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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외부 특기생을 선발하기로 결정하면서 교수부는 굉장히 바빠졌다.

       

       공고를 내고 선발시험을 볼 장소를 조성하는 등은 행정실의 일이지만 실제 선발시험을 보는 건 교수부.

       

       정상적으로 매년 했더라면 작년 계획을 가져다 조금 수정해서 쓰면 되겠지만 이번이 처음이라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두 사람. 내가 다른 아카데미 교장들에게 자문을 구해 올 테니까. 운이 좋으면 계획서 사본이라도 받을 수 있고.”

       

       키르린은 나와 이스메라에게 호언장담하며 마차를 타고 외부출장을 나섰다.

       

       “교장님께서 모처럼 열심이시군요. 호호.”

       

       이스메라가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으로 키르린을 칭찬하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간만의 다른 아카데미 교장들과의 교류인 만큼 작은 성과라도 얻는다면 큰 의미가 있겠어요.”

       

       이스메라의 속뜻인즉슨, ‘빈손으로 돌아올 게 뻔하다’ 이거지.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국에는 수많은 아카데미가 있으며 대부분은 현생의 대학처럼 학문적 가르침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개중에는 우리 아카데미나 황립 사관학교 등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곳들도 있다.

       

       심지어 학과 전부가 전투에 관련된 과목으로만 구성된 준군사시설인 특수전훈련소도 있고.

       

       여튼 이런 아카데미들은 제국 내의 우수한 자원들을 받고자 동분서주하며 서로 경쟁하며 지금 우리가 추진하는 ‘외부 특기생 선발’과 비슷한 제도를 다들 시행하는 상황.

       

       이러니 키르린이 다른 아카데미 교장들을 만나봐야 거기서 노하우나 관련 자료를 내주겠냐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니 대놓고 문전박대하지는 않겠지만 이스메라마냥 살살 돌려서 꼽주는 거 아니려나 몰라.

       

       “일단은 교장님 밖으로 도시는 사이에 우리끼리라도 준비를 하죠.”

       

       나와 이스메라는 디저트 카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선발시험 과목들을 선정했다.

       

       이스메라는 내가 디저트를 한입 먹을 때마다 뭔가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눈을 마주치면 이내 웃음을 흘리곤 했다.

       

       “교수님은 안 드세요? 진짜 맛있는데.”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살짝 앞으로 밀자 이스메라가 질색하면서 상체를 뒤로 당겼다.

       

       “괜찮습니다. 아시다시피 엘프들은 채식 위주인지라서요.(그것도 몰랐냐)”

       “그런가. 이거 고기는 안 들어갔는데요.”

       “생크림을 만들 때에 우유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아, 그 정도라면 못 먹죠.”

       

       도로 접시를 당겨서 케이크를 떠먹으니 이스메라는 또한번 인상을 쓰다가 곧 매혹적인 미소로 그것을 덮어버렸다.

       

       하여간 저 엘프도 참 피곤하게 산다.

       

       

       # # # # #

       

       

       그날 저녁 무렵, 전투학과 교수들과 막 퇴근하는데 리나 교수가 앞을 가리켰다.

       

       “저기 교장님께서 오시는데요?”

       

       본청 앞에 멈춘 마차에서 막 키르린이 내리는 참. 두 귀가 축 늘어진 채 의기소침한 표정이다.

       

       굳이 안 물어봐도 오늘 출장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눈에 훤하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퇴근하는구나…. 푹 쉬어….”

       

       교수들이 인사하자 키르린은 힘없이 인사를 받아주며 흐느적흐느적 본청 안으로.

       

       “오늘 교장님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이시네요. 왜 저러시는지 아세요?”

       “다른 아카데미 교장들 만나러 가서 특기생 선발 정보 좀 얻으려다가 실패한 거 같다.”

       “그건 확실히 무리수네요.”

       

       심리전교수 펠레미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모든 아카데미가 우수한 자원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황성 직속 아카데미 좋은 일을 선뜻 해줄까요.”

       “흐음, 그렇단 말이죠….”

       

       잠시 생각하던 리나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수석교수님. 제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요. 다른 교수님들도 들어 보세요.”

       

       리나는 나와 교수들에게 방금 떠올렸다는 그 생각을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리나의 ‘좋은 생각’이란 침투 및 탈취.

       

       이미 외부 특기생 선발을 연례행사로 진행하고 있는 아카데미 중 하나에 침투해서 계획 한 부를 몰래 빼돌려 복사 후 돌려놓자는 것.

       

       “그거 괜찮은 생각이구만!”

       

       카자다르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지금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겁니까.”

       

       뒤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모턴이 태클을 걸자 웨이버 교수가 웃으며 끼어 들었다.

       

       “모턴 교수님도 현역 시절에는 많이 하셨잖습니까.”

       “명에 의한 군사작전과 이번 사안을 동일선상에 둘 수는 없지.”

       “당시 모턴 교수님의 상대방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요?”

       “음.”

       

       웨이버가 단번에 모턴의 입을 막아버리자 애나도 음침하게 거들었다.

       

       “저도 찬성…. 안 그래도 돌볼 말들이 늘어나서 바쁜데… 계획 작성에 시간을 너무 할애할 수는 없어요….”

       “흔적과 증거만 남기지 않는다면 애초에 없던 일이 되기는 하겠네요.”

       

       펠레미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하자 리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석교수님?”

       

       솔직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

       

       잠깐 가져와서 베끼고 다시 돌려 놓는다면 되는 거 아닐까?

       

       양심없는 짓이긴 하지만 펠레미아 말마따나 아무도 모르면 없던 일이 되는 거다. 

       

       애초에 합법이니 양심이니 따지는 건 라이너스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이고 매번 그런 식으로 했다간 아마 나나 그놈이나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지.

       

       “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럼 오늘밤이라도 바로 할 수 있겠냐?”

       “물론이죠. 그런데 어디가 좋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좋은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황립 사관학교. 거기가 우리랑 비슷하니까 그쪽에서 빼돌리자.”

       

       여러 아카데미가 있지만 전투학과가 있는 아카데미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거기서도 전투와 이론 모두가 균형을 이룬 아카데미는 손에 꼽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황립 사관학교.

       

       제국의 엘리트 장교들을 양성하는 곳인 데다 내가 알기로 황족들 중에도 여기 출신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상관인 2황녀도 그렇고.

       

       때문에 황성 안보실 예하 조직에 신규인원을 수혈할 목적으로 만든 짧은 역사를 지닌 우리 아카데미와는 그 수준이 비할 바가 되지 않는 곳.

       

       특수전훈련소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말 그대로 특수전에 투입될 ‘현역군인’을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랑은 또 성격이 좀 다르거든.

       

       아무리 똑같은 임무를 한다 해도 군인과 요원의 차이는 아주 크다.

       

       그런 면에서는 역시 문무를 겸비한 사관을 양성하는 황립 사관학교가 우리에겐 제격이다.

       

       그리고 혹시나 걸리서 시비가 붙더라도 사립보다는 같은 황성 소속끼리 싸우는 게 낫지. 

       

       왜냐면 사립 아카데미들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곳이 대부분이라 괜히 엮여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사관학교라니… 난이도가 좀 높은 거 아닐까요?”

       

       오렌디가 다소 걱정스럽게 반응하자 리나가 웃으며 오렌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콩콩 밀었다.

       

       “너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충분히 할 수 있어. 아무도 모르면 없는 일인 거야.”

       

       머리를 긁적이던 오렌디는 평소처럼 금방 해맑은 표정이 되었다.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네요. 좋아요! 당장 훔치러 가요!”

       “훔치는 게 아니라 대여해서 읽고 돌려주는 거다. 이건 확실히 합시다.”

       

       사실 계획을 새로 만드는 것에 은근히 부담을 느꼈는지 모턴도 종전의 완고한 태도 대신 어느 정도 타협하는 모습.

       

       내 말이라면 늘상 대찬성하는 웨이버와 리나는 벌써부터 어떻게 침투할지 논의를 시작했고 카자다르와 브로그도 펜대 굴릴 일 줄었다고 좋아하고.

       

       소심한 애나도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말들을 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좋다고 중얼중얼.

       

       펠레미아는 안경만 고쳐 썼고 제네브는 늘 그렇듯 입도 뻥긋하지 않고 묵묵부답이다. 저놈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참.

       

       

       # # # # #

       

       

       자정이 되자 리나는 침투할 때 흔히 입는 흑복으로 갈아입고 학과 교무실에 나타났다.

       

       “이제 슬슬 다녀올게요.”

       “아직 날이 추운데… 이거 드시고 가세요….”

       

       애나가 자신이 마시고 있던 따뜻한 차를 건네자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녀와서 마실게. 혹시나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난감하잖아.”

       “하지만 그러면 다 식어서 맛이 없을 텐데….”

       “다시 끓이면 되지. 그럼 다녀올게요.”

       

       복면을 쓴 리나가 오렌디의 차원문 너머로 사라지자 애나가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을까요…. 사관학교는 좀 무리가 아닐지….”

       “설마 침투 교수가 침투에 실패할까 봐? 자, 그러지 말고 다들 야식이나 먹고 하시죠!”

       

       웨이버가 쾌활하게 소리치며 책상 아래에서 천을 덮은 바구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육포와 병에 담긴 요거트 같은 발효유, 훈제고기 등이 한가득. 모두 직접 만들었단다.

       

       퀴라나 사냥꾼들이 만든 건량식은 맛있고 품질이 뛰어나 대형 상단이나 귀족가 등에 상당히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그런 귀한 음식이 바구니 한가득 담겨 있으니 교수들은 반색하며 앞다투어 하나씩 집어 먹는다.

       

       “으음, 정말 맛있군. 역시 퀴라나 사냥꾼이다.”

       “그러게요. 어떻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지.”

       “웨이버. 이제 슬슬 사냥 갈 때가 되지 않았나. 그때는 나도 데려가라.”

       “그래야죠. 날도 풀렸고, 숙소에 놔둔 고기들도 다 떨어졌어요.”

       “야, 나도 같이 갈래.”

       

       잡담을 하면서 야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차원문 안에서 리나가 튀어 나왔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 설마 도중에 들킨 건가?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리나의 손에 들린 서류 뭉치가 너무도 명확히 보인다.

       

       “여기 있어요, 수석교수님.”

       

       리나가 내게 손에 든 그 서류뭉치를 건넸다.

       

       “읽어 보시고 맞으면 바로 필사하고 돌려 놓게요.”

       

       서류를 살펴 보니 확실히 사관학교에서 쓰는 외부 특기생도 선발에 관한 계획이 맞다.

       

       “잘했다, 리나. 최고야.”

       “짠.”

       

       리나가 복면 위로 눈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이거 아직 안 식었지?”

       

       그리고는 복면을 벗으며 여전히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애나의 찻잔을 집어 들고 호로록 들이켰다.

       

       저거 참 대단하네.

       

       무슨 관우도 아니고 차가 식기도 전에 야밤에 황립 사관학교에 침투해서 필요서류를 정확히 가져오냐.

       

       과거 특임대원이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여튼 좋아. 이제 우리 아카데미에 맞게 수정해서 계획을 완성해 보자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튼 흑막조직은 아님.

    + 여러 독자님들 반응을 참고하여 표지를 바꾸어 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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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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