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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1

        

         지구는 여전히 푸르다. 단지 예전만큼 푸르지 않을 뿐이다.

         The Earth is still green. It’s just not as green as it used to be.

         

         정확한 이름은 나왔는지 익명 처리되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이 동네의 세계 3차 대전, 그러니까 대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전된 직후에 우주정거장에서 체류 중이던 미국 잔존 우주비행사의 씁쓸한 첫 교신 내용이 저거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장 창문 밖만 내다봐도 중앙 발전소의 요사로운 녹색광이 충천한 에메랄드의 도시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 참.

         

         어? 설령 삼림이 많이 훼손되었어도 지표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다가 우리 푸른 별의 근본이 아니냐고? 그것만 무사하면 멀리서는 여전히 아름답게 보이는 게 맞지 않냐고??

         

         – 아샤님…. –

         

         ……그래, 뭐. 바다의 일부는 무사하지. 일부는.

         

         당장 지구 최대 규모의 메트로폴리스인 네오 헤이븐에, 자원 치트의 온상지나 다름없는 아메리카 대륙에 네가 있다면 유럽 지중해가 붉은 죽음의 내해로 바뀌었다는 걸 크게 체감할 일이 뭐가 있겠어.

         

         하여간 이 좁은 별 안에서 우리가 서로 죽고 죽여댄 통에 인류라는 종의 우주 진출이 좀 늦어졌다 한들, 거시적 관점에서 이 광활한 은하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도도하게 흘러간다.

         

         혹자는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시점에서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건 한참 글러먹었다 할지 몰라도.

         

         내 머리로는 상상하기 힘든 뜻밖의 나비 효과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개인적으로 꼭 필요하거나, 이미 내가 엮여버린 사건이 아니라면 깊게 관여하는 걸 여태 기피한 나의 기본 스탠스가 우스워질 정도로.

         

         아, 물론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주제에 범우주적 고민에 너무 매몰되려는 건 아니고… 그저 내 지휘에 따라 우리 행성계를 형상화시킨 것 마냥 유유히 천장 근처 허공을 맴도는 구슬 무리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서 그랬다 할까.

         

         저항하기 힘든 훨씬 거대한 힘에 의해 생성된 자기 레일을 따라 회전하며 흘러가는 구체나, 우리 같은 작은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은하의 섭리나 사실상 다를 게 없다는 심오한 고찰을 멍하니 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음.

         

         특히나 미래 정보, 혹시라도 내가 모를 추가적인 네오 헤이븐 관련 지식을 얻기 위해서 연결된 꿈 비슷한 장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정신 내상을 입었다면 더더욱…!

         

         나름 소중한 기회인데 어처구니없는 헛손질도 존나 한두 번이지.

         이번엔 앞으로 도움이 될만한 걸 정말 뭐라도 알아내겠다 독하게 마음먹고 또 커뮤니티를 뒤적거려봤더니, 본격적인 공략이나 정보 토론 시즌이 한물갔는지 아니면 열기가 식었는지 야짤이랑 로맨스 이벤트 조건 같은 거나 신나게 공유되고 있더라니까??

         

         다짜고짜 처음부터 보이는 글이 ‘야, 발렌타인 자매 가위치기 씬 훔쳐보기만 해도 개꼴리지 않냐~ 난 직전에 세이브도 따로 만들어 놨다 퍄퍄ㅍ퍞ㅍ퍄퍄’라던가, 댓글로는 ‘둘 중 한 명 호감도 까이는 거 감수하고 몇몇 성인용품 태그 달린 물건을 미리 선물로 준 상태면 확률적으로 씬에 적용(?)됨’이라는 알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 있다던가.

         

         덕분에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얼마 못 가서 악몽이라도 꾼 것 마냥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원래 없던 캐릭터들이 잔뜩 늘어난 걸로도 모자라, 게임 이름부터 달라진 것치고는 초반 할렘가와 교단 시나리오에 큰 변화가 없다는 건 얼추 확인했으니까.

         

         뭐, 당장 창 밖만 슬쩍 구경해도 퇴폐 업소 간판만 수십 개가 보이는데 이젠 충분히 익숙해지지 않았냐고?

         

         물론 내가 그런 쪽으로 흥미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한때 ‘아나스타샤’라는 캐릭터로만 플레이타임 수백 시간을 박은만큼 대충 헬레나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 어떤 흐뭇한 그림이 그려질지도 예상은 가는데!

         

         그걸 수백만 유저들에게 공개 당하는 걸로도 모자라 치욕스러운 감상평까지 읽게 되는 건 진짜 완전히 다른 얘기라 보거든요? 시발??

         

         나 자신과 저기 게임 안에 있는 허구의 데이터 쪼가리를 혼동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완전 똑같이 생겼잖아! 크아아악!!

         

         위잉…… 윙… 붕, 붕!!

         

         흡사 화풀이를 하듯, 정교한 천체 모형처럼 유려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던 자기 궤도를 흐트러트린 다음 물질의 최소 단위를 형상화한 모양으로 뒤바꿔 이번엔 고리처럼 보이도록 외곽 전자 자리 구슬들을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소우주에 이어 원자.

         

         최근 네트워크 상으로 놀고 있으면 약간 기업 끄나풀 냄새나는 친구들이 내 정체를 찔러보는 메시지를 보내대서, 이런 식으로 훈련을 겸해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게 약간 버릇이 되었다고 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푹 빠졌다.

         

         덧붙여서 이러고 있으면, 마치 세상을 전부 내 손안에 넣은 것 같은 묘한 고양감이 치솟으며 내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잘 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휘감는 것도 꽤 좋았고.

         

         순수하게 내가 골랐던 특성에서 비롯된 초능력이라기엔 앞뒤도 안 맞고 여러모로 좀 과한 성능을 보여주는 게 슬슬 무서운 것도 사실이지만.

         

         뇌가 한 단계 더 높은 위치로 진화하는 듯한, 이런 잔재주 하나하나조차 맞물려가며 최적화되는 감각이 주는 중독성은 걱정보단 의욕을 북돋는 효과가 더 컸다.

         

         아무래도 이 몸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아낌없이 들어간 걸로 추정되는, 인간 진화를 위한 에나마의 실험적 기술이 크게 영향을 미친 거려나?

         

         무수한 시스템 해킹을 비롯한 프로그램 생성으로도 모자라, 자기 궤도 생성과 출력 제어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연산 수식을 무의식 중에 자동으로 알아서 끝마쳐주는 머리라니 정말 최고 아니야?

         

         정작 원래 에나마의 의도대로 사람한테 직접적으로 꽂아 넣는 건 아직도 서로의 의식이 예상치 못하게 뒤섞일까 거부감이 드는데 말이지. 하.

         

         총탄이 오고 가는 전장에서 적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고 일일이 사정을 봐줄 정도로 내게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전에 과거 개인사를 어쩌다 엿보게 되었나 싶더니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엘렉트라 연구소장 같은 경우가 너무 자주 생긴다면 어찌 사람이 신경을 안 쓰고 살겠어.

         

         흐음…….

         

         아닌가? 오히려 양심이고 나발이고 악랄하게 활용한다면 가족 관계나 인맥까지 알아내서, 혹여나 복수하러 오는 인간이 생기지 않도록 아예 뿌리부터 뽑아내 버리는 식으로 쓰는 방법도….

         

         – ……아나스타샤님!! –

         

         “왁!? 깜짝이야…!”

         

         쿠당탕! 그리고 까강!!

         

         갑자기 집중력이 깨진 탓에 사방팔방으로 날아간 외곽 구슬들이 집 여기저기에 부딪혔다.

         그대로 부유력을 잃은 채 수직 낙하하던 중앙 구슬은 이 결과를 예상하고 팔을 뻗어 낚아챈 제로 덕택에 내 이마로 떨어지는 대참사를 피했고.

         

         나이스…가 아니라! 원흉에게 감사를 표하기 전에, 별일 없으면 얌전한 얘가 갑자기 왜 이런대?

         

         – 소일거리 삼아서 개인 훈련을 하시는 건 좋으나, 제발 상완골과 하완골에 감는 코일 숫자를 거기서 더 늘리는 건 자중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십니다. –

         

         “…엥? 이게??”

         

         드로이드들이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다시 정리하는 와중인 구슬들을 힐끔, 눈을 굴려 살폈다.

         

         공업사에 주문 제작 연락을 넣은 건 제로지만 크기는 내가 정했던 만큼, 벽이나 가구에 부딪히고도 흠집 하나 안 난 요 반질반질한 장난감들의 스펙은 나도 잘 안다.

         

         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지름을 가진 저것들이 ‘위험하다’고 표현할만한 중상을 유발하려면 눈이나 입 같은 연약한 점막으로 전력 사출되어야 겨우 가능하지 않을까? 과장도 심하네.

         

         – 구슬이 아니라, 능력을 다루고 계신 방향성이 굉장히 아슬아슬하신 겁니다. 생각보다 많이 즐거워하고 계신 것 같아서 여지껏 말을 아꼈습니다만.

         

         무의식 중에 신체 컨디션과 내부 조직의 위치를 고정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압력을 중화하고 계셔서 그렇지, 일반인이 팔을 축대로 삼아 그런 복잡한 다변성 물리력을 가했다면 탈골은커녕 진작 뼈가 살을 찢고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겁니다. –

         

         “어, 어?? 아니, 그건….”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온다.

         

         이 동네에서는 생각보다 흔한 경우다. 그게 작업 도중의 사고가 되었던 무분별한 쌈박질의 폐해가 되었던 간에, 비싼 약품과 장기간의 체질 개선 시술을 받아야 하는 내구력 및 근골격 개선 개조보단 단순하게 악력이나 각력을 증폭시켜주는 임플란트만 박고 끝내는 경우가 많으니까.

         

         만약 지나치게 흥분해서 힘조절을 못했다 하면, 옛날엔 피멍 좀 들고 코 좀 부러지는 수준에서 끝날 주먹다짐도 지금은 얻어맞은 신체가 미처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부러진 뼈가 막 튀어나오고 때린 사람 손가락도 쪼개질 가능성이… 우욱.

         

         – 그 증거로, 최근에 어깨가 가끔 뻐근하다며 잠자리에 문제가 있나 좀 확인해달라 부탁하지 않으셨으니까? 생존에 필요한 향상성, 거기에 건강에 관해선 불변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아샤님의 신체에도 꽤 부하가 걸린 겁니다. –

         

         “……나야 몰랐지. 이제부터라도 조심할게.”

         

         그 부분에 대해선 뒤늦게 성장기 비스무리한 게 왔나 싶어서. 영락없이 그것 때문에 키가 자라는 통증인 줄 착각했다 실토하면 날 너무 측은하게 생각하려나?

         

         좋아, 이 비밀은 모른 척 조용히 사과하고 묻어둔 채 넘어가도록 하자.

         어떻게 비장의 기습 수단은 확실하게 준비해놓되, 항상 연습하느라 무리하지는 않는 걸로.

         

         나쁜 버릇? 과한 손장난?? 하여간 그건 적당히 컨디션을 봐 가면서 조절한다 치고.

         

         오늘 치 운동은 아침에 일찌감치 끝내 놓은 데다가, 무슨 메가 코프에서도 애용하는 전문 맛집으로 소문이 났는지 비대면으로 해결할 수 있는 데이터 복구 의뢰도 전달받은 하드웨어를 다시 말끔하게 고쳐서 드론 택배로 반송한지 오래.

         

         따라서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근데 이제 뭐함??’ 이란 유서 깊은 질문에 내가 내밀 수 있는 답은 두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었으니.

         

         성실하고 우직한 암시장 해커가 그렇듯 한 마리의 하이에나처럼 다른 의뢰를 찾아 네트워크를 헤매던가.

         아니면 심심풀이 삼아… 그리고 가끔 정보를 얻기 위해 싸돌아 다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달라붙은 스토커를 이 참에 확 떼어내던가.

         

         그래, 응. 말이 헛나오거나 잘못들은 게 아니라 진짜 맞습니다.

         

         아까도 잠깐 스쳐 지나가듯 말했지만. 이젠 숫제 현실에서 쫓는 걸로도 모자라, 무려 가상 공간에서도 내가 뭐하는 년인지 알아내려고 아득바득 달라붙는 호기심 많은 새끼들이 나타났어요. 예.

         

         

         [ 사실해킹잘모름(idkHacking) 님! 안녕하세요! 현재 네오 헤이븐으로 활동 거점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저희 익명 지향 해커 팀, 사이퍼 사이코에서 귀하의 악랄한 솜씨에 반해 팀원으로 모시고 싶다는 제의를 드리고자…. ]

         

         [ 야 이 개씨발년아!! 배달 테러 작작해라 진짜 씹. 요즘 너처럼 백신 프로그램 믿고 깝치는 새끼가 한둘인 줄 아냐?? 니 새끼가 그라운드 제로 3티어 구독자여도 내가 이틀… 아니, 일주일만 집중해서 대가리 박으면 신상 터는 건 일도 아니거든? 작작하고 내 나와바리에서 꺼지…. ]

         

         [ 대체 어떻게 중앙 관리자도 없는 폐쇄 게시판에서 권한을 복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여기가 곧 집이고세상이나다름없는데네가뭐라고날차단해풀어줘차단풀어줘빨리차단풀어줘빨리빨리빨리빨ㄹ ]

         

         [ …………A양? 확실히, 당신의 능력에 비하면 이렇게 커뮤니티에서 노는 건 귀여운 장난에 불과하겠지만. 공용 네트워크는 엘리시움 코퍼레이션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

         

         

         봐라, 거의 미어터질라 하는 내 가계정 쪽지함을.

         누구보다 전문성 높은 일부 커뮤니티에 과몰입하는 건 자기들도 마찬가지면서.

         

         거 익명성을 믿고 함부로 나쁜 말을 해서 빌미를 제공하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 채 마냥 남 탓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까?

         

         미래 도시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정말 심각합니다 여러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태 제대로 나올 기회가 없었던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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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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