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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저는 클리온 황자께서 조교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뭐?”

         

       내 말에 클리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스펠트 교수 또한 마찬가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타쌍피였다. 그러나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저는 입학시험 때 실기에서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수님의 조교가 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죠.”

       “아니에요. 에테르 양은 이론이 뛰어나니까 충분히 잘…….”

       “기초마도에선 스크롤을 주로 다루니 조교를 할 때 마도적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건 이해했어요. 하지만 전 그런 스크롤을 다루는 것도 미숙합니다. 당장 입학시험 때만 하더라도 스크롤 부문에서 반타작도 못 했습니다.”

         

       [그게 자랑이에요?]

         

       자랑은 아니다. 말하면서도 개 쪽팔려.

         

       “그야 입학시험에선 마력초를 사용하지 못하니까….”

       “그걸 감안하더라도 회로를 잘 그리지 못했습니다.”

         

       하스펠트 교수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에게는 완벽한 외통수였다.

         

       실기에서 내가 작성했던 스크롤을 두고 심사관들이 매긴 점수는 12점 정도였다. 25점 만점에 12점. 반타작도 못 한 점수였다. 이 반 평균은 그보다 훨씬 높을 테지.

         

       시험에서 작성한 스크롤을 다시 찾아보려고 해도 못한다. 그걸 열람할 권리는 입학처에만 있으니까.

         

       ─ 많이 부족하네요. 더 열심히 해올 수는 없나요?

         

       하스펠트는 내가 만든 스크롤에 조그마한 결함이라도 있었을 때 그런 소릴 하곤 했다. 이건 그 말을 복사해서 있는 그대로 써먹은 것에 불과하다.

         

       곁에 앉아있던 로테만이 지금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짓고는 입을 완전히 다물었다.

         

       “네년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그따위로 하는구나. 그 버르장머리 없는 화법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냐?”

         

       [이야, 제대로 화난 모양인데요. 그렇게 조교가 하기 싫은가?]

         

       매일같이 군림만 하며 살아오던 황족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누구 발 아래에 있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 망나니 황자의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더 그렇고.

         

       “황자께서는 하스펠트 교수님의 조수가 되는 걸 꺼려하시는 모양이군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그런 귀찮은 일을 맡아서 뭘 하겠는가?”

       “그럼 누가 해야 하죠? 교수님께서는 조수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그 말과 함께 클리온에게 향했던 고개를 하스펠트 교수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하스펠트의 낯빛은 당혹감으로 점철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나는 일부러 황자를 도발했다.

         

       “황자님, 다시 생각해보세요. 다른 선생님도 아니고, 황실을 떠받치는 기둥인 사대공작가의 전속 조교가 되는 거예요.”

       “그게 싫단 소리다!”

       “하지만 조교 일을 승낙했을 때 받는 보수는 금화 스무 장 남짓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같은 평민에게는 주제넘은 액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귀족가 자제들도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하스펠트 교수가 왜 나를 이렇게까지 자기 조교로 두고 싶어하는지도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 저 금안족에게 뭔가 있나?

         

       마치 그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꼴이었다.

         

       오늘 이 교실에서의 일이 입소문을 타고 교정을 한 바퀴 돌아버린다면 하스펠트 입장에서는 뒷목 잡고 쓰러질 노릇이겠지. 뜬소문을 듣고 온 다른 교수들이 날 노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그리고 있던 그림이 한순간에 찢어질 테니까.

         

       혹시 몰라. 헤를라인 선생님의 ‘네 조수 쩔더라’에 이어서 다른 교수가 ‘네 조교 쩔더라’를 시전할 수도 있을지.

         

       만약 그게 현실로 된다면 황자에게도 엿을 선물하는 꼴이 된다. 황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날 아카데미에서 제적시키는 것이라서, 내가 어느 교수 밑에 들어가더라도 그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안 끝난다. 내가 하스펠트에게 선물할 엿은 로켓마냥 3단분리가 되는 빅엿이었다.

         

       [대체 뭔 짓을 하시려고…….]

         

       한 남학생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수석 입학생 버멜이었다.

         

       “하스펠트 선생님, 기초마도 조교는 굳이 필기시험을 만점 받지 않아도 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 그렇죠.”

       “그러면 굳이 에테르에게만 제안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 점이 의문이었어요.”

       “클리온 황자님까지 반대하신다면 다른 지원자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의도치 않은 조력자가 나타났다. 버멜의 발언을 시작으로 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내기 시작하자, 결국 하스펠트 교수는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황자와 에테르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 중에 선출하도록 하죠. 누구 지원할 사람 없나요?”

         

       가장 먼저 손을 든 건 로테였다. 얘는 진짜 왜 이래.

         

       “살리에르 양, 조교와 반장을 동시에 맡는 건 어려워요. 저는 살리에르 양이 한 가지만 맡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럼 제가 조교를 할게요. 옛날부터 하스펠트 선생님 밑에서 꼭 한 번 배워보고 싶었어요!”

         

       하스펠트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로테는 임시반장이라는 자리만 유지하고, 추후 정식 반장은 다른 학생 중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이후 1교시를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실 문을 나갈 때쯤 버멜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몸을 움찔 떨며 시선을 회피했다.

         

       저거 세 번째인가. 양장본이 얘기한 대로 버멜이 ‘빙의자’라면 저런 반응도 납득할 만하다.

         

       이 건에 대해선 아직 탐색 단계에서 머물러야 한다. 일단 당분간은 저 엘프를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나는 교실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디 가게?”

       “잠깐 필요한 게 생겨서, 그것 좀 하고 오려고. 오늘은 너 먼저 밥 먹고 있어.”

         

       로테에게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말하면서까지 간 곳은 다른 데가 아니었다.

         

       [지계마도-마도골렘 연구실]

         

       똑똑똑.

         

       “어머, 무슨 일이니?”

       “헤를라인 선생님,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스크롤을 작성하고 계시던 헤를라인 선생님이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든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저 선생님 연구실에서 인턴 하고 싶어요.”

         

       **

         

       종소리와 함께 버멜은 상념에 들어갔다. 그가 회상하는 건 조례가 시작되기 조금 전의 일이었다.

         

       클리온 황자가 돌발행동을 했다. 5천 장에 달하는 금화를 대뜸 에테르의 책상 앞에 내려놓으며 자퇴를 권고한 것이다.

         

       ‘여기까진 분기에 있던 일이다.’

         

       더불어 에테르가 황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던 것도 루트에서 명시되어 있었던 일이다. 전개상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 SYSTEM : 개체명 ‘흑주(黑晝) 에테르’가 ‘클리온 필리우트’에게 살인 의사를 보입니다.

         

       ‘뭐지?’

         

       여기까지 일이 번지지는 않았다. 에테르가 클리온을 죽일 생각까지 품다니.

         

       ‘설마 벌써 타락이 시작되려는 건가?’

         

       아니, 말도 안 된다. 타락이 시작되는 시점은 못해도 1년 후다.

         

       당장은 겁먹을 필욘 없지만, 버멜은 그 점 때문에 여태까지 에테르와 시선을 직접 마주치길 꺼렸다.

         

       단순히 게임 속 캐릭터라는 건 알지만 그 루트로 진입했을 때 엔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에. 오죽하면 그 엔딩을 보고 나서 잠시간은 넋을 잃고 침대에만 종일 누워있을 정도였다.

         

       ─ SYSTEM : 개체명 ‘흑주(黑晝) 에테르’의 상태가 ‘차분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살인 욕구, 그 감정은 찰나의 순간에만 있다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에테르가 예상보다 빨리 제국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선다면, 그날로 틸레트 아카데미는 재앙을 맞이한다. 현재로선 다른 구천지대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녀 말고는 없었다.

         

       버멜은 전후 사정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금방 이해했다.

         

       ‘프롤로그 스토리 이전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게 분명해. 그래서 저런 대사를 한 거야.’

         

       물론 이곳은 게임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세계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자신이 즐겨 했던 게임과 비슷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여태까지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스토리 흐름에 큰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에테르가 살인의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리온 황자는 계속해서 그녀의 퇴학을 종용했다. 이 이상 갔다간 에테르의 스트레스 수치가 75를 넘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당장 클리온을 제거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배후를 끄집어내려면 그를 어느 시점까지는 살려두어야 했다.

         

       ‘정신 바싹 차려야 해. 무얼 위해 일리야드에 입학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데.’

         

       세상의 절멸을 막기 위해서였다. 버멜은 자리에서 일어나 클리온이 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턱, 하고 그의 어깨에 버멜의 손이 얹어졌다. 버멜은 에테르에게 쏠려있던 클리온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아슬아슬하게 대사를 선택하며 조례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종소리와 함께 하스펠트 교수가 들어왔다. 일단 어떻게든 이벤트를 넘기기는 했다.

         

       ‘곧바로 다음 이벤트인가.’

         

       산 넘어 산이었다. 이번 조례에서 하스펠트는 에테르에게 자신의 조교가 되어달라고 제안할 것이고, 곧이어 클리온이 이를 반대하며 교실이 난장판이 될 것이다.

         

       원작에서 에테르는 높은 확률로 하스펠트 교수의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한다. 대부분의 루트에선 타락 전까지 천성이 여리고 소극적인 아이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새에 에테르가 보여준 모습은, 버멜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 싫습니다.

         

       소녀는 당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화법.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하스펠트 교수에게 전했다.

         

       뭐지? 버멜은 혼란에 빠졌다.

         

       안 그래도 3년간 노예생활을 경험했던 에테르가 다시 교수 밑에 들어간다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자신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소녀의 의사 표현이 너무 명백했는지라 준비할 틈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에테르는 일부러 대화의 주도권을 황자와 교수에게로 떠넘긴 뒤 자신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수준 높은 처세술을 보여주었다.

         

       ‘원작에선 이런 케이스가 없었는데…. 입학식 때 꼬인 전개가 여기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건가?’

         

       따지고 보면 이상했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에테르가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

         

       1교시가 끝난 뒤 에테르는 어디로 나가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을 쳐다보았다.

         

       ─ SYSTEM : 개체명 ‘흑주(黑晝) 에테르’가 당신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합니다.

         

       ─ SYSTEM :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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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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