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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 * *

       

       

       우리에게 잡힌 놈 중 한국인인 시절의 내가 아는 네임드는, 저 미하일 프룬제와 적 기병대를 이끌고 신나게 꼬라박다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듯 카자크에게 줘 털리고 사로잡힌 세묜 부됸늬가 있었다.

       

       뭐 그 외에도 여성 혁명가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등이 잡혔는데. 이 둘은 자살하려다가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레닌이 있었다.

       

       정확히는 의식을 완전히 잃은 레닌이었다.

       

       누군가 데려가려고 했는지. 레닌은 마차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마부가 백군의 총탄에 죽으면서 레닌을 잡을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레닌을 잡았다!

       

       그 외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레닌이 멀쩡할 때, 패배자로서 혁명의 실패에 분노하며 잡힌 거면 모를까. 지금 의식을 잃은 레닌은 그냥 어디 길거리 노숙자로 던져놔도 그 누구도 혁명가로 보지는 않을 테니까.

       

       

       “레닌은 왜 쓰러진 겁니까?”

       “누군가 암살하려 한 듯합니다. 놈의 사무실에서 클로로포름을 다량으로 흡입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오흐라나가 한 일은 아닐 테고.”

       

       

       오흐라나가 했으면 진작 알려졌어야 할 일인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잡혀 있는 미하일 프룬제도 클로로포름으로 죽지 않던가.

       

       이거 스탈린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데?

       

       다만, 그놈이 보이지 않았다.

       

       레프 트로츠키.

       

       이놈은 모스크바를 샅같이 뒤졌으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없다면, 벌써 도망을 쳤겠지.

       

       그리 보는 게 맞다.

       

       

       “유감스럽게도 트로츠키 같은 거물은 없더군요. 그나마 스탈린은 잡았습니다. 길잃은 독일군들에 의해 잡혔더군요.”

       

       

       아, 그놈이 결국 잡히긴 했나 보지.

       

       

       “독일어를 수상하게 잘하는 백군이겠죠.”

       

       

       우리에게 도움을 준 외국군 따위는 없다.

       

       어디까지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백군이 있을 뿐이다.

       

       

       “항복한 볼셰비키는 어떻게 처결할 생각이십니까?”

       “예정대로 미하일 프룬제를 비롯한 공산당 윗대가리들은 재판 없이 총살합시다. 빨갱이에게 재판은 사치입니다. 그 아래 정치장교들도 전투에 얼마나 참전했는지에 따라 총살하거나 시베리아로 보내버리겠습니다.”

       

       

       미하일 프룬제는 본래 후일 스탈린과 대립하다가 1925년에 수술대 위에서 클로로포름 과다흡입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의 음모라는데, 그놈 대숙청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백군 처지에서도 굳이 살려둘이유가 없다.

       

       무려 끝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 백군을 괴롭힌 놈이니까.

       

       실제 역사도 생각하면 그놈은 죽는 게 맞다.

       

       시베리아에 보낸다고 해도 또 탈출하면 귀찮아질 테고.

       

       그 외에 볼셰비키들도 대부분은 죽이기로 했다.

       

       시베리아로 보내버렸다가 탈주한 놈들이 얼마나 많던가.

       

       진짜 어지간한 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

       

       아직 볼셰비키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충실한 볼셰비키로 있는 네임드들은 독소전에 활약한 놈들이라고 해도 죽여야 한다.

       

       내가 성녀의 자비로 봐주고 싶어도, 저것들 살려주면 어? 혁명 세력들 살려주네? 이러면서 백군 내에서는 불만이 나올 테고 빨갱이들 쪽에서는 항복하는 척 뒤로 호박씨 깔 수도 있다.

       

       처형으로 역병을 정화한다.

       

       

       “예.”

       

       

       내전에 참전한 백군 장군들은 경험도 풍부하고, 승리도 거듭해온 명장들이다.

       

       그들이 실제 역사의 소련 명장들에게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탈린이 죄다 죽여놔서 밀려난 거 생각하면 뭐 답이 나오지.

       

       그러니 굳이 실제 역사를 생각하며 네임드들을 용서해 줘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자 놈들이 내게 복종할 리 없으니.

       

       아마 레프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로 가지 않았을까.

       

       모스크바마저 백군에 빼앗긴 시점에서 놈이 도망칠 만한 곳은 혁명의 도시 페트로그라드 정도겠지.

       

       

       “황녀님. 빨갱이들이 열심히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다고 합니다. 운게른 중장이 그 뒤를 쫓는다는군요.”

       

       

       서쪽이라. 결국 페트로그라드겠지.

       

       그중에서는 트로츠키도 있을 것이다.

       

       

       “빨갱이들이 참으로 징그럽습니다. 이거 결국 페트로그라드까지 가서 끝장을 보겠다는 건데.”

       

       

       볼셰비키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기어이 도망을 쳤다.

       

       운게른의 아시아 기마사단이 열심히 도망치는 붉은 군대를 토벌하고 있다는 데, 그중에 트로츠키는 없을 거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갈 만한 곳은 페트로그라드 정도겠지.

       

       도망은 쳤으나, 트로츠키도 목숨을 애걸할 인물은 아니잖나?

       

       아닌가? 목숨 애걸하려나?

       

       페트로그라드를 빨리 압박해야겠다.

       

       

       “핀란드의 독립을 조건부로 허락할 테니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고 싶은, 유데니치를 지원하라 하죠.”

       “핀란드의 독립을 용인하실 참이십니까?”

       

       

       뭐 어쩔 수 없지.

       

       핀란드가 독립하지 않은 상황이면 모를까.

       

       이미 자체적으로 독립해 버려서 우리 쪽 눈치를 살살 보고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조건만 맞춘다는 가정하에 핀란드의 독립을 봐줄 수 있다.

       

       

       “네. 새로운 러시아는 힘으로 주변국을 압박하는 양아치 국가가 되어선 안 됩니다. 제가 형식적인 핀란드 국왕을 겸하게 해준다면 독립시켜준다고 하세요. 그 외에는 주권국으로 존중해주겠다고 말입니다.”

       “영향권 아래에 두시겠다는 거군요.”

       “그냥 단순히 독립시켜 버리면 아무래도 독립하고 싶은 소수민족들이 날뛸 테니 말입니다.”

       

       

       이제 막 내전의 승기를 잡은 마당에 그런 일은 귀찮을 뿐이다.

       

       자, 그럼 다음은 모스크바에서 항복한 빨갱이들을 처형할 시간이다.

       

       볼셰비키 처형은 모스크바 교외에서 벌어졌다.

       

       백군은 붉은 군대 장교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이. 이보시오 동지들! 하.항복하면 살려 준다고 하지 않으셨소?”

       “우리는 그 말만을 믿고 항복한 것이오!”

       “용서해주는 것은 너희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볼셰비키가 된 이들뿐이다. 너희는 사정이 안 되어 여우 새끼처럼 항복했을 뿐. 모두 총살형이다!”

       

       

       탕! 탕탕 탕!

       

       한때 제정 시절의 장교들을 총살하면서 희열을 느끼던 붉은 군대의 장교들은 백군 장교들이 직접 총살했다.

       

       모스크바 내에서는 한동안 빨갱이들의 피로 피바람이 불었다.

       

       한때 혁명을 이뤘다며 자신들 세상인 양, 신나서 날뛰던 빨갱이들은 조금도 용서받지 못했다.

       

       사람을 마구 죽이던 업보를 달게 받듯. 골수 빨갱이들은 처절하게 총탄에 죽어 갔다.

       

       붉은 군대의 장교들이 흘리는 붉은 피는 새로운 러시아의 거름이 되리라.

       

       

       “황녀님. 레닌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잘도 깨어났네.”

       

       

       그럼 어디 레닌을 만나러 가 볼까.

       

       승리자로서 티베깅은 의무잖아?

       

       

       

       * * *

       

       

       레닌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군들에 의해 끌려 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놈은 시뻘건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표정 한번 살벌하군.”

       

       

       그렇겠지. 혁명을 무너트린 혁명의 적과 마주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제국을 전복시킨 존재를 만났다.

       

       물론 나는 전생이 한국인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몸은 아나스타샤기도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레닌이란 인물을 내가 패배시킨 거니까.

       

       이 희열감 어떻게 참냐고.

       

       

       “황녀!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결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멈추지 않을 것이오! 결국,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오!”

       

       

       오 말은 잘하는데. 그런데 어쩌냐.

       

       그게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텐데.

       

       소련이 정말 성공했다면 모를까. 결국, 실패했으니까.

       

       적백내전에서 실제 역사에도 스탈린을 비롯해 붉은 군대의 지도자들은 소작농을 협박해서 식량 강탈, 반발하는 마을은 불태웠고, 탈영자들은 공개처형도 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백군도 그리 선하냐면 아니겠지만.

       

       온갖 듣기 좋은 말로 세워진 소비에트가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이지 않냐는 거지.

       

       가식적인 놈들 주제에.

       

       나는 지휘봉을 꺼내 레닌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말은 잘하는군. 그런데 어쩌냐. 결코, 그런 일은 없을 텐데.”

       “!?”

       “네놈이 말하는 것은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도망친 트로츠키든 누구든, 어느 나라로 망명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다.”

       “무슨 말을.”

       

       

       그래.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레닌에게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한번 내전을 겪은 러시아고, 국시로 공산주의 토벌을 내세울 생각이거든. 공산주의가 어디를 뿌리를 내리든 간에. 너희를 명분으로 침략 구실로 삼을 수 있겠지. 너희 덕에 내전이 났으니, 이후의 러시아인들은너희라면 치를 떨게 되겠지. 그렇게 다시 태어난 신생 러시아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를 토벌하는 것이 숙명처럼 될 터.”

       “뭣.”

       

       

       앞으로 러시아는 최초로 공산주의 내전을 겪은 나라란 이명을 달고 살 거다.

       

       그리고 그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할 테고.

       

       공산주의를 토벌하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지겠지.

       

       

       “레프 트로츠키라고 했던가. 아마 수세에 몰리면 페트로그라드에서도 도망치겠지. 중국이든 신대륙이든, 유럽이든 어디든 간에.”

       “!!”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거다. 앞으로 다시 태어날 러시아는 ‘공산주의 토벌’을 명분으로 사방에 힘을 뻗으려는 새로운 제국주의를 시작할 거로 보일 테니까.

       

       이보다 더 완벽한 명분이 어디 있을까?

       

       

       “고맙다. 너희 덕에 러시아제국은 다시 일어설 테니까.”

       

       

       레닌의 붉게 물들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변했다.

       

       그래. 저런 얼굴을 바랐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오히려 세계는 더 제국주의로 날뛰게 될 거라고.

       

       아마 화병날 거다.

       

       자기들이 뿌리내리려는 곳마다 개입해서 침략하고 새로운 러시아가 더 강한 제국주의로 일어선다.

       

       공산주의자들은 의도와는 다르게 스스로 제국주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티베깅.

       

       어떻게든 바퀴벌레처럼 도망쳐도 오히려 러시아가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놈의 눈엔 내가 제국주의 최종 보스처럼 보이는 거지.

       

       

       “너희가 씨앗을 뿌린 모든 나라를 정벌할 거다. 세상은 피로 뒤덮일 것이고. 너희한테 딴 아이디어로 적당히 당근을 먹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소모품으로 취급당하며 죽어 나가겠지.”

       “내가. 내가. 괴물을 만들어냈구나.”

       

       

       레닌은 눈을 파르르 떨면서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같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이걸 또 속네, 병신 빨갱이 새끼.

       

       아니면, 빨갱이 특유의 본능으로 느낀 무언가가 있나.

       

       그럼 더 분위기에 맞춰줘야지.

       

       

       “고맙다. 네 덕에 눈에 확 뜨였거든. 말했듯이 재판은 필요 없다. 내일 총살-아니지 영국 놈들이 인도 반군에게 한 것처럼 대포로 직접 죽여라. 미하일 프룬제도, 기타 빨갱이들도 전부 이놈과 함께 포살형으로 해결해라.”

       “예!”

       

       

       레닌은 뒤에서 대기 중인 백군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내일 저놈은 모스크바에서 저항한 공산당 놈들과 다 함께 포살당할 것이다.

       

       소련을 일으켰던 혁명의 아이돌이야 육편이 되어 사방에 흩어지겠지.

       

       

       “황녀님. 아까 레닌에게 하신 말씀은.”

       

       

       옆에서 나와 레닌의 대화를 지켜보던 참모장 드로즈돕스키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언뜻 들으면 지금 러시아가 그럴 처지도 아닌데, 야망을 꿈꾸는 거 같으니까.

       

       물론 나도 그게 현실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아, 티베깅입니다.”

       “티베깅이요?”

       

       

       아, 이 시대에 티베깅이란 말이 없겠지.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패배자를 놀리기 위해 한 말들입니다. 실제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이번 일로 공산주의도 이제 거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테니까요.”

       “그거 어쩌면 좋은 방법 같아서 말입니다.”

       “예?”

       “물론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그런 건 말도 안 되고, 적어도 필요할 때, 전쟁을 할 명분으로는 충분합니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어.

       

       확실히 이론만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지금은 당장 내전이 더 급하지.

       

       그래. 스탈린이라든가 말이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스탈린은 어디 있습니까.”

       “그자는, 안 그래도 황녀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

       

       

       뭔가 말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뭔가 있나.

       

       한동안 나이에 맞지 않게 우물거리던 표트르 브란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독일군의 총에 불구가 되었다고요?”

       “의사의 말로는 하필이면 총알이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았다는군요.”

       “고자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순간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 스탈린이 고자라고 한다.

       

       너무 불쌍하게 된 것이 아닌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옆집 신작 대체역사 장르에서 조금씩 순위 오르고 있는데.. 적백내전 후 한동안 연재는 쭉쭉 계속 될듯 하네요.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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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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