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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1

        

         “얘도 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갔던 거라면 그렇다 말을 하고. 혹시 포커 플레이어가 꿈이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능력 있는 애가 그런 불규칙한 직업을 가지는 건 좀.”

         

         장소는 엔지니어 플라자, 아나스타샤의 집.

         잠깐 화장실을 좀 쓰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운 헬레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세면대로 고개를 떨궜다.

         

         경찰 시절 시경계 관문에서 근무할 때 빚을 지고 몰락한 탓에 밀수업 같은 걸 돕다가 잡힌 전문 도박사만 몇 명을 봤으며, 어쩌다 거리 순찰에 증원을 나가도 골목에서 노숙하던 자칭 프로 카드 플레이어를 본 게 몇 번인데 여동생이 그런 길로 빠지게 놔두겠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암, 그렇고 말고.

         

         이제 또 도박이라 하면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오는 메가 코프가 하필 파라다이스 코퍼레이션.

         

         그들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하베스트 플래닛은 지금도 ‘면적 대비 게임장 수가 가장 많은 도시’ 랭킹 1위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며 현재 진행형으로 증축을 거듭해 그 숫자를 늘리고 있는 걸로 안다.

         

         최종적으론 어떻게든 손님이 지게 설계되어 있는 불합리한 판에 다른 길도 많은 그녀가 기웃거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거짓말쟁이라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미 벌만큼 번 다음 손 털고 나왔다는 것도 못 믿을 소리다. 중독자들의 뻔한 레퍼토리 아닌가? 지인에게는 ‘나 이제는 안 해!’라고 말하고선 뒤로 몰래 쪼르르 달려가는 불안한 그런 거.

         

         “…….”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자 거기엔 복잡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있었다.

         

         여성은 신체적 차이로 남자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였던가?

         평균보다 밑이면 밑이었지, 극적인 상황을 빼고는 살면서 그런 사실을 크게 체감해본 경험이 없기에 자각이 적었는데 이렇게 느끼게 될 줄이야.

         

         화내는 척,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잔소리는 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헬레나는 진심으로 아나스타샤를 바꾸려 들 수 없었다.

         

         왜? 그야… 그녀는 외형처럼 어리고 이제 막 세상만사를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무구한 소녀가 아니라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행동하는 성인이니까?

         

         본인은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 내버려두기만 해도 혼자 데굴데굴 변하는 표정 탓에 무심코 손이나 말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잦았지만.

         보면 볼수록 나름 확고한 시선과 잣대를 가지고 사물을 판가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그런 부분은 이제 재미 삼아 반응을 보기 위해 찔러보는 재료로 써먹는 것이고 말이다. 음, 아마도?

         

         …하지만 이미 서로에게 너무 깊이 관여한 이상 끊임없이 신경이 쓰이는 것도 불가항력에 가까웠으니.

         

         여러 번 다시 말하지만 헬레나 발렌타인에게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은 비교적 짧은 기간, 삶에 갑자기 끼어든 것치고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족의 은인,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크게 도움을 받았을뿐더러… 사적인 영역을 거의 모두 내보인 상대. 무엇보다 외모도 많이 기호에 부합, 감히 취향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이라 해도 좋으리라.

         

         한때 연구소에서 극적인 탈출극을 벌였다 고백하기도 했으니, 에나마에서 시험관 아기를 의뢰받는 것 외에도 취향에 맞게 사람을 찍어낸다는 도시 괴담은 진실이라 여겨도 되지 않을까?

         

         하기사 태생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다 큰 사람이 저렇게 아기자기하고, 성격도 기특하고, 피부도 부드럽고, 목소리조차 앙증맞고, 체취마저 달콤하…….

         

         “…흠, 어흠!!”

         

         아니, 안 된다.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팔자에도 없던 여동생에 대한 예찬이야 날이 저물던 해가 다시 뜨던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일단 본론으로 돌아가서.

         

         얼핏 치사하다. 불공평하다 내심 느꼈던 정보의 불균형을 이번에 확 해소해준 건 정말 고맙다.

         자기만 일방적으로 가까운 관계라 여긴 게 아니라는 증명도 자연스럽게 완료한 것 같아서 딸려온 기쁨도 컸다 말할 수 있겠고.

         

         중간중간 본인이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불리한 부분을 은근슬쩍 숨기려고 말장난을 하기는 했지만 입밖으로 꺼내기조차 위험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 사정, 비밀들을 선뜻 공유해준 건 영광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백 마디 말로 얄팍하게 믿는다 주워섬기는 것보다, 스스로 약점을 내보인다는 게 어떤 뜻인지 절절히 경험한 지금 자신이기에 더더욱.

         

         이게 미용 광고인지, 아니면 비틀린 연애 결혼 장려 광고인지 도무지 모를 방송을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할까. 그래도 여전히 새치기 당한 기분이라 볼 때마다 불쾌할 것 같다고 할까.

         

         하여간 이젠 스킨십이나 가벼운 터치가 있으면 마냥 거부하기 보단 먼저 주변의 시선부터 신경 쓸 만큼 거리감이 확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있긴 있었는데….

         

         …그런데 왜 기껏 모든 걸 다 털어놓으면서도! 그때 자기가 먼저 고백했던 건 아예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기는커녕 거기에 대해서만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는가!

         

         분명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틀-심적 저항선-을 넘은 의미를 담아 좋아한다며 고백 공격을 하지 않았나?

         진짜 과다 출혈과 뇌진탕으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들은 환청에 불과한가?? 아무리 따져봐도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빠그작!!

         

         “언니…? 안에 괜찮은 거지? 혹시 뭐 망가지거나 그러면서 다쳤어??”

         

         “…플라자라고 다 고급품만 쓰는 건 아닌가 보네. 세면대가 많이 약한 건지 좀 깨졌어. 빨리 바꿔야겠다.”

         

         손아귀를 풀자 파편…이 아니라 곱게 갈린 가루가 후드득 떨어진다.

         

         온전히 무의식 상태로도 작동하는 임플란트는 긴급 구조형 이식물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진짜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외부로 표출해야겠다 여긴 결과라는 건가? …에이, 설마.

         

         악력에 의해 작살난 세면대 귀퉁이 잔해를 슥슥 쓰레기통에 쓸어 넣고 손까지 씻은 헬레나가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하니 무구한 여동생은 그걸 또 의심없이 믿고선 밖에서 드로이드와 둘이 쑥덕거렸다.

         

         “그래? 하긴… 큰 가구나 기본 옵션 같은 건 전에 살던 사람이 쓰던 걸 그대로 이어받아서 좀 많이 낡았을지도? 어, 이런 것도 공짜로 바꿔주나? 난 세입자가 아니라 매매로 들어와서 해당이 안 되나?”

         

         – 기왕 파손된 거, 이 참에 아샤님 취향으로 새롭게 꾸미시는 건 어떠실까요?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저에게 축적된 기호 데이터가 모자란 만큼 좋은 학습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

         

         “쉿…! 제로 얌마, 안 그래도 돈 귀한 줄 모르는 것 같다고 한창 혼나던 와중이었는데 네가 갑자기 그래버리면…!!”

         

         아나스타샤는 영락없이 잔소리하다가 열이 오른 자신이 그저 잠깐 세수하러 온 줄로만 아는 모양이나…… 실은 우리 사이에 애정 표현이 적고 불분명한 것 때문에 심란해서 잠깐 냉정을 찾으려 화풀이를 했다 하면 얼마나 황당해할까?

         

         재미야 있겠지만 절대 안 될 말이다.

         

         나약한 면모를 분명 보여주긴 했어도,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긴 했어도.

         아직 당당하고 믿음직한 우상을 자신 쪽에 겹쳐보고 있다는 게 종종 느껴지는데 함부로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답답한 밀당 따위는 그만두고 일선을 확 넘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소녀의 순정(?)을 지켜주는 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나?

         

         게다가 감정이란 건 시간을 좀 들여야 무르익는 법이니, 오랜만에 본 첫날부터 그런 무드를 잡는 건 영 멋없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사실 미안해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음에도 ‘나쁜 행동이다.’라는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쩔쩔매는 아나스타샤의 모습만 약간 즐기다 가도록 하자.

         

         처음에 액수를 듣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소비 생활을 하는 건 딱히 죄가 아닐진대, 그녀는 묘하게 보수적인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지적 받으면 엄청 허둥지둥하는 게 즐겁단 말이지.

         

         “그래서, 반성은 했어? 또 위험하게 카지노에서 50억씩 들고 장난하다 날려먹을 거야?”

         

         “진짜 많이 반성했습니다…. 다시는 돈이 복사가 된다며 요행에 기대지 않겠슴미다…. 그렇지만 못 따서 잃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박장이 압수 수색당해서 재환전을 못했다는 것만 부디 알아주십쇼….”

         

         밖으로 나오니 세상 깜찍한 생물체가 헬레나를 반겨주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최대한 시무룩한 얼굴로 방석에 무릎까지 꿇고, ‘저는 선량한 피해자입니다~ 혼내지 말아주세요~’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라.

         

         이런 귀여운 애가 옛날엔 남자였었다는 게 어쩌면 네오 헤이븐 최고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황무지 개척촌에서 전투 경찰, 그 다음 바로 암시장 용병 테크를 탄 터라 더럽게 마초적인 인간 군상만 겪었던 헬레나에게 21세기 게이밍 초식남이란 어떤 이미지일지. 당사자가 알면 자존심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좋아, 알았다면 됐어. 난 그럼 슬슬 일어나봐야 하니까… 욕실 쓸 거면 꼭 슬리퍼 신고 들어가야 한다? 아니다. 제로가 벌써 치우러 들어갔구나? 기특한 녀석이네.”

         

         “어라? 아까는 자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무조건 그러려고 했는데… 내가 정말 급한 일이 좀 생겨서.”

         

         물론 여기서 ‘원래’ 계획했던 건 단순한 자매 간의 살가운 동침만이 아니라, 정식으로 같이 활동하기 위한 팀 등록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헬레나는 까먹은 것처럼 일부러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간단히 요약해서 근거는 두 가지.

         

         첫번째로는 아나스타샤가 곧장 대답하지 않고 곤란해했다는 점에서 이미 거절을 짐작한 것.  

         그리고 두번째로는 예상보다 너무 심심한 의뢰 때문에 자기와 같이 활동하면 좋을 설득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판단한 것.

         

         아샤와 제로, 둘의 호흡이 상당히 척척 들어맞는 것도 컸고.

         

         수상할 정도로 전열에 세울 드로이드를 이렇게 많이, 존나 많이 준비하는 걸 보면 딱히 자신을 배제한 게 아닌 누군가와 팀을 이룰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니까, 이 정도만 해 둬도 자신이 필요하다면 선뜻 연락을 해주지 않겠나.

         

         그리고 가족이 아닌, 연애에도 관심이 생긴 ‘인간 헬레나’ 입장에서도 동거하는 게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예전 주치의도 취향 따라 커스텀 한 고성능 안드로이드와 동거했지만, 좋다(Like)는 될지언정 사랑(Love)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나스타샤를 안심하고 맡겨도 되는 게 로봇 집사를 자처하는 제로가 아닐까?

         

         …….

         정말 괜찮겠지? 한참 전에 점 찍어 놓은 사람 무시하는 새치기범이 설마 또 있겠어.

         

         쪽.

         

         “의뢰 보고 때문이야? 그럼 진짜 바로 가는 거… 히야아악?!?”

         “흐흠♪ 그렇게 아쉬우면 내일 모레쯤 갈아입을 옷이랑 다 챙겨서 놀러올게. 알았지?”

         

         막상 손님이 미련없이 떠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당황했는지, 조심성 없이 마중 나올 겸 다가오던 그녀의 뺨을 꼬옥 붙잡고 이마 쪽에 가벼운 입맞춤을 떨어트렸다.

         

         단편적으로 본다면 친애의 표현, 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한 임자가 있다는 걸 확실하게 표시해두는 도장 삼아.

         

         동시에 예전에 경찰직을 때려치우던 날에 보인 못난 모습으로 깎아먹었을지도 모르는 평가를 만회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며.

         

         그제서야 코앞에 닥친 은밀한 정조의 위협을 느끼고는, 부랴부랴 소파 뒤편으로 대피한 여동생을 보며 작게 웃은 헬레나는 신발을 신고 집을 훌쩍 떠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더 밑으로. 바이크를 세워놓은 지하 주차장까지.

         달짝지근했던 감촉과 기분은 수면 아래로. 잔열의 불길을 다른 방향으로 돋굴 겸 어깨와 목을 좌우로 푼다.

         

         간만에 친애하는 사람을 만나 무디어진 직감과 육감을 끌어올리듯, 기어를 바꿔 넣어 전신의 근육은 물론 몸 안의 장기 활동마저 바짝 조였다.

         

         여동생 본인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많이 양보받았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일반적으로 메가 코프급 기업이 한 사람에게 집착한다는 건 상식 외의 사태.

         

         더군다나 한 쪽은 과거 감금 주체, 다른 쪽이 겨우 탈출한 생존자라면 참견을 안 하는 게 더 어려운 관계다.

         

         단순한 날파리는 아니고 감독관 비슷한 존재라는 건 제대로 들었지만. 저쪽이 먼저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집안에 있을 때부터 계에에속 존재감을 뽐냈으니까….

         

       

       

         “그래서… 댁은 한 판 뜨겠다는 거야, 그냥 말겠다는 거야? 아샤 옆집에 사는 기업 스토커 씨?”

         

         “……구태여 불필요한 싸움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다만 아나스타샤 공이 소인으로부터 숨기려 한 게 누구인지는 필히 알아야 하기에.”

         

       

       

         아하. 그건 다른 말로, 마땅한 핑곗거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덤벼들겠다는 뜻이렸다? 

         

         인간 헬레나는 잠시 휴업 상태로 전환. 

        동생에게는 언니, 한때의 부하 경찰들에게는 대장. 그리고 이제는 블랙마켓 코드네임 늑대(Wolf)로 통하는 일이 잦은 그녀가 사납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쌈박질에 굶주린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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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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