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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2

       머리가 터진 정령들이 산 아래로 추락했다.

       

       툭, 툭, 투둑. 엘프군 진영에 영체의 비가 내린다. 전투에 넋이 나갔던 군인들이 기겁하며 눈을 돌렸다. 헛구역질을 하는 자도 있었다.

       

       “네, 네 이놈…!”

       

       노움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했다. 저 손에 잘못 맞으면 자신이라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묻어두었던 대전쟁 당시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옅지만 확실한 공포였다. 노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요르문간드를 마주 보았다.

       

       남쪽 해안선에서 물기둥이 치솟은 건 그때였다.

       

       “지군(地君)! 도와드릴게요!”

       

       로그웨이브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수계정령이었다.

       

       머리카락은 물비늘이 이는 것처럼 반짝거렸고, 군청색 눈동자는 해무 낀 바다를 담은 것처럼 덧없이 창연하다.

       

       아려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바닷물을 징검다리 삼아 노움에게로 다가왔다.

       

       “수군이군! 마침 잘 왔네!”

       

       물의 정령왕, 시큐엘. 그녀를 본 노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큐엘은 슬그머니 내려앉으며 민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자가 민천인가요?”

       “그렇네.”

       “범상치 않은 마수군요.”

       

       시큐엘은 뒤늦게 정령왕이 되었다.

       

       그녀는 대전쟁을 겪지 않았다. 요르문간드와도 오늘 처음 만났다. 저 고룡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큐엘의 눈이 누운 마름모처럼 가늘어진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정보부터 살필 필요가 있었다.

       

       ‘…토착신앙의 사제복인가요.’

       

       역십자 무늬가 수놓인 한벌옷을 입고 있는 요르문간드. 아래쪽으로 갈수록 노출이 조금씩 늘어난다. 고혹적이었다.

       

       요르문간드 또한 공중에서 다리를 꼰 자세로 시큐엘을 훑었다.

       

       ‘처음 보는 마력 반응이군. 이 자가 새로운 수군이렷다.’

       

       몇 초간 이어진 탐색전.

       

       먼저 입을 연 것은 요르문간드도 시큐엘도 아닌, 노움이었다.

       

       “조심하게. 저자의 정권에 맞아 날아가면 마법을 써서는 안 되는 몸이 되어버리니까.”

       “마법을 쓰면 안 되는 몸이 된다니요?”

       “말 그대로일세. 고룡의 기술에는 마력을 강제 폭주시키는 것이 있어. 대전쟁 시절에 알게 된 사실이네. 그때 저 손에 동료들이 많이 죽었고.”

       

       노움은 설명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당시 ‘괜찮은데?’ 했다가 돌연사했던 정령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러면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면 되겠군요.”

       

       판단을 내린 시큐엘이 진을 전개했다.

       

       후우웅, 하고 공중에 마법진 수백 개가 띄워진다. 곧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불공정하군.”

       

       요르문간드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녀도 손을 휘적거리며 대응하는 마도진을 전개했다.

       

       [삼중항(三重項) ─ 예식(銳式)]

       

       [용익진(龍翼陣)]

       

       민천의 마법진에서 나온 것은 기계로 된 용이었다.

       

       한 마리에 족히 수십 미터는 넘는다. 마수 등급은 재앙급과 절멸급 사이의 어딘가. 리바이어던에 버금가는 거물들이었다.

       

       “크오오오!”

       

       철룡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선두에 선 녀석들이 빙창을 뜯어먹으며 전진했다. 붓으로 휘갈기는 듯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처음 몇 마리가 시큐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아아악─!!”

       

       쩌억. 용의 아가리가 넓게 벌렸다.

       

       “어딜 오나요!”

       

       시큐엘은 파도를 굽이쳤다. 뻑! 기계룡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가장 먼저 맞은 놈이 몸을 뒤틀며 하늘 위로 날아갔다.

       

       “흐아아압!”

       

       노움도 주먹을 휘두르며 뒤에서 오는 것들을 제압했다.

       

       두 정령왕은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수십 마리가 마법이나 주먹을 맞고 리타이어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밀리고 있다.’

       

       상성 차이가 극심했다. 기본적으로 마수는 상위 정령에 대항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나서면 초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된다.’

       

       한 명이라면 몰라, 두 명 상대로는 힘에 부쳤다. 기회를 보던 민천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과연, 1천 년을 살아 온 고룡답군. 영명한 판단이다.’

       

       후퇴하는 것조차도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대열을 유지하며 물러나는 모습에서 기개가 느껴진다.

       

       “……저건, 쫓으면 안 되겠군.”

       

       눈앞에서 요르문간드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도 노움은 입맛만 다셨다. 

       

       이프리트가 생각 없이 나아가다가 원자폭탄에 당했다. 그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두 정령왕은 우선 공격을 멈추고 사상자를 수습했다.

       

       “전 상천이 만든 무기를 민천에게도 사용할 수는 없나?”

       

       부상자를 치료하던 중 노움이 시큐엘에게 물었다. 시큐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무 때나 쓸 수는 없어요. 위치를 잘못 잡으면 저희까지 말려들 테니까요.”

       “그게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얼마 전 하늘이 검게 변한 걸 보지 못하셨나요?”

       

       노움은 쓰게 웃었다.

       

       “나는 자네처럼 똑똑하지 않아서 말이지. 그 정도로 뭐가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구만. 마왕군 진영 깊숙이 꽂으면 될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게 위험하다고요!”

       “……그, 그 정도인가?”

       

       흑주는 워낙 파괴력이 높다 보니 오히려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쓰여야 했다.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게다가 위력 조절은 육지보다 바다에서 쉽다고 들었어요. 원래 절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여서 그렇다고….”

       

       이러나러저나 마왕군에서 만든 마법이다. ‘정도’라는 게 없다. 당장 원자폭탄만 해도 반경 수 킬로미터를 날려버리지 않나.

       

       “이 전쟁이 끝나도 저는 걱정이에요. 마왕이 죽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마 새로운 위기가 곧 닥치겠죠.”

       “흐음.”

       

       시큐엘은 감마선으로 엉망이 된 초소를 정화했다. 그녀의 얼굴은 비꽃 내리는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이 전쟁은 이깁니다. 하지만…….’

       

       그때였다.

       

       “이보게, 저쪽을 보게나!”

       

       고민하던 찰나, 남동쪽에서 지원군의 모습이 보였다.

       

       “지군! 수군!”

       

       중년 남성치고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육중한 철골렘에 올라탄 사성장군이 확성기로 빽빽 소리를 지르며 두두두 달려왔다.

       

       게오르그 펙튼. 카우렐리아에선 모두가 아는 유명 인사였다.

       

       “무사하셨습니까!”

       “예, 어떻게든요.”

       

       펙튼은 침을 튀기며 전차에서 내렸다. 그가 스태프를 짚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펙튼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광기에 찌든 것처럼 핏대가 선 모습이었다.

       

       “그 용가리 새끼는 어디로 갔습니까?”

       “저희와 몇 번 받아치다가 후퇴했어요.”

       “아잇, 그것참 아깝군!”

       

       펙튼 장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입맛을 다셨다. 어깨를 들썩이며 투구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쟁광이 따로 없군.’

       

       “펙튼 장군, 쫓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민천은 호천보다 전략전술에 있어 더 유능하니까요. 잘못하면 함정에 걸릴 수 있어요.”

       “수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펙튼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치고 빠질 때를 확실히 알았다.

       

       전투를 벌일 때 항상 선두에 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보다 좋은 작전을 펼치기 위해선 선봉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건대 여긴 빠지는 게 좋겠습니다.”

       

       펙튼은 급조한 망루에 올라 산등성이를 빠르게 훑고 내려왔다.

       

       흥분이 가라앉자 평범한 장년 신사로 돌아온 펙튼. 그런데도 그의 삼백안은 여전히 섬뜩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두 정령왕도 그쯤에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펙튼 장군의 뒤를 따라온 병사들의 얼굴이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정령왕의 용안에 경탄했고, 또 누군가는 진창이 된 부대를 보며 경악했다.

       

       그런 와중에 유독 침착한 두 사람이 있었다.

       

       ‘저 둘은…….’

       

       한 명은 엘프 남자. 다른 한 명은 요호족 여자아이. 머리 두 개 차이 나는 두 사람은 친구처럼 보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던 학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쓰디쓴 웃음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참혹했다.

       

       시큐엘도 씁쓸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버멜 호르데 군, 그리고….”

       

       그 옆에 선 요호족 꼬마애한테 용건이 있어서였다.

       

       

       **

       

       

       요르문간드는 며칠간 진열을 정비했다.

       

       마왕군과 인간-엘프 연합군. 산맥 하나를 두고 양쪽 군대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서로 참호를 파고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죽은 골렘을 끌어모아 요새포와 벙커도 증축했다. 다지기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따분하군요. 공격은 언제 합니까?”

       “지금.”

       “그렇군요. 지금……. 지금…?”

       

       9월하고도 열흘째 되던 날 새벽. 

       

       오랜 침묵을 깨고 마왕군이 움직였다.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우리 목표는 정령왕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다. 절대로 앞서 나가지 마라!”

       

       마왕군은 치고 빠질 생각이었다. 야간 기습을 통해 적의 출혈을 유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둥둥둥둥─!!

       

       “적습이다, 적습!!”

       

       초병이 소리쳤다. 그는 곧 머리통에 포탄을 맞고 뒤로 넘어갔다. 상반신은 사라진 채 하반신만이 꿈틀거리다가 추욱 늘어졌다.

       

       마왕군은 본격적으로 8군단 휘하의 산채를 둘러쌌다. 

       

       땅이고 하늘이고 가릴 것 없었다. 땅에서는 맹수의 형상을 한 검은 마수들이 철책을 부수며 나아갔고, 공중에서는 전기룡들이 전기를 내뿜어 기지 한가운데에 불길을 놓았다.

       

       그러나 기지를 전소할 수는 없었다.

       

       “누, 눈부셔…!”

       

       검은 하늘 위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초소의 거주막사 중 한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게 뭐지?”

       

       지휘를 맡은 금안족들이 눈을 멀뚱거리며 빛을 관찰했다. 요르문간드는 피트 기관을 써서 열원을 머릿속에 읽어들였다.

       

       ‘정령왕의 마력파다.’

       

       물의 정령왕도, 땅의 정령왕도 아니었다.

       

       “바람인가….”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

       

       ‘저녁까지만 해도 3군단에 있었는데…?’

       

       3군단은 여기서 십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다. 공군 에어리얼의 기척은 거기서만 느껴졌다. 이곳 8군단이 아니라.

       

       […….]

       

       에어리얼은 눈을 슬며시 뜨며 시가를 읊었다. 마수들에겐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요르문간드는 귀를 틀어막았다. 머리 위로 난 뿔 때문에 청각을 전부 차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용족의 뿔은 소리를 증폭하는 역할도 한다.

       

       ‘뭔가 잘못됐다.’

       

       이번 기습의 목표는 시큐엘과 노움을 교란하는 것. 그런데 정작 두 정령왕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어느새 눈앞에선 순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마수들이 칼바람에 찢겨 하나둘씩 산산조각이 났다.

       

       “함정이군. 후퇴하라!”

       

       천천히 물러나려는 요르문간드.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서 최상급 정령 수백 마리의 마력파가 느껴졌다.

       

       “하하! 걸려들었구나!”

       

       중후한 고함이 산채 전역에 울려퍼졌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노움 아니면 펙튼 장군. 둘 중 한 명일 것이다.

       

       요르문간드는 사색이 되어 뒤를 살폈다.

       

       “각하, 포위당했습니다!”

       “……여 또한 알고 있다.”

       

       요르문간드의 입술이 꽉 물렸다.

       

       ‘실책이군.’

       

       기습을 예측 당했다. 병법에선 흔히 있는 전술이었다. 이 정도는 요르문간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 정탐은 완벽했다. 진열도 지난 며칠간 공고히 다졌다. 현재 공격 방향도 일사불란했다. 모든 것이 일기가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줄 알았던 적군 병사들이 도리어 중무장하고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플레어와 정령마도 앞에서 지상군은 속수무책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지상군이 퇴각할 길은 보이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요르문간드는 공중에서 퇴로를 열었다. 덤벼오는 최상급 마수를 물 흐르듯 쳐내며 본대를 뒤로 이끌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와 랜딩을 시도했다. 작전에 참여한 5천 마수 중 3천 마리만 살아 돌아왔다.

       

       총 전력의 4할을 잃었다. 군사학적으로 ‘전멸’이라 부르는 상태였다.

       

       “…퇴로, 퇴로는 있는가?”

       “북북서 방향에 막히지 않은 오솔길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곳은 다 막혔는데 거기만 멀쩡하다고?’

       

       보나 마나 뻔하다.

       

       “저쪽은 함정이다. 북동 방향으로 가야겠군.”

       

       북동쪽은 산줄기가 험한 편이었다. 제아무리 마수의 군세라고는 해도 기슭을 밟고 이동하기엔 위험이 따랐다.

       

       그랬기에 요르문간드는 천험한 길을 선택했다. 

       

       마수도 다니기 어려운데, 인간이나 엘프는 오죽할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 에피소드가 적벽대전을 연상케 한다고 어느분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프리트가 죽은 초원 이름이 ‘이링’이었죠. 이링은 삼국지의 이릉 지역을 뜻합니다. 이릉은 이릉대전이 벌어진 곳이지요.

    이릉대전의 플롯은 이렇습니다. 튄다. 튄다. 튄다. 그렇게 튀고 또 튀다가, 때를 봐서 적 진지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빠밤, 대승!

    이프리트의 원자폭탄 가두리 양식은 이 구조를 차용한 것입니다. 요새 삼국지를 재탕하다 보니 이런 스토리를 짜는 게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ㅎㅎ

    말 나온 김에 나중에는 삼국지물도 써보고 싶습니다. 아마 쓰게 된다면 ts 장르일 가능성이 큽니다.

    누가 ts당할진 이미 머릿속에 구상해 놓았습니다. 스토리라인은 어떨지도 얼추 만들었죠. 하지만 당장 이 기획안을 보신 건 담당 pd님뿐일 것입니다… 홀리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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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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