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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1

       마왕군은 알게 모르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다.

       

       호천 길라흐가 전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민천 요르문간드는 어느 순간부터 공세를 멈추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민천은 왜 움직이지 않는가?”

       “급습에 실패한 뒤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멍청한 소리!”

       

       마왕은 손을 휘적거리며 소맷단을 정리했다. 그가 옥좌에 틀어 앉은 채로 전령을 나무랐다.

       

       “그 민천이 경상도 아니고 중상을 입어? 1천하고도 5백 년을 더 산 고룡이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사실은 먼저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조급했다.

       

       요르문간드가 계속해서 정령왕들을 붙잡아 두고 있어야 순식간에 수도로 남하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민천의 군대가 정령왕을 묶어두지 못한다면 전쟁은 지금보다 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전으로 끌고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마왕군이다.

       

       “상천. 네가 없으니 일이 쉽지 않구나.”

       

       에테르가 적으로 돌아선 이상, 단기 접전으로 끝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 1천 년을 준비해 온 대업이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물거품이 된다!

       

       남은 세 사천이 모두 떠나거나 죽었으니, 이제 마왕에게 남은 최고 전력은 한 명뿐이었다.

       

       창천의 파스모.

       

       “마왕이시여, 전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왕이 옥좌에 앉아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는 동안, 바깥을 둘러보고 온 파스모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엘프놈들이 수도를 비우려는 모양입니다.”

       

       마왕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헛소리!”

       “정말입니다.”

       

       파스모가 고개를 숙여가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상천이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더는 흑주를 생산할 수 없다고 합니다. 민천에게 해당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그 점이지요.”

       “…….”

       “게다가 얼마 전 수군이 민천의 손에 모든 권능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마왕은 침음을 삼키며 한참을 생각했다.

       

       수군 시큐엘이 민천의 ‘구안와사’를 맞고 전선에서 이탈하게 되었다는 건 확인된 소식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남은 정령왕은 둘뿐이었다.

       

       둘만이라면 마왕 혼자서 제압하고도 남는다. 마왕은 이미 전계 정령왕과 화계 정령왕을 포식하여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상천이 위독하다는 것이 사실인가?”

       “정확한 정보입니다.”

       “연기일 수도 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어떻게?”

       

       파스모가 고개를 조아리며 구체적인 정황을 읊었다.

       

       “제가 그녀의 친우를 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천은 그 소녀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정령의 샘에 뛰어들었습니다. 소식을 들어보니 남은 생명을 대가로 지불한 모양입니다.”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이해가 간다.

       

       ‘상천은 예전부터 정이 많은 성격이었지.’

       

       조금이라도 넉살 좋은 소리를 해주면 그게 정말로 좋은 줄 알며 헤실헤실 따라오는 아이였다.

       

       금안족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하며 자신의 군세에 들어왔는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천 에테르는 ‘대인관계능력’은 별로여도, ‘학문’과 ‘작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닌 괴물.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사실은 거짓일 수 있다.

       

       ‘어떻게 한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파스모가 추가로 발언했다.

       

       “주군, 한시라도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우유부단하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신중한 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우유부단한 자는 결정을 미루느라 처신을 잘못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신중한 자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대책을 마련하거나 최적의 수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마왕은 후자였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되, 일이 틀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무던히 모색하는 존재. 그랬기에 총명한 여러 금안족을 휘하에 둘 수 있었다.

       

       “수도에 첩자의 수를 늘리고 전황을 꾸준히 보고하도록 하라. 혹여 놈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희소식이 들려왔다.

       

       “주군! 대통령 놈이 천도를 감행했습니다!”

       

       마왕은 옳다구나 싶어 박수를 쳤다.

       

       “장소는?”

       “남부 항구도시인 티르판입니다!”

       “피난민 행렬이 있을 것이다. 규모와 방향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알아서 오라.”

       

       마왕군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파스모가 마왕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행렬 방향은 총 열다섯입니다.”

       “민천이 만들어 둔 폭탄이 얼마나 남았지?”

       “100kg에서 딱 4만큼 모자랍니다.”

       

       96kg.

       

       한 기에 6.4kg을 넣어 10kT급을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정확히 열다섯 기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마왕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씰룩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마왕이 손을 뻗어 명령했다.

       

       “폭탄을 만드는 즉시 캐슬 브라보에 모두 실어라. 6군단은 서쪽 산맥을 우회해서 피난민 행렬을 끊는 데 주력하도록.”

       “예.”

       “빌헬름은 3군단을 움직여 남동쪽 해안선을 사흘 안에 장악하도록 하라. 브륄리움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두보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인사를 마친 군단장들이 차례로 빠져나갔다.

       

       “창천, 네게 2번과 3번 집단군을 위임하겠다. 짐의 특무대를 선봉으로 내어줄 테니 모루로 사용하거라.”

       “알겠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거든 부르라. 짐이 직접 군세를 끌고 나서서 정령계를 치겠다.”

       

       이것으로 모든 작전 회의를 끝마쳤다.

       

       혹시나 싶어서 엘프국 수도의 동향도 눈알 빠지도록 살폈다. 파스모가 전달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여당은 수도 이전 법령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했고, 행정부는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계엄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피난시켰다.

       

       피난 행렬에는 일반 국민은 물론이요, 경찰과 제국 측 고위 인사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특히 경찰과 제국 인사들은 준수한 마도사로서 피난민들의 경호를 자처했다.

       

       저들의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좋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금색 눈동자를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박해하던 종족이 바로 엘프였다. 엘프의 선민의식이 오늘날의 재앙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불어 정령도, 여신도 마찬가지.

       

       여신은 금안족을 만들어 놓고 정작 방치하기만 했다. 많은 금안이 죽고, 다치고, 겁탈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세상을 관리하라고 풀어 둔 정령들이 엘프의 뜻에 찬동하여 차별과 억압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젠 뒤엎을 때였다.

       

       ‘똑같이 당해보라지.’

       

       마왕은 지금까지 죽은 금안의 수만큼….

       

       아니, 그에 몇 배는 되는 엘프와 정령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요량으로 이 전쟁을 일으켰다.

       

       차별이란 게 뭔지 몰랐던, 어리고 가난했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 금안을 위한 생활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왔다.

       

       올해.

       

       아니.

       

       이번 달 내로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 맺어진다.

       

       들판에 올라 피난 행렬을 구경하던 마왕은 기꺼운 듯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며 부하들의 전언을 기다렸다.

       

       “주군, 모든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남쪽 해안선의 장악도 끝났습니다.”

       

       왔구나.

       

       “폭탄을 떨어뜨릴까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건 모든 정령왕을 죽이고 난 다음.

       

       정령계 심부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엘프놈들의 하찮은 모습을 구경한 다음에 할 일이다. 이른바, 디저트로 즐길 계획이었다.

       

       “창천, 자네가 먼저 세계수로 진입하게. 아마 정령왕이 올 테니까 미끼 역할을 자처하고 조금만 버티고 있도록. 짐이 곧 가서 놈들을 깡그리 먹어 치울 것이다.”

       

       

       **

       

       

       모두를 수도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메르헤름에는 이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도시 전체가 중성자선을 맞은 듯 건물만 멀쩡하고, 이곳에 있는 사람은 전부 숨통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조용하다.

       

       그야말로 유령 도시. 혹은 아포칼립스 이후를 보는 듯한 광경.

       

       모두가 울며불며 작별한 터전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엘프 한 명과 금안족 한 명뿐이었다.

       

       “……가자.”

       

       버멜이 말했다.

       

       음산해진 도시를 한 바퀴 둘러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때는 12월 초.

       

       흑주가 없어도 하늘은 구름에 가려 우중충한 날씨로, 곧 눈이나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로테가 직접 만들어 준 하얀 목도리를 둘러메고 스태프를 들었다. 버멜은 이런저런 아이템을 끼우거나 먹고 마시며 준비했다.

       

       “하나 먹을래?”

       “뭔 사탕이야?”

       “마력 재흡수 효율을 높여주는 거. 먹어두면 좋아.”

       

       뭐.

       

       사양 않고 입에 털어넣었다. 시큼한 포도 맛이 났다. 내 동생 로즈마리가 생각나는 맛이었다.

       

       “쓰읍.”

       “왜 그래?”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은 목숨이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에 걸린 것처럼 사지가 뻣뻣하고, 목도 따끔거린다. 다리는 아예 사라진 것처럼 허하다.

       

       마치 정령처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시발, 진짜 뒈지는구나.”

       

       실감이 안 났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로테나 프레이를 비롯한 다른 인연들과 모조리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전부 찰나의 꿈처럼 느껴져서.

       

       “야, 그래도 지구로 귀환하거나 하면 너랑 만날 수 있지 않겠어? 찾아오고 싶으면 전에 알려준 번호 있잖아.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자.”

       “……그래.”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호프집에서 알바한다고 했었지? 거기 치킨 잘 튀기냐? 나 치킨 존나 좋아하는데.”

       

       우리는 철로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봤자 내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버멜은 단답이나 해주는 정도가 다였지만.

       

       “새끼, 긴장되냐?”

       “아, 아니…….”

       “최종보스 잡으러 가는 길인데 어깨 좀 펴라.”

       

       일방적으로 대화하면 그게 대화인가. 그런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뭐라도 말해 보라고 보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얘도 많은 사람이랑 대화해 보지 않은 티가 난다니까.

       

       물론 이리 말하면 나도 찔릴 수밖에 없다. 지구에서도 그렇고, 이쪽 세계에서도 그렇고. 대부분의 경우 나는 내향적이었다. 로테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됐다, 됐어. 아무튼 지구로 돌아가면 나는…….”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마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도착했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목표 지점이 한 치 앞이었다.

       

       세계수.

       

       세계…….

       

       세계수?

       

       “시발, 뭐야.”

       

       정령계로 통하는 입구가 불타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만우절 표지를 그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네요…..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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