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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늦은 밤, 이론학과 교무실.

       

       상석의 이스메라 교수는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혼자 남은 이스메라 교수는 눈을 감고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이스메라는 이론학과 전원과 야근중. 특기생 선발계획을 만들기 위해서다.

       

       특기생 선발을 하기로 결정을 했으니 그것을 실현시킬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아카데미에는 기존 계획이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

       

       이런 큰 사업은 일개 교수들이 아니라 윗선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아카데미에는 그 윗선이라 불릴 사람이 세 명 있다.

       

       교장 키르린, 이론수석교수이자 교감의 공석을 대신하는 이스메라, 그리고 전투수석교수 디안.

       

       키르린 교장은 글씨만 잘 쓰지 무능해서 아마 절대 뭔가 만들어 내지는 못할 거다.

       

       듣자 하니 오늘 출장에서도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고 하잖아?

       

       그리고 전투수석인 디안은 말할 것도 없다.

       

       전투학과의 그 무식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특임대니 비밀요원이니 하면서 칼밥이나 처먹다가 어디 사령관 눈에 들어서 알음알음 들어왔을 터.

       

       비록 지금까지는 기적적으로 운이 따라줘서 소 뒷걸음질치다 개구리 잡은 격으로 성과를 몇 번 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특기생 선발계획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충대충 슬렁슬렁 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단순히 시험만 치르고 끝이 아니라 우리 아카데미가 원하는 인재상을 투영한 배점표와 가중치 등이 녹아 들어야만 한다.

       

       그뿐인가. 선발할 장소도 정하고 동선도 짜고 식사 문제부터, 만약 이틀 이상 길어진다면 숙박 문제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것을 키르린이나 디안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이스메라는 이번 일을 황성에 자신을 어필할 절호의 찬스라 여기고 있다.

       

       계획부터 실행, 최종선발까지 모두 주도적으로 나선다면 분명 황성에서도 이스메라를 교장으로 올리는 방안에 대해 긍적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제아무리 황제의 목숨을 구한 다크엘프의 딸이라고 해도 바로 밑에 있는 특출한 능력을 지닌 순혈엘프가 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내일 점심 즈음에는 계획이 완성될 것이고 키르린과 디안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할 거야.

       

       “이거 진짜 맛있다.”

       

       그때 밖에 나갔던 교수들 몇 명이 뭔가를 입에 물고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육포였다.

       

       “역시 육포는 퀴라나산이지.”

       

       퀴라나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전투학과의 그 대책없이 낙천적인 사냥꾼 교수가 만든 육포로군.

       

       일전에 디안 교수가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줬던 바로 그 육포. 그때의 생각에 이스메라는 진저리를 쳤다.

       

       엘프들은 주로 채식을 하며 그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 이스메라에게 디안의 행동은 지극히 미개하고 무례한 것.

       

       정말이지 그 작자는….

       

       “죄송합니다….”

       

       이스메라가 또다시 치를 떨자 교수들이 눈치를 보며 질겅이던 육포를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거, 어디서 난 거죠?”

       “밖에서 퇴근중인 전투학과 교수들하고 만났는데 야근하면서 먹으라고 나눠준 겁니다.”

       “퇴근을 했다고요?”

       

       시계를 힐끔 본 이스메라는 코웃음을 쳤다.

       

       할 줄 아는 거라곤 힘쓰는 것뿐인 전투학과가 설마 벌써 자기네 계획을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리고 분명 디안은 이스메라에게 이론학과 부분이 완성되면 참고하기 위해 보여달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아마 이쪽에서 먼저 계획을 완성하기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전투학과 부분까지 얼추 진행하고 있던 이스메라는 애초에 디안에게 계획을 보여줄 마음이 없었다.

       

       빠르면 내일 점심에는 키르린과 디안이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속 시원한 꼴을 보게 되겠군.

       

       기분이 좋아진 이스메라는 박수를 치면서 교수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제 다시 시작하죠. 내일 점심 전까지는 계획을 완성해야 합니다!”

       

       이스메라의 말에 이론학과 교수들은 헬쓱해진 표정으로 주눅이 들어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 # # # #

       

       

       “푹 쉬고 내일 보자.”

       “들어가세요, 수석교수님.”

       “들어가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교직원 구역에서 교수들과 헤어진 나는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독신 기숙사를 비롯한 주택 대부분은 불이 꺼져 고요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아카데미 남동쪽에 면한 바닷가의 파도소리가 들릴 것만 같기도.

       

       그러나 아무리 내 청력이 좋다 해도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의 파도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는 감지할 수 있지.

       

       뒤를 힐끔 돌아보니 전투승마교수 애나가 호다닥 담벼락 뒤로 몸을 숨긴다.

       

       애나는 독신이라 여기가 아니라 저쪽 기숙사에 사는데. 나한테 할말이라도 있나.

       

       잠시 서서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기에 몸을 돌렸다. 숨어 있는 애 아는 척하면 서로 민망하지.

       

       얼마간 걷자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애나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뭐냐, 쟤는.

       

       집에 들어가니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소파에는 올리시아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올리시아. 안 자고 뭐해?”

       “아, 오셨어요…? 디안 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난 올리시아가 주섬주섬 부엌으로 향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혹시 몰라서 준비해 뒀는데.”

       

       부엌의 식탁에는 천으로 덮어둔 빵이며 치즈덩이 등이 있었다.

       

       “고맙지만 먹고 왔어. 웨이버가 야식을 챙겨 왔거든. 저번에 그 육포 알지?”

       “그거 맛있었죠. 식사를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도로 천을 덮으며 올리시아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뭐하러 기다렸어. 그냥 자지.”

       “디안 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편히 잘 수 있나요.”

       

       또 한번 하품을 한 올리시아가 이번에는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어서 씻고 주무세요. 오늘 야근했다고 내일 늦게 출근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고맙다, 올리시아.”

       “이게 다 디안 님께서 다른 생각 마시라는 취지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래그래. 아카데미 절대 그만두지 말라는 소리잖아.”

       “역시 디안 님이세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올리시아가 방으로 들어간 후 나도 샤워를 마치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나저나 사관학교 계획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분야 계획이 키르린과 이스메라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우리가 사관학교 계획을 파쿠리한 건 이론학과를 이겨 먹거나 키르린에게 잘 보일 목적이 아니다.

       

       근처에 좋은 샘플이 있는데 굳이 바닥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잖아. 불필요한 노력은 줄이는 게 좋아.

       

       게다가 전투학과 교수들은 역시 펜보다는 칼이라서 책상에 모여 앉아서 몇날며칠 씨름해 봐야 그 결과물의 퀄리티는 뻔하다.

       

        그럴 바에야 어느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훔친 문서는 돌려놨으니 사관학교 측에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할 거고 그것을 따라했다고 사관학교에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편하게 가니 좋고 키르린은 마냥 좋아할 거고 이스메라도 전투학과까지 커버하지 않아도 되니 좋고.

       

       아마 이스메라는 자기 능력 어필한다고 전체계획 짜올 테니까 거기다 우리 분야만 얹으면 될 일이니 다들 좋잖아.

       

       좋아. 모두가 좋기만 하지 나쁜 거 하나도 없네.

       

       

       # # # # #

       

       

       다음날 점심시간 직전.

       

       “이스메라 교수. 정말로 괜찮은 거야…?”

       “괜찮습니다….”

       

       키르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자 두 눈이 벌개진 이스메라가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는 교장실. 곧 있을 외부 특기생 선발계획의 최종안을 논의하기 위해 키르린과 디안, 그리고 이스메라가 모인 자리다.

       

       “눈이 에메랄드색이 아니라 교장님처럼 루비색이 되어 버렸는데요? 의무소라도 다녀 오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디안의 말에 이스메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아카데미의 큰일을 앞두고 수석교수가 나태한 꼴을 보일 수는 없지요.”

       “그래도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설마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안 주무신 건 아니죠?”

       

       이스메라는 대답 대신 초췌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회의는 좀 빨리 끝내고 이스메라 교수님께서는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얼른 하죠.”

       

       그러며 디안이 먼저 계획서 초안 두 부를 꺼내 각각 이스메라와 키르린 앞에 내려 놓았다.

       

       “먼저 전투학과 분야입니다. 좀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십쇼.”

       

       이스메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우리 이론학과 전원이 철야로 매달릴 때 전투학과는 모두 퇴근을 했지.

       

       그 결과물이야 안 봐도 뻔하다. 적당히 반응해 주고 우리가 만든 안으로 밀어 붙이자고.

       

       “흐음…. 이스메라 교수….”

       

       그 사이 계획서를 훑은 키르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스메라 교수를 돌아봤다.

       

       “이거 말인데…. 그대로 써도 되겠는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한번 읽어 봐.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스메라 교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도대체 저 검둥이 교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이스메라는 자기 앞에 놓인 계획서 사본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특수임무 아카데미 외부 특기생 선발계획>.

       

       개요야 뭐 뻔하니 넘어가고.

       

       일반계획은 으음…. 흠…. 나름 그럴싸하게 해놓기는 했네. 전투학과가 마냥 바보들의 집합소는 아닌 모양인데.

       

       하지만 일반계획이야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거고 핵심은 세부계획이다.

       

       보나마나 엉망진창일 게 당연지사. 자격미달 교장의 눈에나 대단해 보이지 고등석사까지 딴 나에게는 어림도….

       

       뭐… 뭐야, 이거?!

       

       세부계획란을 읽는 이스메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의 볼 수 없는 이스메라의 희귀한 표정에 키르린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어때, 이스메라 교수?”

       “어… 어, 그… 으음….”

       

       너무도 완벽한 계획에 이스메라는 어버버하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게 정말로 전투학과 머저리들이 만들어낸 거라고!?

       

       “저, 정말이군요…. 추가보완은 필요치 않을 듯합니다….”

       

       이스메라는 비록 속은 시커멓지만 종족 특유의 자존심이 워낙 강해 오히려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

       

       디안이 내놓은 전투학과 분야의 계획서는 완벽했고 이 양식을 그대로 전체계획으로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

       

       오히려 교수들을 철야로 들들 볶아 뽑아낸 자신의 전체계획서가 쓰레기처럼 느껴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디안. 칭찬해.”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점심 먹고 케이크 쏘시죠.”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이스메라는 이를 뿌득 갈면서 키르린과 하하호호 잡담하는 디안을 노려 봤다.

       

       저 인간… 진짜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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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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