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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비록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가로수로 벚나무가 심어진 길을 지나가면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한옥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그냥 낡은 채로 방치한 집은 거의 없었다. 내부를 나름대로 현대풍으로 개조해 먹거리 가게나 카페로 활용하고 있었다. 현대의 세련됨과 나무와 기와로 이루어진 옛집의 구조가 어우러져 신선한 분위기였다.

        

       유하늘은 그 가게 중 한 곳에서 호두과자를 한 봉지 샀다. 솔직히, 호두과자치고는 조금 비싼 가격이었다. 한 봉지의 가격 자체는 일반적인 호두과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내용물이 확연히 적었다. “너무 많이 먹어봐야 점심때 불편하기만 하니까 괜찮아.”라는 것이 유하늘의 주장이었다.

        

       “자.”

        

       유하늘이 호두과자 하나를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받아먹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어허.”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유하늘은 내 손을 살짝 피했다. 내 손이 민망하게 허공을 쥐었다.

        

       내 손을 피한 유하늘의 손은, 다시 내려와 내 얼굴 가까이 왔다. 명백하게 나에게 먹여주겠다는 몸짓이었다.

        

       “아니, 내 손으로 먹어도 되는데…….”

        

       하지만 유하늘의 표정은 굳건했다. 뭐랄까, 반드시 이렇게 먹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좁은 거리를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고, 우리도 걷고 있었다. 특별히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이게 보통인가?

        

       여자애들끼리는 이렇게 손으로 먹여주기도 하고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어도, 결국 나는 유하늘의 행동에 그저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상담할 다른 여자애도 없고, 무엇보다 이미 학교에서도 열심히 받아먹었으니까. 물론 학교에서는 아예 우리 쪽으로 관심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딱히 부끄러운 것도 없었다. 누가 본다고 뭐 어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학교는 그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폐쇄된 공간이 아닌가.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어있는 이상 ‘내부’에서 조금 쪽팔린 짓을 해도 훨씬 덜 부끄럽다.

        

       그런데 여기는 길 한복판이다. 완전히 열린 장소에, 주변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한가득하다는 소리다. 물론 이 사람들도 우리 얼굴을 굳이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유하늘의 행동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실 이런 미소녀가 나한테 뭘 먹여주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을 뿐.

        

       “자, 아~”

        

       유하늘은 한술 더 떠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

        

       결국, 나는 유하늘의 손에 있던 호두과자를 받아먹었다.

        

       왠지 길들여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냥 기분 탓이겠지?

        

       *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너는 운동하려고 나온 모습 그대로네.”

        

       “아.”

        

       내 지적에, 유하늘은 새삼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관없지 않아? 나는 그렇게 땀을 흘리진 않았으니까. 마침 날씨도 그렇게 춥지는 않고.”

        

       아니, 그것 때문에 한 말은 아닌데. 그냥 뭐랄까…… 이런 곳을 걷는데 대놓고 운동하러 나온 것 같은 모습은 조금 안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본인한테 직접 그런 말을 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 저기 좀 봐.”

        

       아무래도 내가 신경 쓰였다. 진짜 데이트는 아니더라도, 친구 둘이 만났는데 한쪽이 대놓고 운동복 차림이면 너무 언밸런스하잖아.

        

       그래서, 나는 눈앞에 보이는 가게를 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옷 가게 있네. 하나 사러 가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하늘은 깜짝 놀란 듯 말한다.

        

       “뭐? 아, 하지만 오늘 옷 살 정도로 돈을 들고나오지는 않았는데…….”

        

       사실 내 주머니 안에 오만원권이 두툼하게 들어있는 지갑이 있으므로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정의감 넘치는 여주인공인 유하늘은 나한테 손을 벌린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신세 진 것 갚는 김에 하나 사줄게.”

        

       난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유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하지만, 너는 나한테 신세 진 게…….”

        

       “없긴 왜 없겠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신세 지고 있는 셈인데.”

        

       뭐, 언젠가 나갈 생각이긴 했지만, 오늘 이렇게 나와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유하늘이 나에게 와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오늘도 저택 안에서 침대 위에 늘어져 있기나 했겠지.

        

       내 말에, 유하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감사히 받을게.”

        

       그렇게까지 비장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다니니, 솔직히 다리가 아팠다.

        

       사실 한참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 시간으로 치면 한 시간 정도였을 것이다. 내 체력 문제도 있었지만, 이미 아침에 나름대로 열심히 달렸던 것 때문에 이미 조금 지쳐있었던 것도 있다.

        

       그 한 시간 동안, 그래도 꽤 즐겁게 지냈다고 생각한다.

        

       걸으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이 세계, 이 나라는 내가 살고 있던 곳과 똑같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내가 살고 있던 대한민국과는 다른 장소였다. 물론 대략적으로는 같다. 서울 곳곳의 지명은 대부분 같았고, 이름만 들어보면 알만한 체인점이나 랜드마크도 거의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알던 곳과 완전히 같은 곳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이렇게 보여도 서울 토박이다. 서울 곳곳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까지는 못해도, 웬만큼 유명한 곳은 많이 가보았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데이트 코스’라고 부를만한 곳 깊숙한 곳까지 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주변의 유명한 곳은 가봤다는 말이다. 지하에 있는 대형 서점이라던가, 거리 입구에 커다란 붓 동상이 서 있는 곳이라던가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를 가도 내 기억과 완벽히 일치하는 곳은 없었다. 건물 모양이 다소 다르거나,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곳은 내부 구조가 내 기억과 다른 경우도 많았다.

        

       하긴, ‘유진 전자’ 같은 곳도 내가 살던 세상에선 없던 회사다. 그런 회사가 무려 시총 3,600조라는,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에선 세계 1위 기업 수준의 시총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세상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대부분은 유진 전자의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이미 내가 살던 세상과 완벽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당연히 건물이나 몇몇 랜드마크 정도야 내 기억과 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에 길을 잃을 만도 했다.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비슷하니 헷갈리는 것도 당연하겠지.

        

       유하늘은 내 시선이 닿는 곳을 바로 알아차리고 내 팔에 자기 팔을 건 채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아마 내가 신기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신기하기도 신기했다. 내가 알던 도시와 다른 도시를 걷고 있으니, 조금은 해외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신기함을 덮어버릴 정도로 신경 쓰이는 존재가 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 조금 힘들어?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서 조금 쉬다 갈까?”

        

       조금 걸음이 느려진 나를 보고, 유하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하려다가,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말했다.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거 같다…….”

        

       확실히 지치기는 했다.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아까 유하늘을 데리고 들어간 옷 가게에서, 유하늘이 고른 옷 때문이다.

        

       “그걸로 괜찮겠어?”라는 나의 질문에, 유하늘은 “위아래 하나로 되어있으니까, 이것만 사도 되잖아!”라는 말로 응수했었다. 위아래를 따로 살 필요가 없으니, 선물하는 내 처지에서 경제적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렇다. 유하늘은 지금,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 특별히 치마가 짧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살짝 주름진 치마는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가슴이 파여있는 것도 아니다. 카라가 달린 상반신 부분은 모두 말끔하게 단추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옆에 붙어있던 여자애가 완전 운동계에 체육복을 입고 있는 모습과 슬슬 다가오는 봄기운에 맞춰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은 기분이 다르다.

        

       어…… 그러니까,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유하늘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좀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유하늘은 아까부터 쭉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의식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저 앞에 있는 카페로 가자. 조금 쉬고 나면 기분도 괜찮아질 거야.”

        

       나는 말없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카페에 들어와서, 유하늘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왔다.

        

       작은 카페라 그런지, 다행히 화장실은 남자 칸과 여자 칸 모두 한 명씩 들어가는 구조였다. 나는 아직도 공중화장실에서 옆 칸에 여자가 앉아있는 것이 굉장히 불편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 딱히 볼일을 보러 온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우고,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손으로 몇 번 정도 얼굴을 헹구었다. 차가운 물에 맞은 덕분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래, 냉정하게 생각하자.

        

       아무리 유하늘이 양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만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친구에게 대놓고 연애 감정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뭐, 하루아침에 반한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쟤는 주인공이잖아. 단순히 얼굴만 보고 사귀지는 않을 거라고.

        

       뭔가 그런 거 있잖아. 주인공은 외모 말고 마음도 본다……같은 말을 하기에는 윤다호도 루트가 있는 게 걸렸다. 솔직히, 그 미친 싸가지 수준을 보고 들이댄다는 선택지가 있는 것을 보면, 일단 게임 설정상으로는 얼굴만 보고 들이댄다는 경우의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사실 윤다호 루트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윤다호는 ‘나에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처음이야’마인드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되지만.

        

       “후우…….”

        

       좋아, 그러면 달리 생각해보자. 내 주변에 있었던 여성에 대한 기억을 끌어올리는 거다. 게네들은 대체 어쩌다가 남자친구가 생기게 되었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주변의 여자’가 친족밖에 없었으므로, 검색 범위를 넓혀서 ‘별로 친하지는 않은 대학 동기’로 범위를 확장했다.

        

       “OT 다음날에도 커플이 하나 생겼었지…….”

        

       가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잘생기고 예쁜 애들은 이미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서로 인연을 만들고, 입학 첫 달이 다 지나기도 전부터 연애를 시작하는 애들도 있었다.

        

       “…….”

        

       아, 됐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다시 생각해보면, 이거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이다. 유하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먼저 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벌써 걱정하고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손가락 끝만 닿았는데 손자 이름까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그렇게 쪽팔린 짓을 할 수는 없지.

        

       “후우.”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조금은 진정되었다.

        

       나는 조금 흔들렸던 정신을 다잡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이쪽을 등지고 앉아있는 유하늘이 보였다. 아직 음료는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하늘은 내가 근처까지 갈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카페 내에 사람들이 꽤 있었고, 음악 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 자리로 가려고 유하늘의 옆을 지나려다가, 정말로, 정말로 본의 아니게 유하늘이 보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보게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검색창에는—

        

       [서울 데이트 명소]

        

       라고 나와 있었다.

        

       “엥?”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으앗!”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유하늘이, 몹시 만화적으로 허둥지둥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엄청나게 뻣뻣하게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하늘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사이로도 당혹스러운 시선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봤어?”

        

       “……응.”

        

       유하늘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진짜로. 자꾸 그런 오해할만한 거 보여주지 말라니까.

        

       모태솔로한테는 자극이 너무 강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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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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