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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1.

       

       그 뒤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실피아 안드레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모멸감에 몸을 떨면서 돌아왔는지, 아니면 아르웬에게 악에 받쳐 속에 있는 응어리를 모두 토해내고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굳이 애써서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제 앞에 뻔뻔스레 나타나서는 혼자서만 깨끗한 척, 고귀한 척 지껄이는 아르웬은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기폭제였을 뿐이었다. 적어도 실피아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

       

       팔로 눈을 가린 채,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실피아가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을 토해냈다.

       

       아르웬과의 대화를 빙자한 헐뜯기는 일종의 트리거였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다섯 명 전부 다 똑같은 과거를 지닌 셈이다. 그 말인 즉슨 같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전의 그 대화가 서로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어, 고통을 줄 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라 아르웬 역시 알고 있었을 터다.

       

       다만.

       

       “실수로라도 다른 드래곤들이 알게 두면 안 되겠죠. 분명히 평생 놀림 받을 테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답답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머리로는 알았다. 이해하고 있었다. 유희는 유희일 뿐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드래곤이라고 해서 인간과 다른 감정을 지닌 생물은 아니다. 인간을 유약하다며 비웃지만, 정작 유희를 시작하면 이건 어디까지나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놀이라고 애써 최면을 걸며 그 인간의 틀에 맞추는 게 드래곤이라는 족속들 아니던가.

       

       가끔 유희에 지나치게 몰입한 다른 드래곤들의 소식이 들려오곤 하면, 너무 유희를 오래 즐긴 모양이라며 비웃었던 과거가 스쳤다.

       

       “……뭐가 유희를 오래 즐긴 거예요. 결국 나도 똑같아졌는데.”

       

       바싹 말라 있던 입술에서 짠 맛이 났다. 눈물이었다.

       

       슬퍼서는 아니었다. 다만 또르륵,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자신이 이상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상하게 만든 건 루드릭이었다.

       

       괜히 드래곤들이 유희 도중에 필요 이상으로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는 행위가 금기시되는 게 아니었다. 때때로 어떤 드래곤들은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자각마저 망각하고, 단순히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죽이는 행위인 유희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기에.

       

       그리고 그 금기를 어긴 대가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금기가 괜히 금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몸을 돌린 실피아가 베개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묻은 실피아의 몸이 한동안 들썩였다.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2.

       

       아르웬이라고 그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됐는데 루드릭이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부터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슴 한 구석에 바위를 얹은 것처럼 답답한 마음에 방을 나서 고양이의 모습으로 황궁을 한동안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고급스러운 자태 때문인지 높으신 분이 키우는 고양이로 오인한 덕분에 별다른 제지는 받지 않았기에.

       

       그리고 황궁 입구까지 가서 서성거리다가 실피아와 루드릭이 다정한 연인처럼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것같은 충격이 강타했다.

       

       실피아와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내며 말싸움을 벌였지만, 다시 방으로 돌아 온 지금조차 그 충격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니라. 그저 옛날 일을 조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니.”

       

       무릎 위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아르웬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이 쓰다듬었다.

       

       슬슬 진조 아르웬 노스페라투가 아니라 진짜 고양이 취급을 받는 게 묘한 불만이 생기던 참이다. 정확히는 자신을 애완동물로 기르는 고양이가 아니라 엄연히 이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이렇게 쓰다듬는 손길을 받다 보면 평소에 품고 있던 그런 불만도 눈 녹는 것처럼 사라지곤 했지만.

       

       지금은 마냥 그 손길을 즐기고 있기에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모순이었다.

       

       서로가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연적의 관계였지만, 역설적으로 회귀 전의 상처와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루드릭.”

       “응?”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갑자기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야?”

       “같은 상처를 입은 짐승이 있다고 치자꾸나. 평소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만, 서로 상처를 핥아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짐승이.”

       

       방금 전까지는 약간 기계적으로 루드릭의 손에 머리를 비비던 아르웬이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평소와 달리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꺼낸 말에 루드릭이 반사적으로 그 말을 경청했다.

       

       실피아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던 아까 전의 상황이 떠올라서, 어렵지 않게 그 대화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모순적이지 않느냐? 그렇게 사이가 나쁘면서도,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그 상처를 갖고 있음에도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이.”

       “……아까 실피아랑 했던 얘기 때문에 그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다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라.”

       

       아르웬의 말을 경청하던 루드릭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회귀자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힌 아르웬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모두 회귀했다는 사실을 루드릭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맹점이 하나 생겼으니, 그들이 회귀했다는 사실 자체는 알아도 회귀한 이유, 원인, 회귀 전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회귀의 원인이야 회귀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무시한다고 해도, 회귀 전의 과거에 대략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루드릭도 몹시 궁금하던 참이다.

       

       대관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아르웬이 갑자기 맥락 없는 대화를 꺼낸 것인지.

       

       궁금증은 점점 커졌고, 한 번 정도는 속 시원하게 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아르웬.”

       “……음.”

       “그럼 내가 하나 물어봐도 돼?”

       

       전에 없이 단호한 루드릭의 목소리.

       

       어렵지 않게 질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고, 올 것이 왔구나 싶은 표정의 아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했다고 했잖아.”

       “그래.”

       “그럼 회귀하기 전의 과거에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

       

       짧지만 직설적이고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

       

       하지만 아르웬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예상한 질문이 그대로 루드릭의 입에서 나왔지만, 마치 아교가 붙은 것처럼 입이 쉽사리 떼어지질 않았다.

       

       회귀하기 전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그 과거에서는, 눈앞에서 천진하게 질문하고 있는 네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잔인한 일이다.

       

       벙어리가 냉가슴을 앓는 것처럼 그 잔인하고 간단한 진실 몇 마디를 말할 수 없는 일이란 썩 비참한 기분.

       

       사람이 자신의 정해진 수명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그 결과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한참이나 주저하던 아르웬의 태도에서 어떤 이상함을 느낀 건지, 루드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던 거야?”

       “……!”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이 단박에 본질을 꿰뚫었다.

       

       루드릭으로서는 차마 말 못할 어떤 이유가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아르웬의 태도로 추리한 질문이었지만, 등을 돌리고 무릎에 앉아 있던 아르웬의 움찔거림은 확신이 되어 돌아왔다.

       

       “……맞나 보네. 내가 죽었다든가. 뭐, 그런 일이 있었겠지.”

       “그것이…….”

       “난 또.”

       

       루드릭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죽음은 미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이십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인연이 먼저 생각날 테고, 뒤이어 슬픔이라는 감정이 뒤따를 테지만.

       

       “내가 충격이라도 받을까봐 말 못하고 있던 거네.”

       “……그래.”

       

       아르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죽어도 죽어도 회귀하는 게 아니고서야 죽음을 친숙하게 여길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단 하나인 까닭에.

       

       다만 루드릭은 짐짓 태연한 척, 피식거리며 아르웬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귀엽네. 그런 걸로 걱정하고 있던 거야?”

       “귀, 귀, 귀엽다니…… 아니, 애초에 너는 미래에 네가 죽는다는데 걱정되지는 않느냐? 나는 타고 난 수명 자체가 길다지만, 인간은 오래 살아야 백 년이 고작──”

       “그래서 네가 회귀한 거잖아, 아르웬.”

       

       앙칼진 고양이처럼 머리를 마구 흔들어 그 손길을 뿌리친 아르웬의 말문이 막혔다.

       

       고장 난 기계처럼 우뚝 멈춘 아르웬이,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너,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내가 사고로 죽든, 병으로 죽든. 어쨌든 그 과정을 너는 보고 왔다는 거잖아. 그러면 막을 방법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는 아니니라. 만약 네가 죽는 미래를 막을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건지.”

       “뭐, 네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일견 무책임하게 보이는 루드릭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양이 모습이라는 자각도 잊고 헛웃음을 짓던 아르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무릎 위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앉은 아르웬의 모습이 반짝이는 빛에 휩싸이더니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단정하게 땋아서 한쪽으로 내린 머리카락과, 예의 정장을 갖춰 입은 단정한 옷차림.

       

       처음에 로렌초의 비밀 연구실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보라색 눈동자에는 묘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후후…….”

       

       아르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도는 알았다. 정말 무책임하게 생각해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게 아니라, 아까부터 이어진 침울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아픈 기억을 들춘 아르웬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는 걸.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루드릭은 묘하게 덜렁거리도 털털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퉁명스러운 행동거지 속에 타인에 대한 상냥한 배려가 근본적으로 깔려 있었으니.

       

       “……저기, 아르웬?”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네게 알려줄 필요가 있겠구나.”

       

       고양이로 변신한 상태에서, 손가락 끄트머리에 맺힌 피만 할짝이는 건 슬슬 감질나던 참이었다.

       

       진조라고는 해도 그 근본은 뱀파이어. 흡혈귀인 그녀에게 있어 루드릭의 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미였기에, 그저 감질나게 입맛만 다시던 지난 며칠.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는 루드릭의 목덜미에 아르웬이 얼굴을 파묻었다.

       

       비강을 채우는 체향이 더없이 달콤했고, 마지막 순간에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한 아르웬이 약간의 말미를 줬다.

       

       정말 싫으면 밀쳐내라는 것처럼.

       

       하지만 루드릭은 밀쳐내지 않았고, 아르웬이 그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았다.

       

       송곳니가 꽂히는 순간 움찔거리는 루드릭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그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아르웬이 천천히 피를 빨았다.

       

       “……이거, 느낌이 되게 이상해.”

       “익숙해지거라. 종종 겪을 터이니 말이다.”

       

       용케 뭉개지지 않은 발음으로 대꾸한 아르웬이 무심코 생각했다.

       

       그냥 지금의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라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남성향 말고 진짜 여성향 로판을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건데

    좀… 뭐랄까… 되게 음습한 작품이 많더라고요.

    사실 히로인으로 뱀파이어를 넣은 순간부터 디아볼릭 러버즈같은 흡혈신은 꼭 쓰고 싶었어요

    꼴리잖음

    반박시 꼴알못

    즐거운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세뱃돈 (주시는 분들은) 적게 주시고 (받는 분들은) 많이 받으세용.

    저는 군대 제대까지 마친 늙은이라 이제 받을 일은 없겠네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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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로판 주인공 하기 싫습니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reincarnated as the eldest son of a noble family with nothing to do.

Even if I put aside the fact that the world I was reincarnated into is a little strange.

– Northern Grand Duchess Eileen is confused after realizing she has regressed.

– Admiral Lassiel realizes she has regressed and immediately turns the fleet around.

– Princess Elena prepares to inspect the Weiss County, chewing over the past.

What is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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