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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6

       지난 한 달 동안, 서부 전역은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요르문간드의 군대는 앞서 나가지도, 후퇴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진을 치고 가만히 눌어붙었을 뿐.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민천이 어떤 성격인데.”

       

       귀경길.

       

       나와 버멜은 골렘을 타고 이동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공적인 업무에 관한 것이었다.

       

       “남은 건 창천 파스모, 그리고…….”

       “…마왕.”

       

       정령왕이 서부 전역에 몰려온 사이, 마왕은 수도 윗부분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왔다.

       

       하루도 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이는 급습이나 다름없다. 카우렐리아 정부는 서부 전선의 군대를 황급히 돌려 재배치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버멜도 그 군대의 일부였다. 우리는 지금 수도 메르헤름이 위치한 북동부로 향하고 있었다.

       

       “에테르.”

       “왜.”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 거다.”

       “알고 있어.”

       

       버멜의 눈빛이 결연하게 변했다. 나 또한 거울을 직접 마주 보진 않았지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때는 10월 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대통령이 기거하는 백령관으로 향했다.

       

       “작전을 점검하겠습니다.”

       

       나는 마도부장관 명의로 정부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했다. 파이처럼 생긴 원형 테이블에 각처 장관이 모여 얼굴을 굳혔다.

       

       경호실장인 카리나 씨가 칠판에 작전지도를 붙이며 이번 회의의 얼개를 짰다.

       

       “현재 마왕군의 주력은 이곳 10km 앞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우리 군은 클라메프 강을 끼고 전선을 방어하는 중입니다.”

       

       탁.

       

       “이곳을 빼앗기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전황은 파국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제국에 이어 카우렐리아까지 망할 위기였다.

       

       “전세를 역전할 방법이 있나?”

       

       대통령이 물었다.

       

       카리나 씨는 심호흡한 다음 발표를 이어갔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대로 전력을 보강하여 전선을 밀어붙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마왕을 직접 제거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정공법. 후자는 편법이다.

       

       “피해 규모를 고려하자면 후자가 낫겠군.”

       “하지만 마왕을 직접 제거할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습니다.”

       “왜 없습니까?”

       

       행정부장관이 나를 흘깃거리며 말했다.

       

       “흑주인가 뭔가 하는 마법이 완성되었으면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서야지요.”

       

       나는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는 마주 노려봐주었다.

       

       어쭈, 저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가당한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마지막 전투에는 제가 직접 참전해야겠죠. 안 그래도 허가만 떨어진다면 유격대를 조직해서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흑주의 경우, 마력 공급도 안정적이고, 한 달 사이에 개량도 거쳤습니다. 마법이라면 어느 곳에든 쏴드릴 수 있습니다.”

       

       도리어 행정부장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마왕이 사라지면 다음으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나니까.

       

       이번 전쟁으로 동시에 제거할 계획이었겠지. 내가 서부 전역으로 나가 있던 사이에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몸은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질 운명이다. 이젠 지팡이 없으면 걷는 것도 힘들어.

       

       전쟁 다 끝나고 허무하게 제거될 바에야 영웅으로 추대받는 편이 낫다. 그래야 금안과 수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 명분이 생긴다.

       

       “서부 전선에서 마수의 사체를 다량 노획해 왔습니다. 이미 골렘으로 개조도 해 놓은 상태지요. 당국에서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그들을 이끌고 마왕을 유인하겠습니다.”

       

       내 말에 카우렐리아 인사들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하거나 걱정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오히려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이들은 전부 제국인이었다.

       

       “괜찮겠는가?”

       

       구제국 측 대표인 레너윌 하스펠트 공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자네 요새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무리는 말게. 국방부가 아닌 마도부 소속이라 직접 전투에 참여할 필요도 없다네.”

       “괜찮습니다. 다들 저를 받아주신 몸인데 밥만 축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밥만 축내다니! 내 말은… 자넨 칼보단 펜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네.”

       

       나는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제겐 펜이 곧 칼이죠.”

       “…….”

       “제가 써내린 방정식 하나가 호천을 골로 보내버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은을 갚기엔 부족하지 않을까요?”

       “자네, 정말이지…….”

       

       레너윌은 못내 아쉬워했다.

       

       단순히 나를 걱정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혹여나 내가 잘못되면, 자신들의 입지도 불리해질 테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구체적인 지시가 나오면 말씀해 주십시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처신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아직 본격적인 주제도 말씀 안 드렸단 말이에요!”

       “들어봤자 시간 낭비일 겁니다.”

       

       뒤통수에서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실 밖으로 빠르게 나왔다.

       

       “읍.”

       

       바로 휴지를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뒤지겠군.”

       

       핏물이 휴지를 한 움큼 적신다.

       

       이제 검은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피는 다른 사람과 같은 선홍빛이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색이었다.

       

       “……동생.”

       

       전계마도의 정령, 앨리스가 눈을 적시며 내려왔다.

       

       “동생, 저. 아무리 그래도 30년을 함께 했는데, 이렇게 가는 건…….”

       

       언니는 눈물을 훔치지 못했다. 그녀의 소맷자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나와 앨리스는 지구에서 30년을 함께했다. 텁텁한 사회 속에서, 나와 언니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버팀목이었다. 비록 그 실체가 여신의 명령에 따라 시작된 거짓된 관계라 할지라도, 그동안 쌓아 올린 유대와 가족의 정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언니는 내게 이리 말하는 것이다.

       

       “저… 아니, 나 있지……. 너 이렇게 못 보내.”

       

       목소리가 거문고 현처럼 파들거린다. 짝을 잃어버린 참새처럼 구슬픈 음색이었다.

       

       “그냥 마법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돼? 적어도 올해가 끝날 때까지는 같이….”

       “언니, 알잖아.”

       

       여신이 내린 규율은 대정령이라도 못 바꾼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이 정한 명령 외에는 수행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으면 죽는 거야. 남자로 죽든, 여자로 죽든…. 인간으로 죽든, 이런 철덩어리 마수로 죽든.”

       “동, 생.”

       “이태연으로 죽든, 에테르로 죽든. 나는 나니까.”

       

       여정의 끝에 와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세상에 들렀다 왔다는 거, 그거 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족해.”

       

       정말로 죽는 것도 아니다.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뿐이지.

       

       다리를 후들거리며 별관 휴게실로 향했다. 의자에 몸을 걸터앉자 토막 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방금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지 않았나?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하도 몸이 안 좋다 보니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이런 나를 매일같이 보는 앨리스도 힘들겠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동생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정말, 그 아이를 살렸어야 했어?”

       “……로테는 소중한 친구야. 함부로 말하지 마.”

       

       낮게 깔린 목소리. 앨리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하, 하지만 생각해 봐. 네가 네 수명을 대가로 바쳤다는 걸 그 아이가 알기라도 한다면…….”

       “알아. 죽을 때까지 날 때리겠지.”

       

       룸메이트 시절, 로테는 내가 말을 안 듣거나 약속 시간을 어길 때마다 핀잔을 주고는 했다.

       

       그 핀잔이 전례 없을 정도로 강하게 돌아온다고 생각해 보라. 답 나온다. 로테는 울고불고 날뛸 테고, 정령의 샘으로 달려갈 것이다. 가서 날 죽이고 에테르의 수명을 다시 돌려달라고 난리를 피우겠지.

       

       그러니까 들켜선 안 된다.

       

       툭.

       

       “……?”

       

       방금 또 무슨 소리 난 것 같은데.

       

       “됐어, 언니.”

       

       이런 이야기, 계속해봤자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 진행도]

       

       [화계마도 : 1049/1049]

       [수계마도 : 992/992]

       [지계마도 : 1007/1007]

       [공계마도 : 824/824]

       [미분류 : 149/149]

       

       [모든 마법의 습득에 성공한 상태입니다.]

       

       양장본에 적힌 숫자가 하나같이 만족스럽다. 흑주를 만든 이후로도 몸을 혹사한 보람이 있었다.

       

       지금 와서 모든 마법을 연구한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냥, 여신과 계약한 상태에서 마법을 다 습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아렌스 대륙에서의 데이터를 삭제하고 현세로 귀환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그 결과가 이 창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당장이라도 ‘예’를 눌렀겠지. 이런 좆같은 세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서 현세로 귀환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나는 이곳에 남아 있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

       

       

       서부 전선에서 에테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로테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듣자하니 민천의 군대가 더는 진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비록 대정령 시큐엘이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손실보단 성과가 더 크다는 말이 오갔다.

       

       “이제, 전쟁이 끝나는 거야.”

       

       로테는 기쁜 마음으로 번화가를 쏘다녔다.

       

       에테르가 좋아하는 티케이크.

       

       에테르가 좋아하는 카페모카 버블티.

       

       에테르가 좋아할 겨울철 옷과, 짝을 맞춘 머리 장식까지.

       

       “돌아오면 선물해줘야지.”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도 용돈을 털어 베스트 프렌드에게 줄 귀환 선물을 한 아름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로테는 잠시 침울해졌다.

       

       이번 전쟁은 로테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다. 자신은 아직 배우는 입장이다. 전선에 나가 마왕군과 제대로 싸우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에테르를 곁에서 보조하고 도와주는 것. 그녀가 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꼭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 이런 선물을 사서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 그녀의 처음이자 최고의 친구인 로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빠, 에테… 마도부장관 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듣기로는 돌아오자마자 정부 회의에 소집됐다고 하더구나. 아마 지금쯤 대통령 집무실에 있을 거다.”

       

       “아빠 명의로 같이 들어가도 돼요?”

       

       로테의 아버지인 크롬웰 살리에르도 망명정부의 인사. 본관에 직접 들어가는 건 무리더라도, 빈객으로서 별관에 입장할 수는 있었다.

       

       “물론. 그러렴.”

       “정말이요? 고마워요, 아빠!”

       

       로테는 생글생글 웃으며 코트를 껴입었다.

       

       “이쪽입니다.”

       

       백령관에 도착한 직후,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별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빠는 잠깐 담배 좀 태우마. 먼저 들어가 있거라.”

       “알겠어요.”

       

       케이크와 커피, 옷 따위를 가득 들어있는 쇼핑백을 양손에 끼고 천천히 발을 내딛는 로테.

       

       “정말, 그 아이를 살렸어야 했어?”

       

       휴게실로 가려고 모퉁이를 돌았는데, 웬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로테는 소중한 친구야. 함부로 말하지 마.”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친한 친구의 목소리였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동안 로테는 모퉁이에 기댄 채로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하, 하지만 생각해 봐. 네가 네 수명을 대가로 바쳤다는 걸 그 아이가 알기라도 한다면…….”

       “알아. 죽을 때까지 날 때리겠지.”

       

       툭.

       

       쇼핑백이 힘없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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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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