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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0

    송파구에 자리한 커다란 아파트 단지.

    이른 아침, 잿빛 소녀는 자기 방의 커다란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직 깨어날 시간이 아니었지만, 잿빛 소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퀴퀴한 냄새에 잠에서 깨어버렸다.

    “콜록, 콜록.”

    마치 먼지가 가득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냄새 때문인지, 소녀는 일어나자마자 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잿빛 소녀가 눈을 뜨고 방을 돌아보자, 방의 한편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는 조그마한 꽃병이 놓여있어서, 방안으로 은은한 꽃향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기분 좋은 향기가 가득한 방 안.

    언제나처럼 평소 그대로의 방이었다.

    왜 퀴퀴한 냄새가 났던 걸까.

    그리고 왜 기침을 했던 걸까.

    자다 깨서, 착각한 거겠지?

    소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방 안의 냄새를 맡았지만, 은은한 꽃향기만이 날뿐이었다.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언제나처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니, 건물과 나무들이 모두 시커먼 재투성이로 보였다.

    그것은 곰팡이 같기도 하고, 재 같기도 했다.

    ‘!!!’

    눈을 깜빡이자, 세상은 다시 색을 되찾았다. 

    소녀가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로 가장 좋아했던 풍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파트 주변을 가득 채운 가로수의 푸른색.

    그리고 특유의 나무 냄새.

    하지만 재투성이 광경을 봐버린 탓일까, 소녀가 가장 좋아했던 광경은 이상하게도 더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사진이 빛이 바래버린 것처럼.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까?’

    어제는 맑은 물이 붉게 보였는데, 이번에는 멀쩡한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뭔가 병이라도 걸린 걸지도 몰라.

    ‘엄마, 아빠에게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지?’

    소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더니, 따스한 토스트의 향기와 함께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역시 평소대로야.

    그래, 기분 탓이겠지.

    소녀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애써 위화감을 머리 구석으로 밀어내고, 평소대로의 아침을 보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화목한 가족의 식탁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중, 잿빛 소녀의 오빠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해왔다.

    “사탕 먹을래?”

    오빠가 꺼내 든 것은 커다란 사탕 하나.

    “이빨 닦고, 사탕 같은 거 먹으면 안 되는데….”

    소녀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모님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오빠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탕을 소녀의 입 속에 쏙 밀어 넣었다.

    사탕의 단맛이 입속으로 퍼져나가자, 절로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

    하지만 소녀의 오빠는 장난치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신맛이 입안을 강타했다.

    그 신맛은 저절로 눈이 찡그려지고, 무심코 입을 벌려 사탕을 뱉어낼 정도였다.

    “콜록, 콜록.”

    소녀는 눈을 감고 바닥에 엎드려서 기침을 반복했다.

    “너무 심했나? 미안해.”

    오빠가 등을 토닥이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는 짓이겨진 바퀴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붉은 피를 흘리는 바퀴벌레가 경단처럼 둥글게 뭉쳐져, 침 범벅이 된 채 꿈틀꿈틀.

    “히이익!”

    잿빛 소녀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오빠를 올려다봤지만, 그곳에 그녀의 오빠가 없었다.

    얼기설기 철사를 엮어서 만든, 검댕이 잔뜩 묻은 정체불명의 괴물이 있을 뿐이었다.

    우당탕.

    잿빛 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일 있니?”

    그러자 그녀의 부모님들은 소란을 눈치채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왠지 고개를 들면 부모님마저 괴물로 보일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워져서, 소녀는 눈을 꼭 감았다.

    그때 귓가에 굉장히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이 오빠를 꾸짖는 소리.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공포가 차츰 수그러들자, 소녀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자 ‘평소대로’의 부모님과 오빠가 보였다.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바닥에는 침 범벅이 된 루비처럼 붉고 투명한 사탕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전부 착각이었던 걸까?

    끔찍한 것들이 보였던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잿빛 소녀는 갑자기 밀려오는 구토감에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

    “괜찮니?”

    걱정이 가득 담긴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잿빛 소녀는 이상하게도 끝없는 추위를 느꼈다.

    ***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조그마한 동물들과 미니 사신들이 뛰노는 세희 연구소 안뜰.

    나는 초록 사신에게 ‘가장 특별한 티라노’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고, 그 티라노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티라노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나는 쉬는 시간 동안 통 토끼 꼬치구이 대신, 미니미니 하얀 아귀 꼬치를 만들어서 천천히 굽는 중이었다.

    뀨힝힝.

    미니 토끼만큼 작은 하얀 아귀를 엄선해서 만든 고급 꼬치구이였다.

    하지만 역시 토끼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무리 먹어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니 토끼를 잡을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었지만, 내 주변에는 늘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감시하는 황금 사신들이 있었다.

    힝.

    그러던 중, 내 옆에서 통통한 배를 내밀고 혼자서 누워있는 검은 사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검은 사신을 보자마자, 미니 사신 정원에 보관해 둔 루비처럼 붉고 투명한 사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 먹어 볼래?’

    내가 검은 사신을 향해 의지를 보내자, 검은 사신은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

    보석같이 투명하고 영롱한 광택.

    겉으로 볼 때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 사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엄청 신맛이 나는 사탕!

    신맛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한번 입에 넣어볼 정도로 맛있어 보여서 그런지, 검은 사신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입을 크게 벌리며 의지를 보내자, 검은 사신도 그 모습을 따라 하며 크게 입을 벌렸다.

    입을 벌리기 전에 잠깐 멈칫한 것을 보면, ‘엄마가 주는 걸 함부로 먹으면 안 돼!’ 같은 황금 사신의 격언을 떠올린 거겠지.

    하지만 영롱한 사탕 앞에서 그런 충고는 소용없었다.

    삐—!

    검은 사신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삐’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사탕을 검은 사신의 입속에 쏙 집어넣었다.

    ‘어때 맛있지?’

    내가 묻자, 검은 사신은 사탕으로 빵빵해진 볼을 부여잡으며,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끄덕였다.

    히히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신맛을 느낀 검은 사신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찰칵.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예린이가 빠른 속도로 휴대폰을 꺼내, 검은 사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코입이 없어져 버린 기묘한 모습의 검은 사신을 보며 예린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눈코입이 없어져 버린 채, 버둥거리는 검은 사신을 내려다보며 의지를 보냈다.

    ‘히히.’

    삐!

    그러자 검은 사신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올라와 내 정수리를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의 뚜시뚜시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묵직한 공격이었다.

    ‘미안해. 되도록 안 할 테니까, 화 풀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사신을 잡아서 손바닥 위에 놓고 꾸준히 쓰다듬어 주자, 검은 사신은 다시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역시 검은 사신은 황금 사신이랑 성격이 비슷하네.

    히히.

    그렇게 화가 풀린 검은 사신의 수축된 얼굴 구멍을 콕콕 찌르면서 놀고 있었더니, 초록 사신이 날아와 티라노의 완성을 알려주었다.

    정말 힘들었다며, ‘에헴’하는 자세를 취하는 초록 사신이었다.

    ‘드디어!’

    하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절망이었다.

    하마처럼 통통한 얼굴.

    두툼한 입술.

    툭 튀어나온 뱃살.

    전신을 덮은 깃털.

    정거장에서 봤던 것보다 더욱 못생긴 티라노가 튀어나와 버렸다.

    분노한 나는 그대로 초록 사신을 붙잡아서 입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미이잉!”

    ***

    노란 사신과 잿빛 소녀의 아지트.

    노란 사신은 잿빛 소녀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커다란 사탕 두 개를 들고 비교하고 있었다.

    하나는 세희 연구소에서 구한 신맛 사탕.

    하나는 잿빛 소녀의 아파트에서 구한 신맛 사탕.

    인간의 눈으론 완전히 똑같은 사탕처럼 보이겠지만, 노란 사신에게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

    하나는 붉은 루비색 사탕.

    하나는 짓이겨진 붉은 바퀴벌레 덩어리.

    ‘정말 강력한, 정신 오염….’

    노란 사신은 자신의 애착 인간?

    혹은 애착 오브젝트를 걱정하며 인형 하나를 정성스레 만들고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랑 똑같이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인형이었다.

    슥슥, 흙을 끌며 걷는 발소리.

    잿빛 소녀의 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노란 사신은 사탕을 양옆으로 던져버렸다.

    좌우로 나뉘어 또르르 굴러서 구석에 안착하는 사탕들.

    사탕들을 따라서 시선을 돌려보면, 기묘하게도 이 아지트 안에는 똑같은 물건이 2종류씩 있었다.

    밖에서 구한 물건과 아파트 단지 내에서 구한 물건.

    정상적인 물건과 뒤틀리고 녹슨 물건.

    그런 잡동사니가 가득한 아지트에서, 노란 사신은 들어오는 잿빛 소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잿빛 소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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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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