은데, 솔직히 그 의도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대목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여주인공과 엮이면 안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저지르지도 않은 원작 캐릭터의 업보로 인해, 오늘 여주인공에게 살해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노릇.

       앞으로 더욱 철저히 기권자 노릇에 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차피 르미앙도 이 혼약대전이 표면적으론 조용히, 그리고 무사히 흘러가길 바랄 터이기에, 날뛰겠다는 기권자를 계속 건들 수는 없을 테니까.

       

       쿠웅!

       

        그때, 거대한 굉음과 함께 쓰러지는 와일드 빅보어를 볼 수 있었다.

       온몸엔 족히 50발은 되어보이는 화살이 박혀있다.

       그야말로 날뛰는 과녁이 되어 화살을 쓸어담은 모양이다.

       

       “하아! 하아!”

       “허억! 허억!”

       

       그제야 저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는 후회캐 3인방.

       사고의 후유증이 밤이 되서야 찾아오듯, 죽음의 술래잡기가 선사한 지리멸렬한 공포가 이제야 찾아온 모양이었다.

       

       “허억… 미, 미친 거 아닙니까? 귀공자들 사냥대회에 거대 몬스터라니요! 우릴 찢어 죽이기라도 하겠단 겁니까?”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협동심이 사라진 순간, 또 다른 위기를 만들기 위한 균열이 일어나는 법이다.

       악인들에겐 위기가 곧, 그들의 존재 이유인 법이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데론이 열변을 토하던 블런드의 멱살을 잡는다.

       

       “닥쳐라! 블런드! 감히 날 밀치고 도망쳐?!”

       “예?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뭐? 이제 와 발뺌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충신인 척 설설 기던 새끼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놓고는 발뺌까지 하시겠다?”

       “오, 오해십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방금 전 벌어진 죽음의 질주를 놓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데론과 블런드.

       

       그리고, 그 시야에서 잠시 벗어나있던 카일이 와일드 빅보어의 꼬리에 묶여있던 대공가의 문양을 몰래 빼들고 폭풍 질주를 시작한 순간.

       

       제 2차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카, 카일!? 이 건방진 새끼가! 거기 안 서느냐—!!”

       “문양은 데론 공자님께 바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카일! 어서 이리 내놓지 못 하겠느냐!!”

       

       데론과 블런드가 다급히 카일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물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을 악인의 질주는 더욱 빨라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엘든이 그랬잖습니까! 어떠한 사유든 보복이 불가하다고요! 그러니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공가의 사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야말로 大 환장의 카오스.

       오직 각자의 [이득]을 목적으로 뭉쳐진 조직의 전형적인 말로(末路)다.

       이득이 다한 순간, 더 큰 이득이 눈앞에 놓인 순간, 의과 협이 없는 그 조직은 서로의 등에 칼을 꽂는 법이니까.

       그것을 반증하듯, 누구 하나 등을 떠밀지 않았음에도 악인이 악인을 뒤쫓는 제 2차 죽음의 술래잡기가 펼쳐진 것이다.

       참으로 악인들다운 전개라 생각하며,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려왔다.

       

       “읏차.”

       

       상황이 종료됐으니 슬슬 하산하면 될 듯싶다.

       천천히 걸어가면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된 시점에 개최장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과일을 베어 먹으며 산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발지점에 다다랐을 때.

       

       허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흩뿌려진 무언가를 줍고 있는 카일을 볼 수 있었다.

       르미앙과 겔우드는 이미 가버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황량해진 개최장엔 서늘한 정적만 감돌았다.

       휘이잉—

       한차례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아그작.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며 블런드와 데론의 등 뒤에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안 좋군요.”

       

       

       

       **

       

       

       

       작열하는 태양이 중천을 넘어서는 오후.

       

       꼬르륵.

       

       ‘…….’

       

       마차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레이첼이 공허한 배를 쓰다듬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오는 걸 깜빡해버리고 만 것이다.

       귀족가의 개인호위기사들은 식사를 제때에 챙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늘 제때에 식사하는 고용주를 호위하기 위해서였고, 간단한 요깃거리로 빠르게 해결하거나, 고용주가 저택으로 복귀하면 다른 호위병과 임시 교대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고용주의 외출이 있는 날이면 레이첼은 늘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겼었다.

       수년간 이어온 습관이었고,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까먹은 적이 없었다.

       한데, 오늘은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물론 한 끼 거르는 건 다반사였기에 한낱 허기짊이 호위기사의 책무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허기짊이 강하게 느껴져왔다.

       

       아마도, 근래에 때마다 끼니를 챙기고 있어 그런 것일 터.

       고용주 엘든이 호위 임무도 배가 든든해야 잘 해내는 법이라며 식사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조식과 석식은 상관없었다.

       별채에서 홀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아리엘 영애와 함께 하는 중식때였다.

       

       그레이트 홀이란 곳에서 호위기사가 고용주와 합상(合床)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법이라며 별채에서 빠르게 식사를 하고 오겠다 했으나, 매번 [악인들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법]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아리엘 영애와의 합상을 고집했었다.

       

       아리엘 영애마저도 ‘제 옆에 앉으셔도 돼요!’라며 옆자리 의자를 당겨 방석을 팍팍 쳐대었고, 결국 며칠간 그들과 함께 중식을 제때에 챙겨먹었던 그녀였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며칠간 식사를 제때에 해결했다고 해서 오랜 습관을 깜빡하다니 말이다.

       

       꼬륵.

       

       설산의 입구에서 대기 중인 마차는 총 4대.

       전부 최종 후보들의 마차였고, 개인호위기사가 마차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점심 때가 지나니 하나둘 요깃거리를 꺼내 허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마른 육포나 과일, 기타 주전부리들을 씹으며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허기지는 듯 해 설산을 올려다보는 레이첼.

       

       그런 그녀의 눈에, 산길을 내려오는 엘든 공자가 보였다.

       타닥, 타닥.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오던 엘든 공자가 이내 마차에 도착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하는 레이첼.

       

       “수고는 뭐. 레이첼.”

       “네.”

       

       부름에 고개를 들었는데, 무언가 날아드는 게 보였다.

       탁.

       그것을 잡았다.

       붉고 영롱한 빛깔의 과일이었다.

       

       “…?”

       

       레이첼이 의아한 눈으로 엘든을 바라보았고, 똑같은 과일을 우적 씹어먹은 그가 무심히 지나치며 답했다.

       

       “배고플 텐데 먹어둬. 꽤나 맛나더군.”

       “…저를 주려 챙겨오신 겁니까?”

       

       마차에 오르는 엘든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첼이 물었다.

       

       “아까 보니 요깃거리 주머니를 안 챙겨온 거 같더군. 호위기사가 배를 굶어서야 쓰나. 대공성까지 가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

       

       레이첼이 얼떨떨한 눈빛으로 엘든을 보았다.

       무얼까.

       왜 저럴까.

       요즘 들어 안하던 짓을 자꾸 해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낱 평민 호위기사의 배곯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평소의 그라면 배고프다 하여 야생의 과일을 따먹지 않는 데다, 설령 입에 맞는 과일을 발견해도 제 목구멍에 채워넣기 바쁜 인간이었다.

       

       남의 배곯음보다 자신의 허기짐이 더 중요한 인간이었고, 무엇보다 남을 챙길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생전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건가….’

       

       잡념을 거둔 레이첼이 시선을 내려 과일을 보았다.

       북부령에서 숱한 전투를 치루었던 그녀에겐 익숙한 과일이었다.

       북부산 중에서도 볕이 잘드는 양지에서만 자라며, 새콤달콤한 과즙과 단단하면서도 무른 과육이 일품인 [로즈애플]이었다.

       

       우적.

       

       오랜만에 보는 그것을 베어물었다.

       기나긴 전쟁은 늘 배곯음을 수반했고, 그때 만났던 로즈애플은 허기를 달래다 못 해 진득한 피로를 씻겨줄 정도로 상큼하며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사 직전에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일 터였고, 큰 기대없이 로즈애플을 씹어먹는 레이첼.

       

       한데.

       

       “어때? 맛이 괜찮나?”

       

       이상하게도, 그때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이 났다.

       지독한 굶주림 속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이 난 것이다.

       

       “…맛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망 이후 일평생 홀로 싸워왔던, 일평생 멸시와 조롱만 받아왔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고독히 싸워왔던 그녀가 처음으로 건네 받은 ‘호의의 맛’임을 아직은 알 수 없는 레이첼이었다.

       

       “뭐해. 어서 타지 않고. 평가전이 일찍 끝났으니 못다한 훈련을 하러 가야지 않겠나. 스승님.”

       “아. 네.”

       

       그렇게 둘을 실은 마차가 곧, 대공성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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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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