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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2

     [제국력 100년 1월 2일, 오후 2시. 세이레네 백작령 백작의 서재.]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세이레네 백작의 집무실.

     켕기는 게 어찌나 많은 건지, 밖으로 통하는 창문 하나 없는 곳으로 바토리 소장은 나를 초대했다.

     “옛날이야기를 좀 해볼까. 500년 전….”

     “싫습니다.”

     백작의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 바토리 소장의 행동에, 나는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결론만.”

     “…….”

     “옛날이야기를 듣기에는 지금 황제의 움직임이 상당히 신경 쓰이기에.”

     “뭐야. 자기는 막 여유롭게 마구 이야기를 하고 그랬으면서.”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법입니다.”

     “…푸핫!”

     바토리 소장은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그렇네, 그래. 내가 죽이면 정당한 보복이고, 남이 검을 휘두르면 곧장 다스려야 할 중죄인 법이지.”

     “지브롤터는 방향을 결정지었습니다. 나머지는 바토리 소장, 당신의 몫입니다.”

     나는 아래를, 그리고 제국 방향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간의 노고를 인정하여,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남든지, 아니면 제국으로 가든지.”

     “그걸 결정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

     바토리 소장이 다리를 꼬며 자세를 숙인다.

     “네가 겪은 시간대에서, 나는 어떻게 되었어?”

     “…….”

     “그렇게 경계하지 마. 황제의 오른팔이라며.”

     “황제가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황제가 그런 낌새를 파악하라고 나를 보낸 거야. 자세한 정보는 주지 않았지만, 나도 어느정도 걸쳐있는 사람이거든.”

     “사람입니까?”

     “사람으로 살고자 하면 사람이지. 네가 알고 있는 바토리 에르제베트 연구소장겸…에이, 그냥 소장으로 퉁치자.”

     바토리 소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좋아. 말해줄 생각은 없다는 거지?”

     “거짓된 황금의 세계에서 얻은 정보로 파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능왕의 첫 번째 세상.

     “그곳에, 흡혈귀는 없었습니다.”

     그 세상을 바라본 그 어떤 노스트럼 사람들도 ‘흡혈귀 병사’의 존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 흡혈귀는 왜 사라졌을까?”

     “숙청당했겠죠.”

     “왜?”

     “황제는 흡혈귀를, 제국의 그림자를 싫어하니까요.”

     “그렇게 흡혈귀를 이용하고 있는데도?”

     “쓸모를 다한 도구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미학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네. 자식마저도 도구로 이용하는 자인데, 제국의 역사와 같은 이들이라고 해도 다를 바는 없겠지.”

     바토리 소장이 두 손을 들었다.

     “소개할게. 테르시안이 아직 왕국이었을 시절, 초대 황제 테르시안의 딸 바토리 에르제베트 테르시안이야.”

     “…….”

     “너, 지금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한 거니.”

     “별 생각 안 했습니다.”

     그저, 나이를 속여도 단단히 속였구나 하는 생각뿐.

     하지만 나는 노스트럼의 신사다.

     여자의 나이는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배웠다.

     진짜로 그런 걸로 공격하는 건 싸우자는 말이며,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바토리 소장은 즉시 제국의 사람이 될 테니.

     “흐응…. 입밖에 내뱉지 않는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여지는 있는 모양인데.”

     “있다마다요.”

     “지브롤터는, 흡혈귀를 받아줄 생각이야?”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

     바토리 소장의 눈이 가늘어진다.

     “진심으로?”

     “인간이든 엘프든 흡혈귀든, 반목하고 다투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죠.”

     “그레이 지브롤터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현이네. 밖에 있는 공주님 때문인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지에 드래곤이 살든 흡혈귀가 살든, 저를 귀찮게 하지 않고 세금만 꼬박꼬박 내면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나는 한 손을 들었다.

     “제가 추구하는 건 가정의 평안입니다. 드래곤이나 흡혈귀가 아니라 언데드라고 하더라도, 지브롤터에서 지브롤터의 문화에 들어와 지브롤터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 자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죠.”

     나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첩이 되십시오.”

     “와, 여기에서 또 그 소리를 한다고?”

     “진짜 부부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혼인동맹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흡혈귀의 대표로서, 지브롤터에 투항하는 모습을 보여라?”

     “그렇게까지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는 마시고.”

     나는 바토리 소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는 흡혈귀뿐만 아니라 엘프들조차 전부 없애버릴 겁니다.”

     “…….”

     “농담이 아닙니다. 에르윈 황후는 숙청될 것이며, 에르윈 황후를 인질로 삼아 엘프의 숲을 습격하여 엘프를 초토화시킬 것입니다.”

     “숲의 하이엘프라. 그들은….”

     “그들은 지브롤터로 이주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나, 삶의 터전이 붕괴된다면 이주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요.”

     “……그렇겠네.”

     바토리 소장이 꼬아둔 다리를 풀며 내 앞에 섰다.

     “내가 백금경 에이페리아를 피하고 있던 건 알고 있지?”

     “어렴풋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토리 소장은 백금경 에이페리아와 접촉한 적이 없다.

     “그녀는 따지고 보면 내 이모님이셔.”

     “관심 없습니다.”

     “저기,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거야? 제국이 500년 동안, 노스트럼이 500년 동안 숨겨둔 세계의 이면에 있는 비밀이?”

     “글쎄요.”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자식들에게 들려줄 동화 레퍼토리가 다 떨어지면 그때 듣겠습니다.”

     “…정말 궁금하지 않아? 골드드래곤과 실버드래곤의 격돌이라거나, 사망한 실버드래곤의 후예가 블러드 엘프라거나, 도망친 엘프들이 건국한 국가가 테르시안이라거나!”

     “반쯤 알고 있고 나머지 반은 몰라도 상관없는 내용이었지만, 그런 역사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나는 바토리 소장에세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흡혈귀들. 통제 가능합니까?”

     “……전혀.”

     바토리 소장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햇빛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건 전부 내 힘을 제국에 두고 왔기 때문이야.”

     “…….”

     “무슨 말인지 알아? 흡혈귀로서의 피를 모두 뽑아낸 다음, 평범한 인간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이런 건 빼고.”

     바토리 소장이 자신의 갈라진 눈동자를 가리켰다.

     그 모양새가 흡혈귀 특유의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비룡의 것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그렇습니까.”

     만.

     “그러면 피를 뺀 시점부터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니, 28살이 아니라 지금은 3,4살인 셈이로군요.”

     “……뭐?”

     그런 게 다 무슨 대수랴.

     “아니면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이름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사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미 아카데미 2학년으로, 올해로 19살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양심이 있지.”

     바토리 소장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19살이면 너보다 어린 셈인데.”

     “연상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나이 차이가 적당히 나기는 해야지. 안 그러면 괜히 이상한 것들이 엮으려고 들 걸?”

     “누구랑요. 누아르랑 당신을?”

     “하하! 여기…아, 이건 안 되겠네.”

     바토리 소장이 나를 향해 가리키려던 손가락을 꺾었다.

     “앞에 있는 사람도, 저기 밖에 있는 사람도 둘 다 죽이려고 들려고 하니.”

     “이런 식으로 선을 넘지만 않으면, 지브롤터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입니다.”

     “…그러게. 참, 재미있는 곳이 되겠네.”

     바토리 소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책상에 걸터앉는다.

     “흡혈귀로서의 마법, 엘프로서의 수명, 마스터급 마력.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그냥 오래 살았다가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존재일 뿐이야. 그런데도 괜찮겠어?”

     “무언가에 사랑에 빠진 똑똑한 미녀를 아군으로 두는 것만큼 강력한 아군이 또 없죠.”

     “…….”

     “진짜 아버지와 그런 관계가 되더라도 응원해드리겠습니다.”

     “수백 살 먹은 할머니라서 그런 게 아니고?”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스타시아 일편단심이라.”

     나는 바토리 소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잡으신다면, 지브롤터와 협력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황제는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특히 흡혈귀들을 수용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더더욱 지브롤터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저만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바토리 소장이 내 손에 맞추어, 오른손을 뻗는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필요하다면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도, 혹은 황제를 죽일 생각도.”

     “무시무시한 말이네. 아스타시아와의 사랑을, 가족을 위해서는 황제조차도 죽일 수 있다는 말?”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바토리 소장이 내 오른손을 꽉 붙잡는다.

     “거짓된 황금이 보여주는 세상의 사람이랑, 이렇게 다를 수가 있으려나?”

     “바토리 소장.”

     “후후후, 알았어. 비밀로 할게. 지금까지와는 달리 입 굳게 다문 채로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꽉 붙잡아서 그런 걸까.

     마나 한 점 없지만 유독 차가웠던 손으로부터 약간의 온기가 전해진다.

     “대신 흡혈귀가 된 사람들, 내가 자유롭게 다뤄도 되지?”

     “제국처럼 밤낮으로 연구를 시키든, 아니면 지하에서 농사를 짓든 마음껏 다루십시오.”

     “어머나, 누가 황제랑 똑 닮은 사람 아니랄까 봐.”

     바토리 소장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놓았다.

     “이보세요, 도련님. 내가 누구?”

     “바토리 소장이시죠.”

     “아니, 종족.”

     “전 흡혈귀이자 전 블러디 엘프.”

     “……지금은 인간이라며.”

     

     바토리 소장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인간이 되었는데, 그 사람들도 인간이 될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아.”

     음.

     “……뭔가, 엄청 어려운 방법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어렵긴 한데, 그런 어려운 방법을 극복해내는 것이 연금술, 마도공학이거든? 믿지 못하는 거야, 설마?”

     “아니요. 바토리 소장이 그런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면, 분명 성과를 거둘 겁니다. 다만….”

     “다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흡혈귀를 배척하지 않을 거라면, 흡혈귀들을 밤낮으로 마법 공학을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연구원들, 햇빛 밖으로 나오지도 않을 텐데.”

     “……농담이지?”

     “반쯤은요.”

     인간보다 흡혈귀가 되는 게 더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직업이 있다면, 역시나 그쪽이 좋지 않을까.

     “아예 지하도시 에르제베트 백작령을 만들어 버리죠. 햇빛이 아닌, 마도공학으로 만들어 낸 마석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이는 지하도시를.”

     “……아.”

     바토리 소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방금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이 아이디어, 죽기 전에 재현해 낸다면 분명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될 거야.”

     “필요한 게 뭡니까?”

     “안전하게 연구하고 실행할 장소.”

     바토리 소장이 눈을 샐쭉인다.

     “황제로부터, 나 살려줄 거야?”

     “지브롤터는 누구든 환영합니다. 그것이 제국의 사람이든 흡혈귀든.”

     “지브롤터에서 살아가려면 제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뭔데?”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

     “지브롤터의 평화를 깨뜨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토리 소장 배신 기념으로

    이전 편 일찍 올렸으니 연참하지 않을 거라는 독자의 기대를 배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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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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