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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1

       흔히 ‘고귀하다’라고 칭해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살면서 좋은 점을 참 많이 누린다.

        

       만약 내가 사는 세계가 일단 명분상으로는 사람끼리 평등하다고 여기는 현대 사회였다면 ‘고귀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 돈이나 공부 머리, 운동 신경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일 수 있기는 한데.

        

       내가 말하는 건, 자기희생을 뜻하는 거다.

        

       자기에게 올 이득 같은 것은 상관없이, 그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일을 하는 사람들.

        

       자원봉사자나 소방관 같은 사람들. 아니면 어떤 소속 없이 그저 말없이 선행을 하는 사람들.

        

       애초에 사람을 구분하는데 법적인 경계선이 없으니,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귀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계급이 법률로 정해진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사회에서 고귀한 사람이라는 말은 귀족, 혹은 그 위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귀하게 태어나 귀하게 자라고, 귀한 자리에 올라 죽을 때까지 귀하게 살아가다 죽는다. 그들이 귀하지 못하게 되는 때는 그들 아래에 있는 이들이 일어나 그들을 끌어내렸을 때다.

        

       당연히 귀족뿐만이 아니라 왕족이나 황족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들은 더하다. 단순히 왕과 황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죄에 면죄부를 받고,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서 시작한다. 애초에 재판까지 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났기에 귀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때로는 그 고귀함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말 그대로 밤낮없이 일해야 하므로 귀한 취급을 받는 거라고.

        

       웃기는 소리다.

        

       노력이라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한 노력이 더 어렵다.

        

       목숨이 위험하다? 20세기 초반에 마천루를 짓기 위해 올라간 노동자들의 사진을 본 적 없는 인간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그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프레스에 손을 넣어가며 일하지 않은 인간들이나 그렇게 말한다.

        

       밤낮없이 일한다니, 웃긴 일이다. 졸릴 때까지 일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이들이, 하루에 16시간씩 일하고 발랐을 줄 같은 줄에 몸을 겨우 걸고 쪽잠을 자는 이들의 삶을 알 리가 없다.

        

       “오랜만이구나, 내 딸아.”

        

       그리고 나도 그 고귀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원래대로라면 이쪽 세상에서도 바닥을 전전해야겠지만, 누군가의 계획이라고 해야 할지 우연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고귀한 인간이 될 생각인 건 아니고.

        

       “그동안 편안하게 지내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내가 제국의 이인자가 되고, 앨리스가 스스로 황태녀가 된 이후 나에게는 어떤 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나의 ‘위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무척 꺼렸다.

        

       아직 앨리스가 제국을 어떻게 운영해나갈지는 알 수 없다.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고, 어떤 비전을 제시했던 것도 아니니까. 일단은 아카데미 생활을 하며 미래를 고민해보겠다는 것이 앨리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제국으로 가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황제의 말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제는 황제가 아니지.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전 황제라고 해야 할지, 상황이라고 해야 할지.

        

       뭐, 어차피 속으로 생각할 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제국은 지금 황제 자리가 비어있으니까. 황제라는 말을 써도 다른 사람과 헷갈릴 일은 없을 거다.

        

       나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옥이라고는 했지만, 흔히 보통 사람들이 감옥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런 형태의 감옥은 아니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융이 깔리고, 벽에는 화려한 장식이 걸려있다. 철책이 있긴 했지만,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문도 있었고, 무슨 귀족 방처럼 손님맞이용 테이블과 의자까지 있었다.

        

       “잘 지내셨던 모양입니다.”

        

       “잘 지내다마다. 벨부르 국왕이 극진히 대접해주었지.”

        

       극진히, 라고는 해도, 이 감옥은 황제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애초에 귀족과 왕족을 위한 감옥이니까.

        

       그래, ‘고귀한 자’를 위한 감옥.

        

       벨부르에서는 계속 황제의 신병을 자신들이 쥐고 있기를 원했다. 주로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귀족들이었다. 벨부르 국왕도 어느 정도는 그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적어도 자기 주변에 있는 귀족들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황제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황제가 날뛴 곳은 법국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실패했다.

        

       법국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리고 벨부르는 그 법국의 영토를 사실상 점거했다.

        

       무엇보다 루테티아 아래에서 병력을 키우던 이들은 모두 법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사실 감정을 치워두고 죄의 경중을 생각하자면 황제는 무기를 가지고 벨부르를 가로지른 것이 죄였다.

        

       그나마도 가지고 있던 무기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손에 쥐고 휘두를 냉병기들이었고, 이 세계에서 그런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대단한 죄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총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훨씬 까다롭다.

        

       물론 황제가 가지고 있던 것이 더 있기는 했다.

        

       지보.

        

       하지만 그건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돌덩어리가 되었다. 게다가 법국에서 있었던 사건은 아무 데나 공표하기에는 너무 예민한 이야기였고.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로, 벨부르가 황제의 남은 생 동안 황제를 구류할 명분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노린 것입니까?”

        

       “무엇을 말이냐?”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도록 유도하신 것이냐 묻고 있습니다.”

        

       내 말에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성공하면 모든 것이 내 발아래 놓이고, 실패하면 어차피 모든 것을 잃으리라 생각했으니. 계획을 둘 준비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계획 중 하나를 고르기 전까지의 준비였다. 지금 이 상황은, 문자 그대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앨리스가 나를 암살하라고 시켰느냐?”

        

       “앨리스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냉혈한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지? 너는 나를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제를 보았다.

        

       “내가 맞춰볼까. 네게 만약 그 능력이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일단 나를 죽여봤을 것이다. 그리고 앨리스의 반응과 세상 돌아가는 것을 관찰한 다음 시간을 돌렸겠지. 그렇지 않으냐?”

        

       “…….”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만약 그게 더 유리하다면 선택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죽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요.”

        

       “그렇긴 하지.”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경계해서, 그리고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앨리스의 파벌을 보며 주판을 두드리느라 잠자코 있긴 하지만, 황제라는 명분이 제국으로 다시 저벅저벅 걸어들어온다면 기꺼이 나서서 따를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서 황제를 죽여버리면 나도 죽을지 모르고.

        

       “저는……”

        

       순간 폐하, 라고 부를 뻔했다가 말을 고쳤다.

        

       “당신을 다시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 명을 내린 이는 앨리스겠지.”

        

       “지금은 황태녀 전하십니다.”

        

       “하지만 앨리스는 앨리스다. 네가 그런 호칭을 쓸 때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돌아오시더라도, 한동안은 연금 상태일 겁니다.”

        

       “그 한동안이라는 말이 남은 평생을 뜻하느냐?”

        

       “그건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달렸습니다. 만약 앨리스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 협조적이라면 당신은 평범하게 상황으로서 여생을 보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그 한동안이라는 말이 평생이라는 말과 이음동의어가 되겠죠.”

        

       황제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내가 협조적일 것이라 생각하느냐?”

        

       “제가 벨부르에 와서 당신부터 만나러 왔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황제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제 ‘형제자매’들을 먼저 만나고 왔습니다.”

        

       “호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그러니까 이제는 시간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 그 모두에게, 당신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죽어간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한쪽은 그냥 뚱하게 그러려니 반응했지만, 다른 한쪽은— 조금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예, 제가 비슷한 처지가 될 뻔했던 당신의 딸 말입니다.”

        

       나는 황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지만, 황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설득하는 데 꽤 오래 걸렸습니다.”

        

       이런 시대다.

        

       그리고 여자고.

        

       안 그래도 비참한 삶이었지만, 시대상이 거기 무게를 더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의 문제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군.”

        

       내 말을 들은 황제는 웃었다.

        

       그 웃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린 시원한 웃음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한 화가 전부라서 더 죄송합니다…

    내일부터는 제대로 두 화씩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나저나, 오늘 시스템 알림에 정기후원 서비스 종료가 떠버렸네요.

    뱃지라던가 그런걸 만들 수 있길 기대했는데 보답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정기후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

    회색도시2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작들도 모두 읽어주셨는데 이번 작도 끝까지 따라와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 옆에서 이렇게 함께 걸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저도 오늘도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300화나 되는 소설을 읽는데 드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저의 글을 따라와주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그 시간이 독자님의 삶에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독자님과 함께 쭉 걸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꽤 오랫동안이겠지만), 그동안 독자 여러분들과 계속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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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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