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20

       명망 높은 저술가이자 전직 제국대학 교수인 펠레빈은 황태자의 글 스승인 동시에 그의 최측근이었다. 올해 초, 황제가 병으로 쓰러지고,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그가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황태자가 제시한 개혁안들은 현재 제국이 겪고 있는 문제점의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한 것이었다. 누구도 고작 15살짜리가 그런 것들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펠레빈은 소문이 사실과 많이 다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개혁안의 세부적인 사안을 조정한 것은 맞았지만,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모두 황태자 본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펠레빈은 제국대학의 교단에 서 있을 때, 뛰어난 학생들을 많이 지도해 봤다. 그중에는 당대에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황태자의 성적은 괜찮은 편에 속했지만, 제국대학의 상위권 인재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뛰어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아니, 반대로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받은 고등 교육을 생각하면 오히려 범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특정한 부분에서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재능을 발휘했다. 바둑, 체스, 포커 등, 상대와 마주 앉아 수 싸움을 벌이는 게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자랑했다.

         

       이 시대의 문사들이 다 그렇듯 펠레빈 역시 그러한 반상 위의 놀음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들은 종래에 와서는 다양한 기물과 규칙을 도입하여 복잡해져 가는 추세인 듯했지만, 기본적인 전략은 유사했다.

         

       가장 까다롭다는 바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둑판 위에는 무한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정석’이라는 카드들을 손에 쥐고 승부를 겨루는 것이었다. 즉, 내 패에 있는 카드들을 내면서 상황을 유도해 종국에는 상대 패에 낼 카드가 한 장도 없게 만들면 이기는 것이다.

         

       승부는 결국 많은 카드를 쥘 수 있는 쪽, 그러니까 더 멀리까지 수를 내다볼 수 있는 쪽이 이겼다. 그렇기에 승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번에 카드를 많이 쥐고 버틸 수 있는 정신력과 그걸 유지할 수 있는 체력이었다.

         

       황태자는 그러한 면에서 봤을 때, 뛰어난 기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가 한 번에 손에 쥘 수 있는 카드의 양은 시골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노름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의 호흡을 읽고, 그것을 무너뜨릴 방책을 찾는 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즉, 상대의 손에 든 카드들이 뭔지 모두 읽어내고, 그 카드들을 무력화하거나 맞받아칠 수 있는 카드들로만 자신의 패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논리의 흐름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황태자의 그런 재능은 정치와 행정에서도 발휘되었다. 그는 기반 자료들과 사실관계를 계속 읽고 또 읽는 것으로 문제의 핵을 찌르는 해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난 개혁들은 그렇게 그가 핵심 사안을 집어주면, 참모진들이 보강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가 추진한 정책들은 황제가 눈을 뜬 이후에 대부분 백지로 돌아갔지만, 펠레빈은 그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한 점 후회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황태자의 모든 선택을 무한히 반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니즈니 보르조미역에 도착한 ‘니콜라이의 위엄’ 호에서 내리는 그의 안색은 별로 밝지 못했다. 황태자의 참모진이나, 황태자를 따라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귀족 젊은이들, 그리고 황실근위대 기사들은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같은 근엄한 성격의 학사가 앞뚜껑에 사람 얼굴 조각이 박힌 유치찬란한 색의 기차를 타고 나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내리는 것은 당사자에겐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펠레빈을 근심에 빠트리게 만든 건 이 우스꽝스러운 서커스 열차가 아니었다. 그는 역에 마중 나온 보르조미의 시장과 인근의 유력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방금 읽은 쪽지에 대해 생각했다.

         

       [며칠 놀다 올게]

         

       그것은 황태자가 남겨두고 간 것이었다. 방금 전, 그는 고작 2명의 호위만을 데리고 열차에서 몰래 빠져나갔다.

         

       펠레빈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단순히 놀고 싶어서 멋대로 책임을 내던지는 성격이었다면, 지난 15년 동안 황실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었다.

         

       펠레빈은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황태자 본인도 그것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할 수 있었다. 이번 결정도 황태자의 그 비상한 재능이 도출한 답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펠레빈은 그가 잠적한 이유 몇 가지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선 ‘황태자’를 바라봤다.

         

       15살 치고 커다란 키에 넓은 어깨, 보기 좋게 발달한 근육, 적당히 붙은 수염 등.

       지금은 아직 15살이라 곱상한 소년티를 벗지는 못했지만, 성인이 되면 호쾌한 미청년으로 자랄 것처럼 보였다.

         

       현재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그 소년은 사실 북부 어느 지방 남작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황태자와 많이 닮았다는 이유로 이번에 대역으로 뽑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황태자가 보르조미에 오면 당연히 황실 휴양지에 머무를 거라 여겼다. 그런데 황태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젊은이가 귀족 한 무리와 경호원 한 무더기를 이끌고 시내에 나타난다면? 심지어 ‘코카’라는 뻔한 가명까지 써가면서?

         

       사람들은 황태자가 눈 가리고 아옹 식으로 시내에 유흥을 즐기러 나왔다고 입방아를 찧어댈 것이다.

         

       ‘전하도 이제 남자라는 거지.’

       ‘술도 마시고, 여자도 즐기고, 도박도 하고.’

       ‘끌끌,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뭐.’

         

       황태자의 정적들 역시 이번 여정을 통해 황제의 견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 ‘진실’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황태자 진영의 노림수였다.

         

       방탕한 젊은이들과 시내에서 노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역이 할 일이었다. 진짜 황태자는 황실 휴양지 깊숙한 곳에 박혀 재능있는 젊은이들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나눌 생각이었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분명 지난 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황태자는 펠레빈이 짠 계책에 동의했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1시간 전에 첩보부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정보를 검토하더니 거기서 다른 ‘호흡’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주군은 과연 무엇을 읽어낸 것일까.

       펠레빈이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황태자 일행은 역 앞 광장에 들어섰다. 군중들은 황태자의 잘생긴 모습을 보고 소문대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카’는 확실히 황태자와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태자의 모습과 닮았다는 말이 맞았다. 진짜 황태자가 키 높이 장화를 신고, 근육 보강용 패드를 옷 속에 집어넣고, 가짜 턱수염 등을 얼굴에 붙였을 때와 말이다.

         

       황궁 사람들은 어렸을 때 예쁘장하던 황태자가 선이 고운 미남으로 자라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15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예쁘장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맨몸을 보면, 그가 정말 남자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털 한 가닥 나지 않은 고운 피부, 좁은 어깨, 잘록한 허리, 큰 엉덩이, 쭉 뻗은 다리, 그리고 알게 모르게 조금 솟은 가슴까지. 다리 사이에 돌출된 물건이 없다면, 누구나 그를 여자로 생각할 것이었다.

         

       그가 일부러 과하게 분장해 가면서까지 남성성을 챙기려 드는 것도 모두 그런 이형의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펠레빈은 황태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데에는 그런 이유도 한몫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온천에 머무른다면, 아무래도 알몸으로 마주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의 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세상에 10여 명 정도밖에 안 된다.

         

       남자면서도 남성성이 잘 발현되지 않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황태자는 좀 심각한 축에 속했다. 펠레빈은 그 원인을 ‘푸른 피의 저주’로 보았다.

         

       유목민족이었던 키예프인들은 농경민족보다 이웃과 교류가 적었고 사촌끼리 혼인하는 일도 흔했다.

         

       흔히 유목민들은 외지인이 오면 아내에게 손님을 밤 시중들게 할 정도로 족외혼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해 그만큼 근친혼이 일상화되어 있기에 피가 섞일 기회를 반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러한 근친혼은 혈통을 따지는 귀족들일수록 더욱 심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귀족들끼리는 한두 다리 건너면 친척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근친혼이 횡행했었다고 한다.

         

       그 덕에 키예프의 귀족들은 푸른 피의 저주라고 해서 괴상한 병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으로 근친혼이 근절된 지금도 몇몇 가문은 유전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태자의 몸은 푸른 피의 저주로 인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앞으로 남성으로서 제구실을 못 해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실의 후계 문제는 방계를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황태자 본인의 마음이었다. 10대 초반에는 크게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앞으로 황태자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격지심이 될 수 있었다. 옛 황제 중에는 성군이었던 자도 적의 독화살에 잘못 맞아, 불능이 되면서 욕구불만과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암군이 된 이도 있었다.

         

       펠레빈은 주군이 부디 자신의 콤플렉스를 현명하게 극복하길 바랐다.

         

         

       ***

         

         

       키예프 방언은 남성의 말과 여성의 말이 미묘하게 구분되는 편이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명사, 동사, 형용사 뒤에 붙는 어미의 차이로 화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원더스타인이 니카를 소년이라고 판단했던 이유도 그의 말투 때문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남성형 키예프 방언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악수하는 순간, 그는 상대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대상은 일단 진화 연구소로 몸을 훑어보는 버릇 때문이었다.

         

       악수를 마친 원더스타인은 상대의 차림을 좀 더 자세하게 살폈다. 짧은 회색 머리카락에 비니 모자, 흔히 떡볶이 코트라 불리는 더플코트. 자신을 최대한 펑퍼짐하게 보이게 포장했지만, 이제 사람의 몸을 관찰하는 데 도가 튼 그는 쉽게 상대의 몸에서 여성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사내애처럼 하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군인 집안 출신이나 남자 많은 집에서 자란 여자는 남성어로 말하는 일이 흔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여행 중에는 의도적으로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뭘 그렇게 보는 거죠?”

         

       니카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자신을 관찰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그것은 니카 본인에게 있어서 역린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황태자로서 이곳에 있었다면, 당장 불경죄로 그를 무릎 꿇렸을 것이다.

         

       “후훗,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사과라고 했지만, 그의 눈과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귀여운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 같은 태도였다. 니카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저는……남자입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만약 원더스타인이 그의 알몸을 직접 봤다면, 그는 니카를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 연구소의 스캔 기능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와 조직의 생체 정보를 읽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여자로 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던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오가는 것을 느꼈다.

         

       니카의 양옆에 앉은 두 남녀는 서로 쓴 미소를 주고받았다.

       전하가 나오자마자 곤욕을 치르시는군.

         

       평소였다면 주군의 위엄을 수호하기 위해 나섰을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었다. 암행 중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도 주군의 외모 콤플렉스는 언젠가 극복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걱턱이 심해서 음식도 못 씹었던 전대 황가도 있었는데, 이쯤이야.

         

       원더스타인도 니카의 성난 눈초리를 보고 자신의 미소가 상대를 조롱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품에서 카드 한 뭉치를 꺼냈다. 요즘 단원들이 푹 빠져 지내는 그것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려면 2시간은 걸릴 텐데, 카드놀이라도 하시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자신에게 카드 승부를 걸다니.

         

       니카의 입에 조소가 걸렸다.

       웃는 것 외에는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저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한번 보고 싶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현향 님, 50코인 후원! 재밌게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리자리아 님, 4달째 정기후원 중이셨군요! 오늘 메시지가 떠서 확인했습니다! 늦은 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굴해 님, 1달 후원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