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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데릭에게 벽은 무의미했다.

       그는 어느 곳이든 통과할 수 있었고, 무엇도 그를 막지 못했다.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긴 했지만, 규칙만 잘 지킨다면 아무 문제 없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그는 벽 속에 숨어 괴물을 관찰했다.

       등 뒤에 솟은 거대한 2개의 거미 다리.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괴물.

       세상에 저런 놈이 있었다니.

         

       괴물은 저 아래 무대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칼날을 몸 안으로 집어넣고는 이곳을 떠났다.

       데릭은 조심스럽게 그 뒤를 밟았다.

         

       다행히 그는 자신이 이렇게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의해야 했다.

       상대도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아낸 것일까.

       정말 ‘나의 작은 새’가 그에게 내 얘기를 한 것일까?

       그렇다 해도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갖가지 의문이 드는 가운데, 아래층에서 사람 목소리가 몰려왔다.

         

       “이쪽이다!”

       “최상층 프레임이다!”

         

       상황을 파악한 기술자들이 그들이 있던 장소로 달려왔다.

         

       그러나 괴물은 능숙하게 그 동선을 피해갔다.

       그는 카바레의 구조를 전부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객석까지 내려오는 데까지 사람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데릭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랫동안 장미 풍차에서 살아온 그도 흉내 내기 힘든 묘기였다.

       놈은 마치 이곳을 수십 번은 드나든 사람처럼 막힌 길목과 숨겨진 샛길을 자연스럽게 이용했다.

         

       이것도 괴물의 능력 중 하나일까?

       어쩌면 그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도 놈의 힘과 관련된 것일지 몰랐다.

         

       데릭은 벽과 바닥, 천장을 오가며 놈을 더 자세히 관찰했다.

         

       아까는 그 무서운 모습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놈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데릭이 살면서 봐온 어떤 배우들보다 잘 생겼다.

       나이는 30살을 넘겼을까?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그 안에 든 건 터무니 없지만 말이야.

         

       사람은 역시 겉모습이 다가 아니다.

       세상에 자신처럼 내면에 사랑과 이타심을 품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의 작은 새를 제외하면 말이지.

         

       극장 측은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애초에 무료 공연이었으니 환불 같은 귀찮은 뒤처리는 없었다.

         

       장미 풍차의 경영자인 브왈레가 그 사실에 살짝 안심하는 것이 데릭의 눈에 보였다.

       저 남자의 속물 기질은 데릭을 언제나 유쾌하게 해줬다.

         

       나는 외모는 비록 추하지만, 저런 속세의 것들보다는 고결해.

       나는 선의로 내 작은 새를 돕지.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지.

       그녀는 나에게 감사해하지.

       그리고 아마도 나를 사랑…….

         

       “모두 모여보게.”

         

       총감독인 유그 마로이네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그는 백작 역의 배우가 죽은 것을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이본느가 말해준 ‘유령’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가 얼마 전에 협박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배우를 그만두고 극장을 떠나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닥칠 거라고.

         

       처음에는 공갈 협박인가 싶어 무시했는데, 자꾸만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다 오늘 찬장이 무너지면서 비품들에 깔릴 때, 벽을 뚫고 나온 희끄무레한 형체를 봤다는 것이다.

         

       “정말 유령이라면, 성당에 연락해서 퇴마사를 불러야겠군요.”

         

       브왈레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성당에 얼마나 헌금을 해야 하는지 계산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아까 천장을 수색했던 수석 기술자가 나섰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렌치와 먼지 위에 남은 사람의 흔적 등을 설명했다.

         

       “유령이 아닌 인간이 저지른 겁니다.”

         

       그의 말에 브왈레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2막이 시작되고 자리를 떠난 관객이 있었나?”

       “글쎄요……?”

         

       다들 고개를 젓는 가운데, 합창단원 중 한 명이 나섰다.

         

       “있었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 끝에는 원더스타인이 서 있었다.

         

       “2층 중앙 객석이 비어 있었어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우스운 듯.

         

       극장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에게 호감을 느끼던 단원들은 그 조소 어린 모습에 충격받은 것 같았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살해당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남기고.

         

       그 무거운 분위기의 현장에서 혼자 미소 짓고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은 결코 선인일 수 없다.

       모두가 그걸 알아챈 것이다.

         

       ‘그래. 그래. 괴물이라고.’

         

       데릭은 벽 속에 숨어 낄낄거렸다.

       아무리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치장해도 그 속에 든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방금까지 그의 외모를 훔쳐보던 샤일라가 겁먹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데릭은 안심했다.

         

       그래. 나의 작은 새야.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해보렴.

       누가 널 그렇게 아껴줬지?

       오늘 처음 보는 남자에게 혹하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원더스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조차 우스운 듯 피식 미소를 흘렸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습니다.”

       “행적을 증명해주실 다른 목격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침묵으로 가득한 대기실.

         

       수석 기술자는 품에서 곱게 접은 면포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검은 먼지들로 그려진 손바닥의 형태가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혹시 잠시 손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원더스타인 단장님?”

       “왜 그러시죠?”

         

       수석 기술자는 브왈레와 마로이네 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사고 직후, 프레임 사이를 조사했습니다. 거기에 아래를 내려다본 듯 손자국이 찍혀 있더군요. 한번 대조해보고 싶습니다.”

         

       제법 유능한 사람이군.

       데릭은 이것이야말로 위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원더스타인의 뒤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우드득.

         

       그의 오른손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더니 피부와 근육이 뒤틀리며 형태가 변형된 것이다.

         

       원더스타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고, 기술자는 상세히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눈에 그의 손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 크기도……다르고……. 무엇보다 이 손은 검지가 중지보다 기네요……. 죄,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확인을 해야 하는지라…….”

       “아, 괜찮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뻔뻔하게 웃는 원더스타인.

         

       데릭은 기가 찼다.

       저 손자국은 그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순간에 손을 바꿔 사람들을 속여넘기다니.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 괴물은.’

         

       그렇게 관객 쪽은 용의자에서 벗어났다.

       수석 기술자는 이제 직원들을 붙잡고 일일이 손자국을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그때, 메이드 복을 입은 소녀가 괴물에게 다가왔다.

         

       데릭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샤일라가 맡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데려온 곡예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수석 기술자는 이 남자를 단장이라 불렀다.

       이 곡예사 소녀가 속한 곳이 그의 서커스단인 듯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 안 들리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 짓이지?”

       “후후, 무슨 말씀이시죠?”

       “나 다 봤어. 당신이 그 틈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그녀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길.

       데릭은 둘의 관계에 흥미가 생겼다.

       어떤 사이일까?

         

       “잘못 본 것 아닐까요? 범인은 원래 극단 안에 있던 인물 같은데요. 방금 제 손자국이 아니라는 게 나왔잖아요.”

       “당신에게 손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잖아. 뻔뻔한 악마 같으니.”

         

       저 소녀는 저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육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저 눈에 담긴 증오와 공포는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요?”

         

       악마는 미소지었다.

         

       “뭐?”

       “제가 죽인 게 맞는다고 한다면 어쩌실 거죠? 기억 안 나나요? 후후, 엘라 양은 계약했잖아요. ‘평생’ 저의 노예가 되기로.”

         

       그가 히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나.

       고약한 사정이군.

       그에 비해 나는 진짜 천사란 말이야.

         

       데릭은 자신의 도덕심에 자긍심을 가졌다.

         

       “후후, 얘기를 들어보니, 파리스 군이 내일 오전 공연에 백작 역으로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엘라 양도 남으실 건가요? 어차피 엘라 양은 서커스단에서 ‘하는 일’도 없잖아요.”

         

       악마의 말에 엘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극단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남을 거야. 이곳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후훗, 역시 착한 아이군요. 제가 엘라 양을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질은 있어야겠죠. 엘라 양이 키우는 동물 한 마리를 데려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엘라는 잠시 흠칫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녀는 품에서 하얀 생쥐를 꺼내 들었고, 원더스타인은 놈을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내일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으면……이 동물은 제 뱃속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맛은 별로 없겠지만. 흠, 아니면 괴물로 개조하는 편이 나으려나?”

       “……약속은 지킬 테니, 그딴 짓 절대 하지 마.”

         

       그녀가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를 그를 노려보았다.

       악마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더니 떠났다.

         

       데릭은 여기서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괴물의 뒤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 소녀의 주변에 있을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극장을 떠나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괴물보다 이 소녀의 주변에 머무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됐다.

         

       무엇보다 그녀의 처지가 비참해 보여서 좋았다.

       그가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었다.

         

         

       ……

         

         

       장미 풍차의 후원에 있는 직원들의 숙소.

         

       엘라는 밤늦게까지 파리스와 연기 호흡을 맞추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고작 1주일새 고급 호텔 방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방은 낡고 비좁아 보였다.

         

       ‘학교 기숙사는 4명이 이것과 비슷한 방을 함께 썼었는데…….’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근처에 범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도 총감독은 내일의 연극을 강행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녀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공연의 대전제.

       다들 머리로는 알고 움직이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숨기지 못했다.

         

       다들 오늘 밤을 편히 자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엘라가 잠 못 드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될까?

         

       그때, 멀리서 자정의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희멀건한 형체가 벽을 뚫고 나타났다.

         

       흰 가면에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모습.

         

       “안녕하세요, 곡예사 아가씨?”

         

       왔다!

         

       엘라는 눈을 감았다.

         

       여기서 10km 떨어진 호텔.

         

       원더스타인의 침실에 있는 책상 위에서.

       

       쥐 한 마리가 잉크 병에 발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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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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