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16

       “황녀를 이렇게 부려 먹는 사람은 세상에 스승님 말고 없을 겁니다.”

        

       “따지자면 황제 자리에 앉은 이들은 모두 너를 부려 먹었고, 부려 먹는 중이지 않았느냐?”

        

       “……앨리스는 아닙니다.”

        

       “호오.

        

       해가 진 야심한 밤. 아직 겨울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 날씨가 쌀쌀했지만, 우리는 조명조차 켜지 않았다.

        

       밤에는 작은 불빛이라도 멀리 보이는 법이다. 내가 살던 세계의 군용 식량이 불을 쓰지 않도록 만들어지는 것도, 주린 배를 채우려다가 상대방에게 들켜 부대가 전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한겨울이라는 날씨는 지났고, 우리가 와 있는 이 지방도 그럭저럭 남쪽에 있는 지방이라서 정말 얼어 죽을 만큼 춥지는 않았다.

        

       짜증 날 정도는 되었지만.

        

       의심되는 이만 특정하여 추적해 처리하자는 검성의 제안에 휘말린 쪽은 나였다.

        

       클레어와 레오도 우리를 돕고 싶어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은 다른 가문의 아이들이었다.

        

       아예 그레이스 가에서 기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도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직 그 아이들은 여러모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미숙한 아이들.

        

       커다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돕긴 했어도 그건 예외 중의 예외였다.

        

       앨리스는 인수인계받는 것으로 바빴다. 황제가 앨리스를 차기 황제로서 교육을 해준 적이 없었기에, 앨리스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

        

       아카데미를 끝까지 다니기로 한 이상, 아카데미에 있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차기 황제로서 일을 이어받을 준비를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자기 가문의 일을 이어받아야 했고. 심지어 제이크와 로티는 벌써 결혼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본인들이 직접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정황을 보면 그랬다.

        

       그렇다고 전직 성당 기사를 잡는데 똑같이 전직 성당 기사였던 소피아를 데리고 올 수는 없고.

        

       결국 시간은 많지만 확고한 앨리스의 편인 나밖에는 나설 사람이 없었다.

        

       검성은 분명히 이 사실을 인지하고서 그 제안을 했으리라.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적의 캠프를 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이 영지에 갑자기 나타난 산적이라고 한다. ‘산적’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은 비교적 평탄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워낙 평탄한 지형에서 살다 보니 이 지역 사람들은 내 기준으로 ‘조금 높은 언덕’ 정도로 보이는 곳도 산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앉아있는 이 언덕도, 이 지역 사람들 기준으로는 산이겠지.

        

       “이게 부려 먹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제가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스승님 때문입니다만?”

        

       나는 반대쪽 언덕 꼭대기에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 사이로 살짝 비치는 불빛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결국 부탁한 사람은 황태녀가 아니더냐. 솔직히, 너는 내가 제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똥 씹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다. 만약 앨리스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 너는 결국에는 스스로 나섰더라도 최소한 고민 정도는 해봤을 거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세상에는 얼굴만 봐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이 있거든. 게다가 최근에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살아가던 녀석이 내 근처에 한 명 있었으니 지금의 너와 대비되어서 그 감정이 훨씬 추측하기 쉽구나.”

        

       그 표정을 숨기고 살아가던 인간도 당연히 나를 말하는 거다.

        

       여전히 너무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하고는 있다. 그러니까,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한다기보다는 표정을 조금은 정갈하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갈한 표정 안에서도 똥 씹은 표정의 종류는 존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도 조금 전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스스로 나섰을 거라고.”

        

       “스스로 나서는 것과 남이 부탁해서 나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결국 일의 결과가 같더라도 느끼는 감정이 다르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 스스로 방을 청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장은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상태를 생각해 봐라.”

        

       “…….”

        

       “그 상황에서 누군가가 방 청소를 하라고 재촉하는 거지. 너라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느냐?”

        

       “앨리스는 재촉한 적이 없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결국 사람은 급한 일이 생기면 같은 부탁을 두 번, 세 번씩 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듣다 보면 결국 듣는 이도 짜증을 내게 되는 법이고.”

        

       “앨리스도 그럴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결국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 검성을 보았다.

        

       검성은 이미 한참 전부터 내 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멀리 있는 캠프가 바로 자리를 바꾸리라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확신하지 못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일은 가슴 높이에서 떨어진 달걀이 딱딱한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들뿐이지. 사람의 마음속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 지금 네가 앨리스에게 가지고 있는 확신도 ‘확신’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고.”

        

       검성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왠지 그 말을 부정하고 싶어서 열심히 머릿속을 뒤지는데, 내가 어떤 말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검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주기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너희 둘이 마음을 터놓고 지낸 지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알 수는 없다만, 그런 관계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면 서로에게 당연한 일이 되고 말아. 그리고 당연한 일이 된 다음에는 어느 한쪽이 그 일을 거절하는 순간 관계에 균열이 생기겠지.”

        

       검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편 언덕을 바라보았다.

        

       “서로 터놓고 대화할 기회를 자주 만들어라. 아무리 싫은 소리라고 하더라도 한 번에 쌓인 것을 터뜨리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말하는 것이 덜 화나고, 더 쉽게 잊을 수 있을 테니. 만약 조금이라도 싫은 것이 있다면 왜 싫은지, 앞으로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말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너희들의 관계를 이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거다. 단순히 충신과 황제의 입장이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너희는 자매가 아니냐.”

        

       “…….”

        

       나는 그런 검성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것을 아시는 분이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처박으꺅!?”

        

       “조용히 해라. 밤에는 불빛만큼이나 소리도 멀리 퍼지는 법이니까.”

        

       자기 불리할 때면 손이 먼저 움직인다니까.

        

       *

        

       하지만, 검성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산적화 한 전직 성당 기사들을 제압하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 말고도 그때 기차에 탔던 기사들이 함께 갔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일을 방학 내내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솔직히 나도 지친다. 앨리스의 태도나 그런 곳에 지친 것은 아니고, 그냥 사건이 너무 연속적으로 터진 것 때문에 지친 것이다.

        

       게다가 나는 따지고 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으니까.

        

       그게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번아웃 증후군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면 되려나.

        

       추운 곳이나 더운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멀리 가지 않고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전생에 오타쿠였던 나는 집이 제일 좋았다.

        

       앨리스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넘치고, 배우고 외워야 할 것도 많았다. 황제의 역할을 다소 축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기 싫은 것은 하기 싫은 것이다.

        

       “…….”

        

       나의 이야기를 듣고, 앨리스는 찻잔을 든 채 멍하니 굳어있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으응.”

        

       내 말에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일하기 싫다고?”

        

       “예.”

        

       “그런데 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는 당신을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제게 부탁해서 뭔가 들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게 언제나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 어……. 고마워?”

        

       내 말에 앨리스는 얼굴을 조금 빨갛게 붉히면서 대답했다.

        

       “…….”

        

       “…….”

        

       그리고 입을 그대로 꾹 다물어버렸다.

        

       잠깐 침묵이 지속되어 조금 답답해진 나는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입니다.”

        

       “……아, 응.”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 생각에 빠졌던 앨리스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 호칭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호칭 말씀이십니까?”

        

       “응. ‘당신’이나 ‘황녀님’, ‘황태녀님’ 말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우리 자매잖아?”

        

       “…….”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은 게 어디야.

        

       “그리고, 그 존댓말도 그만둬. 거리감 느껴지니까. 너, 그때 반말했었잖아. 멀어서 제대로 안 들렸지만, 입 모양은 봤거든? 나한테 ‘괜찮아’라고 했잖아?”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던 앨리스도, 하나씩 털어놓는 과정에서 서서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는지 조금 말이 빨라졌다.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존댓말 하던 것도 사실 컨셉에서 시작된 거다.

        

       “하지만 바로 반말로 완벽하게 바꾸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호칭이야 그렇다 쳐도, 이건 몇 년이나 그렇게 해온 거니까요. 천천히 바꿔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또 있습니까?”

        

       내 질문에 앨리스는 잠깐 말을 쉬었다가,

        

       “응, 그리고 더 있는데—”

        

       그러고도, 앨리스의 요구사항은 한동안 이어졌다.

        

       ……몇 년을 보아온 사이였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모르던 세월이 훨씬 길었다.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지, 이제야 일 년 하고도 조금 지났을 뿐이니까.

        

       검성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네.

        

       분명 이게 쌓이고 쌓였다면 결국 폭발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전혀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원래 형제나 자매는 서로 싸우며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게 싸우더라도— 적어도, 화해할 수는 있도록. 서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선은 어디까지인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좋으리라.

        

       이것만으로도, 남은 문제들 위에 더 큰 문제를 얹게 되는 일은 없게 될 테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한 화가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녁에 갑자기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다른 한 화를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ㅠㅠ

    내일부터는 다시 두 화씩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