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2

       나는 지금 레아로의 안에 탑승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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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어째서 NPC에게 탑승했냐고 하면, 경위는 이렇다. 마탑주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기⋯⋯ 있잖아, 우리 같이 들어가 보지 않을래?”

       

       이 시점부터 나는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어디로요?”

       

       제발 시뮬레이션 속. 

       제발 TRPG. 

       제발 세션.

       

       “으응⋯⋯ 저번, 2황자님 때에도, 클라이맥스 때에는 직접 조종했잖아? 나도 해 보고 싶기도 했고⋯⋯ 안 될까?”

       

       뉴비다──!!!

       

       나는, 살면서 이토록 로맨틱하고 야한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내가 아는 모든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부르짖으며,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때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모든 걸 망친다. 통계적으로, 온갖 호들갑을 떨면 떨수록 영업의 확률은 수직하강하게 된다.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진정하자. 덤덤하게 그러자고 해야 한다.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코가 간지러운 정도의 일인 것처럼⋯⋯!

       

       “그, 그러든지 말든지요. 흥.”

       

       “⋯⋯무슨 반응이야 그건.”

       

       “야호──!!!”

       

       아, 아뇨. 정말 좋다는 이야기였어요.

       

       “혹시, 생각이랑 말이 바뀌었니⋯⋯?”

       

       약간의 감정 컨트롤 미스가 있었지만 뭐가 문제랴. 중요한 건 마탑주와 내가 함께 세션을 한다는 거다. 이세계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마탑주 아니겠는가.

       

       마탑주가 TRPG에 관심을 가져준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뉴비를 부드럽게 안내해 줄 생각에 침이 질질 흘렀다. 만약, 여기서 좋은 경험을 하면⋯⋯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저녁 노을 어스름도 좋고⋯⋯ 피아스코도 나쁘지 않지⋯⋯.

       

       이러한 이유로, 나와 마탑주는 황녀님 접대 세션에 뛰어들게 되었다.

       

       온전히 이입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를 짜서 등장시키는 것이 경험적으로는 보다 좋겠지만, 천리도피행은 클라이맥스에 다가서고 있었다. 뉴페이스를 이제 와서 추가시키는 건 이야기를 난잡하게 할 거다.

       

       또, 뉴페이스가 먹힐지도 미지수였다. 1황녀는 내 영혼까지 끌어올려 피워낸 오네쇼타에 직격당하고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유도하기 쉽지 않은 만만찮은 캐릭터다. 

       

       환상 마법으로 구현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감이다. 최면과 세뇌로 풀어나가는 건 TRPG가 아니니까. 그러니 플레이어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해내야 한다.

       

       그러니까 이미 있는 캐릭터에게 탑승한다.

       

       나는 레아로에게.

       그리고 마탑주는 페로에게.

       

       내 경우는, 등장하는 모든 NPC가 과장 조금 보태서 곧 나이니까 문제가 없고. 마탑주는 페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으니까 괜찮아 보였다. 둘 다 귀엽고, 조금 찐따 같은 구석이 있지 않던가.

       

       소소한 실수는 내가 커버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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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는 역할론을 꺼내 들도록 하자.

       

       모든 캐릭터에게는 역할이 부여된다. 큰 틀에서도 그렇고, 소소한 작은 틀에서도 그렇다.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서 자기 포지션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 이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현재 상황은?

       

       오네쇼타 순애를 즐기던 주인공(1황녀)과 히로인(페로)사이에 백발실눈양아치가 난입했다. 주인공은 실눈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고 싶어 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 <= 정보를 캐낸다 / 피폐 무빙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정보를 주고’, ‘피폐각을 살려줘야’ 한다. 이것이 이 장면에서 내게 부여된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씬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거다.

       

       반면 페로는 어떠한가?

       

       페로는 무언가를 숨기는 캐릭터다. 일레인에게 호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망설임 때문에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레아로가 비밀을 밝히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일레인에게 긍정 받고 싶을 것’이다.

       

       페로에게는 선택지가 많았다. 레아로의 입을 막으려고 드는 식으로 비밀에 대한 호기심을 돋우거나, 먼저 1황녀에게 고백을 박아버려서 판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나라면⋯⋯, 내가 페로였다면, 전전긍긍하면서도, 결국 레아로의 입을 막지 못해서. 비밀을 들은 일레인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RP(롤 플레잉, 연기)를 했을 거다.

       

       마탑주는 어떨까. 페로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하려고 할까.

       마탑주의 느낌을 확인할 수 있는 찬스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글지글.

       

       적당히 익어가는 육포를 바라보며 세 명의 여행자가 침묵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레인은 덤덤한 듯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게는 보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번잡하게 가득 차 있다. 시선이 모닥불에 향하고 있다는 점이 포인트다.

       

       그녀는 에스페로를 바라보지도, 레아로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지금도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희망’과 ‘현실’, 그 어느 쪽도 직시하지 못하는 의미를 담은 멋진 시선 처리였다.

       

       페로(마탑주)는 어떤가 살피니, 작은 소년은 일레인과 레아로를 번갈아 가며 곁눈질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초조함과 혼란, 멋진 표정 연기였다. 시선 처리 센스도 좋았다.

       

       나는── 레아로는 일레인을 바라보고 있다. 약간 호색한이라는 캐릭터 설정을 살리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은유이기도 하다. 모닥불로 도망친다고 해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겠는가?

       

       침묵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뜸을 참 맛있게 들였다.

       

       나(레아로)는 입술을 핥았다. 우선은 가볍게.

       

       “혹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침묵에 잠겨있는 것도 운치가 있어서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에스페로와 어떤 모험을 겪으셨는지, 호기심이 생겼거든요.”

       

       “⋯⋯⋯⋯.”

       

       1황녀는 침묵했다. 대답을 해줘도,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 질문은, 그동안의 여정을 머릿속으로 되새기게 하는 텍스트다. 

       

       맛있는 독백을 뽑아낼 수 있으니 침묵이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건 싫은데. 페로(마탑주)가 받아주나?

       

       페로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 그 반응이면 훌륭한 대답이었다! 작은 소년이 그동안의 여정에서 겪은 수많은 럭키스케베를 떠올렸다는 거다. 레아로가 그 비언어적 표현을 모를 리가 없을 테고──.

       

       나(레아로)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묘한 톤으로 말했다.

       

       “⋯⋯음, 제 예상과는 꽤 다른, 모험을 겪으셨나 보군요. 하하⋯⋯.”

       

       너어는 여행이랍시고 이 쪼그마한 쇼타랑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낸 거구나, 라는 음해가 전해질 수 있도록 공들여서 눈빛을 쏘았다. 찌르니까 반응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시선을 조심하는 편이 좋겠군요. 레아로.”

       

       “제가 무슨 시선으로 봤다고 생각하시길래⋯⋯ 아닙니다, 주먹은 내려놓으시죠.”

       

       깔끔하게 한 단락이 끝났다. 환기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어 볼 차례다.

       

       

       “저는⋯⋯ 침묵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무너진 마을에서, 친구와 이웃들의 이름을 불러도 그 누구의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일을 겪은 이후로는. 조용하면 어쩐지 몸이 간질거리더군요.”

       

       페로가 그랬어요! 라는 밑밥이다.

       

       “⋯⋯⋯⋯.”

       

       “그러니 제가 이야기꾼이 되겠습니다. 마침, 육포가 잘 익은 것 같네요. 편하게 드시면서 들어주시죠.”

       

       페로가 고향 박살 낸 썰 풀 테니까 불편하게 들어달라는 뜻이다.

       

       나는 페로(마탑주)를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마을의 원수를 바라보는 셈이니까 서늘하게 바라봤지만, 한편으로는 마탑주에게 ‘님은 이제 뭐 할 거임?’이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페로는 혼란에 물든 얼굴로, 저도 모르게 1황녀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일레인, 저는!”

       

       “⋯⋯⋯⋯.”

       

       소년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끝끝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그게,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요. 평원은 안전하다고 말했잖아요, 페로.”

       

       “⋯⋯혹시 모르니까요. 거대 변이체도, 마주쳤으니까⋯⋯.”

       

       페로는, 일레인이 평원을 핑계로 한 번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변명을 주워섬기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쳤다. 어떻게 처음 해 보는 TRPG를,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행동만 골라서 할 수 있지?

       

       마탑주 너는 마법에도, 유혹에도, 깜찍함에도, TRPG에도 천재라는 말이냐!

       

       일레인이 마음껏 고민할 수 있도록 페로(마탑주)가 자리를 피해줬으니, 나도 일레인에게 고민거리를 던져놓는 데 집중해야겠다. 짧은 씬이었지만, 마탑주와 나는 합이 꽤 잘 맞았던 것 같다.

       

       정말 즐겁다⋯⋯!

       

       ===============================================================

       

       자색 마탑주 유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그것』의 진행도가 올라가기 전에, 유나는 그에게 조치를 취하고 싶었다. 

       

       조치란, 세션의 나레이션을 역이용하는 것.

       

       나레이션을 통해서 그를 서술하게 하고, 그에게 깃든 『그것』을 관측해서 분리해 내려는 마법적인 시도였다. 관측률 100%를 채우고 나면, 그는 스스로에게 깃든 저주를 마주볼 수 있으리라.

       

       1황녀의 세션에서 피폐각을 보는 모습을 보고, 삼켜지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추진한 일이었는데⋯⋯.

       

       “⋯⋯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에스페로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는 TRPG라는 게임의 구조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놀고’있었고, 그건, 남은 시간이 제법 많다는 의미였다. 유나에게든 그에게든.

       

       다행인 일이었다. 이렇게 그가 세션을 진행할 때마다 조금씩 관측률을 올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때는 늦지 않을 것이다. 좋았다.

       

       그러나, 그녀를 당황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급한 불이 사실 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 여유가 생긴 유나는 자기 나름대로 이 TRPG라는 것을 즐겨보기로 했다.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서!

       

       트라우마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일레인도 불쌍했고, 마찬가지로 도망치고 있는 페로도 불쌍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의심, 오해는, 유나가 보았을 때⋯⋯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냥, 누구 한 명이.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냅다 고백을 박으면 전부 해결될 것 같았다!

       

       고백 공격으로 이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버리면, 그가 화를 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일레인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고민하던 것도 잠시. 유나는 고백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가 레아로의 몸으로 아가리를 털기 전에, 사랑해요, 라고 페로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나가 점거하고 있는 페로의 몸이, 거부하는 듯 보였다.

       

       “그것만큼은 내가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찰을 핑계로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모닥불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탑주 유나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거야, 페로⋯⋯? 지금, 이 안에⋯⋯ 있는 거야?”

       

       페로는 두근거림으로 답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섬짓했습니다⋯⋯. 큰 일이 있었던 건 아니구요, 마춤뻡 검사기를 돌리는데, 아니 이게 뭐람.
    주인공 <= 부분에서 다 갈려나가고 오류가 뜨지 뭡니까? 뭔가, 마춤뻡 검사기는 <=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검사기도 수학에 약한 걸까요? 어쩐지 내적 친밀감이 오르는 낮입니다⋯⋯.

    오늘도 즐거이 읽어주셨으면 기쁘기 그지없겠습니다. 마이 프렌즈.

    +12시 4분
    마춤뻡검사기가 텍스트 일부에 폭탄을 심어뒀습니다!
    이젠, 해체했고… 세계는 평화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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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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