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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2

     [제국력 100년 1월 1일, 오전 9시 32분. 지브롤터 후작가 캐롤라인 성.]

     “노렸군.”

     집무실에 모인 이들은 창밖을 바라보는 크림슨 후작의 냉랭한 분위기에 침만 꿀꺽 삼켰다.

     “…….”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에 더불어 당장 조치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멘테 경.”

     “예, 후작 각하.”

     “누아르를 제외한 모든 지브롤터 일가를 지켜라. 목숨을 걸고.”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바로 이동할까요?”

     “그래. 부인, 그리고 얘들아.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크림슨 후작의 말에 샤를로트 후작 부인을 비롯한 아이들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어서 따라오렴.”

     그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샤를로트 부인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후작 부인을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저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인가.”

     크림슨 후작은 잠시 쓰게 웃었다.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계속될지도 모르는 평화에 대한 미련, 혹은 안타까움일 터.

     “누아르.”

     “예, 후작 각하.”

     

     유일하게 집무실에 남은 지브롤터, 누아르가 기사처럼 자세를 바로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올해로 17살이고, 마스터를 직전에 두고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다. 시간이 몇 개월만 더 있었다면, 너는 능히 마스터가 되었겠지.”

     누아르 지브롤터.

     최소한 2개월 정도만 더 여유가 있었어도, 완벽하게 마스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경지.

     “명심하거라. 위기는, 전쟁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지금처럼.”

     “명심하겠습니다.”

     “너는 나의 부관이다. 나를 따라다니며, 전쟁 중에 지브롤터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철저히 보고 배우거라.”

     “그것은….”

     누아르는 잠시 누군가를 생각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으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좋다. 지브롤터 기사단. 지시를 내리겠다.”

     쿵.

     집무실에 모여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현재 전선은 둘. 남부의 세이레네 백작령. 그리고 협곡 방면.”

     집무실 한쪽에 펼쳐진 지도를 향해 크림슨 후작이 지휘봉 끝을 겨누자, 곧 지도에 붉은빛이 반짝거리며 점과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이레네 백작령 방면에 대한 대응은 카를로스 경, 자네에게 맡긴다.”

     “존명.”

     카를로스를 비롯한 기사단 절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협곡 방향의 수비가 굳어진 뒤, 세이레네 구원에 나선다. 그때까지는 세이레네 방면으로 수비를 굳건히 하도록.”

     “세이레네 백작령의 영지민들에 대해서는….”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되, 여차하면 잘라낸다. 모든 일은, 지브롤터 후작의 이름으로.”

     “…지브롤터에 먹칠을 하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크림슨 후작의 단호한 말에 카를로스를 위시한 기사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협곡 방면은….”

     

     다다닥.

     집무실의 문이 열린다.

     “제가, 돕게 해주세요!”

     “…….”

     갑작스럽게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라고, 또 그 등장한 이의 정체에 대해 긴장하며, 마지막으로 그녀가 한 말에 대해 당황한다.

     “아스타시아 황녀.”

     “지금, 여러모로 상황이 이상하고, 그런 건 알고 있지만…!”

     “진정하시오.”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아스타시아를 향해, 크림슨 후작이 목소리를 풀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레이라면 안전할 것이오.”

     “…….”

     “그리고 그대 또한, 이곳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그건….”

     “제국의 황제는 황녀가 지브롤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소.”

     크림슨 후작은 집무실 책상 옆에 놓여있는 수정구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정구 안에는 무언가 소리를 품은 듯한 마력이 내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지브롤터까지 적으로 바라보는 것인가. 아직 그에 대한 확실한 선언을 하지 않았지.”

     “그건….”

     “적이라고 생각해도 그대는 이곳에 있어야 하고, 적이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그대는 이곳에 있어야 하오. 그것이 황제에게 버림패로 이용당한 정치적 희생양이든, 아니면 노스트럼을 버리고 제국의 편이 된 매국노 가문에 대한 인질이든.”

     “……저는.”

     아스타시아가 잠시 눈을 파르르 떨며 답했다.

     “이미 이곳에 온 순간부터, 지브롤터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저는 제국의 황녀이기 이전에,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사람의 것이니까요. 만일 제가 지브롤터를 배신한다면, 저를 죽여도 좋아요.”

     “그런 억지는-”

     “만일 황제가 그레이를 죽였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따라 죽겠어요.”

     아스타시아의 귀기 어린 말에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킨다.

     “제가 협곡으로 가는 건 전부-”

     “그레이가 안전한지 확인하러 가려고 하는 거겠지. 물론, 나도 그렇소. 아니…그렇단다.”

     크림슨 후작이 깊게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스타시아. 여차하면 제국을 향해, 검을 겨눌 수 있겠느냐?”

     “그 검이 제국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휘두르겠습니다.”

     “…….”

     크림슨 후작은 기사들을 쭉 훑었다.

     “아스타시아의 말에는 아무런 거짓이 없음을 이 크림슨 지브롤터가 보장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말라.”

     “…….”

     “대답은?”

     “…예!”

     기사들이 어느정도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크림슨 후작의 말에 결국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불신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기도 했고, 갑작스럽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레이가 없다고, 이렇게 흔들리는 건가.”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존재의 부재가.

     그리고 그가 하필이면 제국으로 간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니, 수천 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됐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 지브롤터 제 2 기사단은 나를 따라 협곡으로 따라오도록. 특히, 로버트 경.”

     “예!”

     “자네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할 거지?”

     “……예?”

     크림슨 후작의 질문에 막 후작을 따라나서려고 하던 로버트 경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레이가 그러더군.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제국을 상대로 하는 일이 생길 경우, 로버트에게 자신의 답을 맡겨놓았다고.”

     “…제가요?”

     “틀린가?”

     “아, 아니, 그게….”

     로버트 경은 자신에게 쏠린 모두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더듬었다.

     “뭔가 편지를 남겨두시거나 그런 것도 없고, 답이라고 해봐야 평소에 하던….”

     순간.

     “…저기, 후작님.”

     “말하라.”

     “지금 당장 끊어야 합니다.”

     로버트는 바깥을 가리키며, 검으로 허공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협곡 내부를 가로지르는 철도. 제 3관문부터 하든 아니면 제 1관문부터 하든, 협곡의 관문을 닫을 수 있게 당장 철로를 자르러 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소드 마스터가 오러를 이용해 철로를 잘라낸 다음, 그걸 옆으로 치워버리고 난 뒤에는 지브롤터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크림슨 후작이 바로 문밖으로 향했다.

     “당장 가도록 하지. 전원, 위치로.”

     * * *

     [제국력 100년 1월 1일, 오전 11시 39분. 지브롤터 협곡 너머-붉은 황야.]

     “아, 미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전신 갑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 클레이돌 후작은 철로 위에서 협곡 방면을 바라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어떻게 된 거냐. 길.”

     “제 이름은 이제 길베르트입니다. 후작님.”

     “저거, 지금 어떻게 된 거냐고.” 

     “어떻게 된 거냐니요. 늦은 것이지요.”

     갈색 머리의 안경을 쓴 청년은 익숙하지 않은 듯 갑옷을 만지작거리며 전방, 협곡 방면에 펼쳐진 광경을 가리켰다.

     “그 사이에 철로를 치우고 협곡 문을 닫았다. 적들이 우리보다 더 빨랐다. 그뿐입니다.”

     “젠장. 준비 시간만 더 있었어도.”

     “결과적으로 적보다 늦었죠.”

     “야. 1시간 만에 최정예 병력 3천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 게 어디 쉬운 얘기인 줄 아냐?”

     클레이돌 후작은 억울하다는 듯 발로 바닥을 굴렀다.

     얼굴까지 가린 전신 갑옷을 입고 있어, 표정으로는 그 심정을 다른 이들이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선전포고 한 번으로 협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면, 지브롤터 협곡이 500년 동안 노스트럼 땅이었겠습니까.”

     “젠장….”

     클레이돌 후작은 자기 몸통보다 훨씬 거대한 도끼날을 가진 핼버드를 땅에 내려놓았다.

     “폐하께서는 아침이 아니라 밤에 선전포고하시지, 왜 아침에 하셔서는….”

     “클레이돌 후작께서도 모르셨잖습니까. 오늘 당장 전쟁을 선포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죽은 거? 하아, 좀 섭섭하긴 하네.”

     클레이돌 후작은 자기 어깨에 새겨진 ‘2’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팔신장 중 두 번째인 내게도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그럴 상황이었겠죠.”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황제 폐하의 편이냐?”

     “클레이돌 후작가의 사람이지만, 후작께서 폐하께 충성하시니 저 또한 폐하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길베르트는 안경을 손바닥으로 슬쩍 올리며, 협곡 관문 위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저기 있는 자를.”

     “…그래. 저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관문 위.

     붉은 장발을 흩날리며, 검을 아래로 꽂은 채 손잡이에 손을 살포시 올리고 있는 남자가 서 있다.

     “오랜만이구나, 크림슨 지브롤터ㅡㅡ!”

     

     클레이돌 후작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국이 비싼 돈을 들여서 기껏 깔아둔 철도를 멋대로 파괴하다니!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

     “…….”

     크림슨 후작은 인상을 찌푸리는 걸로 답변했다.

     “야. 길베르트. 쟤 오늘 더 화나 보이는데.”

     “저한테는 안 보입니다. 지금 거리가 얼만데.”

     “안경 끼면 잘 보일 거 아니야.”

     “안경은 마도 확대경이 아닙니다.”

     그 짜증스러운 얼굴은 언제나 저 관문 위에 올라가 있을 때 항상 봐왔던 것이지만, 클레이돌 후작은 오늘따라 분노가 서린 듯한 후작의 표정에 핼버드의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제대로 한 번 붙을 수 있겠는데.”

     “붙는다니요.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잊으셨습니까. 황제 폐하의 말씀을.”

     “알지, 알지. 우리가 상대할 건 지브롤터가 아니라 노스트럼이니까.”

     클레이돌 후작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구시렁거리면서도 다시 앞으로 나섰다.

     “지브롤터여! 그대들은 노스트럼의 편인가, 아니면 제국의 편인가!”

     “…….”

     “노스트럼의 수호자를 자처하겠다면, 그대들은 우리의 적이다! 하지만 그대들이 제국의 편이라고 한다면, 문을 열어라! 우리는 지브롤터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최신식 머스킷을 어깨에 걸친 제국의 최정예병사들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그대들이 제국과 함께하겠다면, 얌전히 노스트럼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라!”

     “클레이돌.”

     크림슨 후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히, 지브롤터에게 위치를 강요하지 마라.”

     “……!”

     “지브롤터는 지브롤터의 의지로 선택한다. 노스트럼의 수호자로서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함부로 군화를 밟고 들어오는 불청객을 받지 않을 뿐이다.”

     “…흐, 흐흐. 말장난을 하시겠다?”

     “협곡은 지브롤터의 땅이며, 협곡에 관한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잊지는 않았겠지?”

     크림슨 후작이 옆에 선 기사를 향해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우리에게는, 아직 왕국을 떠나지 않은 수많은 제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살기를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전부 ‘인질’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지브롤터를 향해 칼을 겨눌 생각인가?”

     “…못 본 사이에 협잡꾼이 다 되었군, 크림슨 지브롤터!”

     “남의 아들을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

     “응?”

     이를 가는 듯한 크림슨 후작의 말에 클레이돌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이 지브롤터 이야기가 왜 나와? …아, 아들의 순정을 이용했다, 뭐 그런 거에 분노하는 건가? 흐흐흐.”

     “네놈은-”

     크림슨 후작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옆에 있던 기사가 다급하게 뭔가를 말하며 크림슨 후작을 제지했다.

     “야. 저거, 참모인 것 같은데.”

     “생긴 거나 떡대는 기사인 것 같습니다만.”

     “기사가 너보다 더 똑똑하거나 그러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

     “…….”

     참모 길베르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클레이돌 후작은 키득거리기만 하며 핼버드를 힘차게 들었다.

     “야ㅡㅡㅡ아!”

     강력한 마나를 싣고, 그는 포효를 내질렀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협곡을 넘어서려고 발악할 거라고 생각했냐, 이 어리석은 자들아!!”

     구구구구.

     지평선 너머.

     붉은 황야의 끝에서, 한 대의 거대한 마도자동선 한 대가 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도자동선의 양옆에는 날개가 펼쳐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뒤에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제국의 최신식 전략병기, 비행선이라는 것이다!!”

     철로를 따라 서서히 땅에서 치솟아, 클레이돌 후작의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선.

     “어?”

     그 위.

     “……어?”

     비행선의 선미, 배의 끝에 익숙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레이 지브롤터?”

     쟤가 왜 저기에서 나와.

     라고 클레이돌 후작이 속으로 곱씹었으나.

     부ㅡㅡㅡ웅.

     비행선은 그저 강력한 마도 엔진의 바람을 내뿜으며, 그대로 지브롤터 협곡 관문 위로 날아갈 뿐이었다.

     그 어떤 제국군도, 내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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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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