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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2

       세계수로 향하는 길을 내어준 덴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만 마수들이 옳다구나 하고 들어올 테니까.

       

       세계수. 즉, 정령들의 터전. 이 정도 되는 장소를 미끼로 써야만 마왕의 의심을 풀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

       

       내 말에 버멜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이곳에서 몰려오는 마왕군을 한 번 격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꼴이 정반대가 되었다. 마왕군이 먼저 들어오고, 우리가 그들을 뒤쫓는 셈이 되었으니.

       

       초장부터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전쟁이 이런 법이지 뭐.”

       

       모 장군의 명언이 있지 않던가. 작전 계획이라는 건 도무지 1분을 가는 법이 없다고. 전투가 그만큼 변칙적이라는 뜻이다.

       

       나와 버멜은 평정을 되찾은 뒤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존나 잘 타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때였다.

       

       활활 타오르는 세계수 위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팔의 관절은 네 마디에 이르렀다. 손목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는데, 그 뒤로 이어진 쇠사슬이 찰그락거리며 서로 부딪혔다.

       

       키가 작은 것을 보아하니 드워프였다.

       

       변절된 드워프.

       

       “상천 아닌가?”

       

       그 드워프가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저 녀석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파스모. 네가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다.”

       

       창천의 파스모.

       

       사천 중 마왕을 가장 닮은 자.

       

       전투력은 민천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군단을 통솔하는 능력과 변칙적인 공격을 구사하는 실력에는 가히 다른 사천을 따라잡을 자가 없는 마왕군의 간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마왕님께서 기뻐하시겠어.”

       “마왕은 내가 중병에 걸린 줄 알고 있던가?”

       “그럼. 네 처절한 연기 덕분에.”

       

       파스모가 노인 특유의 끌끌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그에 따라 하늘에서 흔들리던 쇠사슬도 땅에 끌릴 정도로 낮아졌다.

       

       “상천, 너란 녀석은 말이야. 권모술수를 부리는 덴 영 별로란 말이지. 눈에 보여. 아직 날 따라오려면 멀었다.”

       

       그때였다.

       

       “과연 그럴까?”

       

       저벅.

       

       버멜이 앞으로 나서며 스태프를 쳐들었다.

       

       “웬 애송이냐.”

       

       버멜은 파스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야심을 숨기는 것 하나는 잘하는구나.”

       “……!”

       

       버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창천의 파스모. 너는 여신을 쓰러뜨리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이 대륙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

       

       시작됐다.

       

       입딜.

       

       “그래서 경우의 수를 여럿 생각하고 있었겠지.”

       

       만약 우리가 마왕과 공멸한다면?

       

       세계관 최강자가 사라진 틈을 타 아렌스 대륙을 자신의 손아귀로 들이려고 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왕을 무찌른다면?

       

       그때가 되면 나와 버멜도 힘이 빠져 있을 테니, 우리를 손쉽게 제거하고 난 다음 민천까지 급습하고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만약 마왕이 우리를 무찌른다면?

       

       그때도 마찬가지다. 마왕도 지칠 대로 지쳤을 테고, 세상을 얻었다는 자만심에 빠져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을 테니 흑주를 탈취하여 그를 제압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네 계획은 좌절될 거다. 왜냐.”

       

       버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우린 너부터 쓰러뜨릴 거거든.”

       

       파스모의 입꼬리가 점차 내려간다. 그 와중에도 버멜의 아가리 공격은 멈출 줄 몰랐다.

       

       “줄타는 것 하나는 정말 잘해. 이번에 마왕에게 거짓 보고를 날린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겠지. 너는 에테르가 중병이라는 소식을 믿지 않았지만, 마왕에겐 믿는 것처럼 보고했어.”

       “너, 이, 새끼.”

       “왜냐? 마왕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떠보고 싶었을 테니까. 만약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정말로 자신을 믿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테고, 아니라면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해서 몸을 사렸을 테지.”

       

       내 말 틀려? 버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끝맺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스모는 팔을 들어올렸다.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군. 다만….”

       

       [전설급 고유마도 ─ 육진(六塵)]

       

       [색(色) : 러스티카(Lustica)]

       [성(聲) : 에코(Echo)]

       [향(香) : 시센트(Ciscent)]

       [미(味) : 글루코트(Glucott)]

       [촉(觸) : 엑토플라즘(Ectoplasm)]

       [법(法) : 테미스(Themis)]

       

       “살려보낼 수는 없다.”

       

       등불이 빛나기 시작했다.

       

       

       **

       

       

       색, 성, 향, 미, 촉, 법.

       

       여섯 가지 번뇌를 상징하는 절멸급 마수가 현현한다.

       

       나타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촉(觸)의 마수가 빛의 명멸과 그림자의 대비로부터 현현한다면, 성(聲)의 마수는 공기의 진동으로부터 메아리치듯 태어난다.

       

       물리적인 현상에 불과한지, 마법으로 빚어낸 이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파스모가 소환한 마수가 여섯 마리가 전원 구천지대계 상위 랭크에 올라가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내 생각을 읽어낸 건 용하구나, 이름 없는 엘프야.”

       “버멜, 버멜 호르데다.”

       “……이곳에 뼈를 붙는 건 너와 상천이다. 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허.”

       

       촤악!

       

       녹안의 엘프, 버멜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버멜의 주변에 옥빛 마력이 파도치듯 일렁인다. 이내 머리 위로 정령 한 마리가 고결한 자태를 뽐내며 나타났다.

       

       파스모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

       

       그녀가 둥글둥글했던 눈매를 날카롭게 벼리며 파스모를 쏘아본다. ‘네놈을 토벌하겠다’, 그리 말하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진 파스모가 입가를 씰룩였다.

       

       “보통 애송이가 아니었군.”

       

       간신히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속은 포도주에 담금질한 비스코티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네임드도 아니면서 정령왕과 계약해?’

       

       무언가 있다.

       

       저 애송이에게는, 필시 무언가가 있다.

       

       1천 년을 숨겨 온 자신의 꿍꿍이를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천 에테르와 친한 듯 구는 모양새까지.

       

       ‘상천이 알려줬을 리는 없고.’

       

       저 버멜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내뱉은 말 중에는 에테르조차도 모르는 내용이 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전지적 시점에서 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오십견이라도 온 것처럼 팔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분명히, 마왕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숨겨왔다. 그와 같이 봉인되는 치욕을 겪어가면서까지 충성을 맹세하는 척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 놈 먼저.”

       

       버멜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몸을 예리한 칼날 삼아 순식간에 후열로 짓치고 들어왔다. 버멜은 스태프를 월도처럼 휘둘러 법(法)의 마수를 순식간에 베어냈다.

       

       끼긱!

       

       “한 번에…?”

       

       파스모는 반사적으로 몸을 내뺐다.

       

       촤아악! 그 앞으로 예의 사선이 그어졌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군.’

       

       제아무리 사천이라고는 해도, 정령왕의 공격에 직격하면 맥을 추릴 수 없다.

       

       “법(法)을 베었으니 다음은 색(色)이로군.”

       “……!”

       

       버멜은 이어서 색의 마수를 잘라냈다.

       

       이 또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록 에어리얼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천의 보조 없이 혼자서 절멸급 마수 두 마리를 제압한 버멜.

       

       그가 씩 웃으며 촉의 마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놈을 막아라! 어서!”

       

       네 마리의 마수가 일제히 달려든다.

       

       그러나 전반적인 버프를 주는 법의 마수가 무너지고, 회복을 담당하는 색의 마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절멸급에도 급이 있다. 그리고 에테르 정도면 절멸급 네 마리는 혼자 처리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저 버멜인지 캐러멜인지 하는 엘프까지 가세하니 파스모가 짜놓은 진이 성벽처럼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둘이라고 빈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파스모는 옳다구나 싶으며 허를 찌르라고 명했다.

       

       하지만.

       

       “와, 씨. 방금 위험했네.”

       “괜찮아?”

       

       에테르가 위험하면 버멜이 뒤를 봐주고.

       

       “너는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알겠으니까 집중이나 해….”

       

       버멜이 위험하면 에테르가 뒤를 봐준다.

       

       마치 몇 년은 함께 합을 맞춰 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

       

       ‘내 부하들이, 저 애송이한테 당하고 있다고…?’

       

       서로 둘이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니 버멜 호르데라는 녀석을 생전 처음 보는 파스모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된다.

       

       파스모의 군단 지휘능력은 사천 중 으뜸이다. 정령왕 둘 정도가 온다고 해도 한 시간은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5분도 못 버티고 있다.

       

       한 마디로 개쳐발리고 있었다.

       

       “이놈이 마지막이야?”

       “그런가 본데.”

       

       퍼억!

       

       마지막 남은 미(味)의 육진을 파괴한 엘프와 에테르가 파스모를 향해 동시에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쓰읍.”

       

       에테르는 자세를 유지하다 말고 바닥에 피가래를 뱉었다.

       

       ‘꾀병이, 아니었나?’

       

       상천이 중병에 걸렸다는 것조차도 거짓이 아니었다.

       

       결국 저 둘을 상대로 들어맞은 게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마왕은 의심이 많기로 유명한 자지. 네가 한 말에 과연 거짓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까?”

       

       버멜이 물었다. 파스모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상천이 실제로 죽을 위기에 있었다는 것도.

       

       자신이 1천 년 동안 야심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마왕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이용했단 말인가?

       

       물론 마왕이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자신의 전의를 상실시키기 위한 저 엘프놈의 수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스모는 알게 모르게 두려웠다.

       

       만약, 저 버멜이라는 자가 여신의 아바타라면.

       

       “……실로 괴물이다.”

       

       자신은 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파스모는 끌끌 웃으며 등불을 움직였다.

       

       “이거… 작전을 변경해야겠군.”

       

       정령계를 침공하는 건 조금 뒤로 미룬다.

       

       일단 본영으로 돌아가 마왕과 합류해야 한다.

       

       몸을 돌려 후퇴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가?”

       

       터억!

       

       머리 위로 장난 아닌 압박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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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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